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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5/10/25 09:32:40
Name   王天君
Subject   마리텔, AMA 게시판, 소통
소수 괴짜들의 전유물이었던 아프리카 방송은 이제 하나의 문화가 되었습니다. 방송의 송출자와 수신자가 실시간으로 교류한다는 이 방송국의 특징은 단지 방식의 차별화일 뿐 아니라 새로운 문화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를 가장 보편적으로 확대재생산하고 있는 것은 엠비시의 마이 리틀 텔레비젼, 줄여서 마리텔이라 불리는 프로그램입니다. 이 방송에서는 어쩔 수 없이 발생하는 시간과 공간, 유명인과 일반인의 방송권력, 생산자와 소비자의 경계가  흐려집니다. 우리가 이상적으로 여기는 쌍방향, 실시간 반응의 교환이 마침내 티비에서도 구현화되고 있다고 볼 수도 있겠지요.

엄격히 말하자면 마리텔이 표방하는 소통의 방식은 아직 불완전합니다. 그 제작과정에서 시청자는 브라운관 너머의 고객이 아니라 방송을 함께 만들고 호흡을 공유하는 프로슈머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방송의 송출과정에서 시청자는 여전히 결과물을 떠먹여주는 대로 삼킬 수 밖에 없는 전통적 공급 - 수요의 구도를 취하게 됩니다. 시청자들의 참여, 댓글들이 프로그램의 많은 지분을 차지하지만 브라운관으로 송출될 때는 철저하게 선별되고 ‘소통의 증거’로서 제작자에 의해 전시되지요. 이건 완제품을 팔아야하는 티비 매체의 한계이기도 합니다. 더 적극적인 반응과 수집이 있지만, 어찌보면 직접적 통제 아래 스튜디오 방청석에 모시는 대신, 더 거침없고 시끄러운 이들을 온라인에 앉혀놓은 방청객 효과의 변형에 불과할 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마리텔이 보여준 가능성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티비가 다른 매체와 융합하고, 가끔씩이지만 방송의 주도권이 방송인에게서 시청자(댓글작성자)들에게 넘어가기도 한다는 점에서 마리텔은 기존의 방송과 그 궤를 달리합니다. (마리텔의 출연자들은 자기 할 것만 하고 눈치만 보면 되지 않습니다. 단순히 웃기면 되는 대상이 아니라 방송을 보는 이들의 요구를 수용하고 어떤 식으로든 응답을 해야하는, 매우 바쁜 방송이죠) 어떤 매체 안에서 소통의 형식이 발전했다는 점을 볼 때, 저는 AMA 게시판에서 마리텔을 보는 듯한 인상을 받습니다. 익숙한 틀 안에 머물러 있지만 새롭다고 할 만한 차별점들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거지요.

전통적인 게시판은 연설의 형태를 띄게 됩니다. 화자와 청자의 구도 안에서 다소 선언적이고 일방적인 소통이 이루어지죠. 화자는 청자(독자)에게 공감과 이해를 요구하고 청자는 화자에게 반응을 보입니다. 이 소통의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글 자체, 컨텐츠입니다. 이를테면 저는 가끔 영화를 보고 그에 대한 글을 쓰지만 그 게시물을 읽는 사람에게 저라는 주체는 크게 다가오지 않습니다. 어떤 영화가 어땠는가, 이것이 화자인 저와 독자인 누군가의 주된 관심사죠. 우리가 게시판에서 하는 소통이란 결국 특정 컨텐츠라는 매개체가 필요합니다. 이 소통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우리는 인격체보다는 정보전달의 수단으로 자리잡습니다. 마치 강사와 학생, 상담원과 고객 처럼요. 이는 그 컨텐츠가 설령 화자 자신에 관한 것이라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소통의 형식은 변함없이 단방향일테고 청자가 반응하는 것은 컨텐츠로서의 화자이지 컨텐츠를 말하는 화자가 아닐 테니까요.

AMA 게시판은 이질적입니다. 거기에는 특별히 컨텐츠랄게 없습니다. 범위가 제한되지만 소통이 이루어지는 컨텐츠는 결국 화자 자신, 그 인격체에 귀속됩니다. 당신은 어떤 일을 하는가, 연애는 하는가, 얼마나 버는가, 어떤 과거를 보냈고 어떤 미래를 준비하는가. 이것은 화자와 청자가 합의한 선 안에서도 지극히 개인적이고, 한 인간을 향하는 속성을 가집니다. 그 결과 우리가 AMA 게시판에서 얻게 되는 결론은 누군가가 해석하고 전달하는 정보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보다 내밀하고, 인적 관계 형성의 재료에 가까운 것들이죠. 어찌보면 전문성, 글재주, 소재, 인지도 등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데 조금 더 준비가 필요한 일반 게시판들에 비해 훨씬 더 민주적이고 자유롭다고 볼 수 있습니다.

AMA 게시판은 소통의 형태 역시 다릅니다. 거기에는 화자가 존재하지만 발제자의 역할은 청자가 맡게 됩니다. 청자는 화두를 꺼내고, 화자는 이에 응답합니다. 이것은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듣고 싶어할지도 모르는 청자에게 아무 예고 없이 쏟아내는 “화자의 욕망”보다 더 진보한 형태를 띕니다. AMA 게시판은 반드시 대화의 형태를 띌 수 밖에 없습니다. (주체) - 컨텐츠 - 주체의 관계가 주체(컨텐츠) - 주체의 관계로 보다 직접적인 소통의 형식을 갖추게 됩니다.  그리고 이 소통은 대부분 일 대 일로 이루어집니다. 일 대 다의 형식을 띄고, 설득과 이해를 목적으로 하는 컨텐츠가 개개인의 의견을 다수의 의견으로 흡수하는 데 반해 AMA 게시판은 청자들이 파편화되어 제각기 존재합니다.

화자이자 청자로 존재하며, 시시하지만 삶의 진짜 흔적들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AMA 게시판은 독특합니다. 누군가의 일방적인 외침이 거기에 동조, 부정을 이끌어내고 그 게시물 속으로 개개인의 생각을 보태거나 전이시키는 형식으로 기존의 게시물들은 작용했습니다. 그러나 AMA 게시판은 개개인이 작은 편린을 제시하고 그것들이 그 자체로 존재하는 동시에 거대한 합을 이루며 종국에 완성하는 것은 아이디어가 아닌 누군가의 인격체입니다. 정보가 오가는 양상도, 오가는 정보의 질도 모두 다른 이 게시판은 커뮤니티 안에서 아이디, 글, 댓글로밖에 존재할 수 없는 존재와 소통의 한계에 대한 어떤 대안이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누가 누군들 무슨 대수겠으며 잠깐 반짝하고 사그라들 확률도 작지 않습니다만, 이미지 대신 텍스트로 존재하는 전뇌공간에서 서로가 서로의 아바타를 구축하려한다는 점만으로도 충분히 흥미롭지 않은가요? 인간은 참으로 사회적이면서 개인적인 존재로군요. 틈만 나면 나를 알아주길 바라고, 남을 알려하는 속성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이 공간은 이성의 증거일까요, 본능의 흔적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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