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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4/02/13 23:50:39
Name   nothing
Subject   인사고과와 사회적 가면에 대한 생각
이력서를 적어내는 일은 어렵습니다.
내 역량과 성과를 효과적으로 드러내면서도 과장하면 안되니까요.
지나치게 겸손하면 읽는 이의 이목을 끌 수가 없고, 반대로 성과를 한껏 부풀려 과장하기 시작하면 그건 거짓말이 되어 버립니다.
하지만 무엇이 과장이고, 무엇이 과장이 아닌지 판단하는 일은 어렵습니다.
어떤 일들은 객관적/정량적 지표로 측정하기가 상당히 어려운 까닭입니다.
이 경우에는 어쩔 수 없이 주관적인 판단 기준이 들어갈 수 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면접은 더 어렵습니다.
이력서야 충분한 장고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손 치더라도, 면접은 실시간으로 문답을 주고받는 속기 바둑과 같습니다.
물론 사전에 겸손과 과장 사이 어딘가에 균형의 선을 그어놓고 면접장으로 보무도 당당하게 들어가지만,
정신없이 문답을 주고 받다 보면 한번씩 나도 모르게 그 선을 넘어버리고야 맙니다.

저는 그동안 이러한 서류/면접 과정을 통해 이직을 몇 차례 해왔는데요.
그러다보니 한번씩 "나를 지나치게 과장하지 않았나" 하는 불안도 불쑥 불쑥 고개를 처들곤 합니다.
이 불안이 심해지는 경우를 가리켜 임포스터 신드롬, 혹은 가면 증후곤이라고 부른다고 하는 것 같습니다.

가면 증후군, 개인적으로 참 이름을 잘 지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자신의 본래 모습을 숨기고 다른 사람과 환경에 맞추어 자신을 가장하려는 느낌이 잘 표현되는 것 같아요.
하지만 한편으로는 가면이란게 쓰면 안되는 것 이라는 늬앙스가 느껴지기도 합니다.
일종의 속임수를 쓴다는 인상을 주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우리는 다들 사회적으로 가면 몇 개 씩은 달고 삽니다.
일상적인 사회 생활을 하면서 어느 정도의 '사회적 가면' 뒤에 숨어서 세상과 상호작용하는 건 꽤나 자연스러운 풍경이지요.
여러 사회적 상황에 맞추어 적절한 행동과 말투, 태도를 취하는 사회적 가면은 어찌보면 대인 관계가 직장 생활에서 필수적인 아이템이 아닌가 합니다.

심지어 인사고과와 같은 평가에도 사회적 가면은 영향을 끼치기 마련입니다.
실제 성취가 동일하다 하더라도 자신을 어떻게 표현하고 타인과 어떻게 상호작용 하느냐에 따라 더 좋은 평가를 받기도 합니다.
알게 모르게 우리는 공작새처럼 자신의 모습을 부풀리며 살아가는 모습을 체득하게 됩니다.

사실 이러한 사회적 가면의 설정을 통해 우리는 성장을 해나가고 있는 거라는 생각도 듭니다.
더 나은 버전의 자신의 상을 사회적 가면에 새기고 새로운 역할과 행동 양식을 시도해봅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캐릭터에 몰입하면서 자신과는 다른 역량이나 특성을 탐색하고 그것들을 자신의 일부로 만들어 나갑니다.

하지만 본래 자신과 너무 동떨어진 가면을 쓰는 것은 오히려 부정적인 결과를 가지고 오게 됩니다.
황새 따라가다 뱁새 다리 찢어지듯이 사회적 가면과의 큰 간극은 스트레스와 불안을 유발하고, 마침내는 앞서 이야기한 가면 증후군이 되어 버릴 수 있습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아무래도 자신에게 아예 없는 면을 새로이 만들어서 쓰는 것 보다는,
이미 가지고 있는 작은 덩어리를 가지고 대장장이가 쇠로 망치를 두들겨 펴듯이 넓게 펼쳐내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물론 너무 많이 두들기면 또 그것대로 곤란한 일일테니, 현재 상태와 목표 상태 사이에 있는 균형 지점을 찾아내야겠지요.
적절하게 도전적이기도 하면서, 또 적절하게 편안한 지점을 말입니다.

물론 가면을 얼굴에 두르는 것만으로 성장이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현재의 모습과 사회적 가면 사이의 간극을 인식하고, 이를 좁히려는 지속적인 노력이 자연히 뒤따라와야겠지요.
이러한 노력을 통해 단순한 역할 놀이에서 벗어나 성장 과정의 일부가 될 수 있도록 사회적 가면을 이루는 점과 선을 내면화하는 노력이 있어야 할 것 가습니다.

이런 생각들을 계속 하다보니 어린이들에게 읽어주는 위인전이나 교훈섞인 동화들도 사실은 이러한 사회적 가면의 방향성 설정에 도움이 되는 효과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우리가 몸담고 있는 사회적 관념 상에서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 무엇이 바람직한 인간상인지에 대한 영점을 잡아준다고나 할까요.


...

잡생각이 흘러 흘러 여기까지 왔습니다.
이런 생각들로 흘러들게 된 배경에는 회사에서 얼마전 공개된 인사고과 점수가 있습니다.
내가 설정하고 연기하고 있는 사회적 가면은 이 점수에 얼마나 영향을 주었을까, 이 점수가 정말 지난 1년 간의 성과를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쩌면 내 사회적 가면이 점수를 한 그레이드 정도 더 높여주지 않았나 싶은 불안 비슷한 것이 시작이었습니다.

사실 누군가의 성과를 명확하게 점수화하는 것이 새삼 어렵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래서 매니저 직을 해야하는 시점을 가능한 미뤄놓고 싶기도 한데, 연차는 지치지도 않고 매년 차곡차곡 쌓이니 이것도 참 부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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