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22/05/07 14:38:34
Name   르혼
Subject   용어의 재발견: 기갑, 장갑, 개갑
발단은 기계 번역을 그대로 갖다 쓴 외국 게임.
여기서 armor를 '기갑'이라고 번역한 데 있었죠.

사실 기갑은 기계화된 장갑 전투 장비, 즉 장갑차나 탱크, 또는 (미래의 물건이지만) 강화복 같은 것을 일컫는 말입니다. 그냥 armor가 아니라 mechanized armor, 또는 mobilized armor라는 뜻이죠.
이것을 그냥 방어용 부품 armor의 번역어로 채택했으므로 많이 거슬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한국어 번역을 해주겠다고 자원하고, 직접 번역을 하면서 어떤 말이 가장 어울릴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Armor를 번역하는 가장 흔한 말은 장갑 (裝甲)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손에 끼는 장갑과 헷갈리는 문제가 있습니다.
실제로 예전에 개발했던 로봇 게임에서, 기획서에 그냥 '장갑'이라고만 써 놨더니 아티스트가 벙어리 장갑을 그려온 적이 있을 정도죠. ('그리면서 이상하다고 생각 안 했어요?' '이상하긴 했는데 로봇도 손은 있으니까...')

거기다 장갑은 일본에서 armor를 번역하며 엉터리로 만든 말이라 개인적으로 마음에 안 드는 말입니다.
뜻 풀이를 해 보면 ‘갑옷을 걸치다’라는 동사여서, 명사인 armor에 대한 올바른 번역이라고 할 수 없거든요. 일본인들은 한자의 하나하나의 뜻은 잘 알지만 사용법(중국어 문법)은 잘 몰라서, 2글자 이상을 붙여 놓으면 말이 안 되는 단어를 만들어 쓰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서양 문물을 들여오던 개화기 때 이렇게 만들어낸 한자어가 많고, '장갑'도 그 가운데 하나죠.

그래서, 한자 종주국인 중국에서는 어떻게 쓰는지 알고 싶어 구글 번역기로 Armor를 중국어로 번역해 봤습니다. 회갑(盔甲), 갑(甲), 개(鎧), 철갑(鐵甲) 같은 여러 단어들이 나오지만 역시나 일본식 한자어 裝甲은 없네요.

한편 우리나라 고대 역사서에는 주로 개(鎧)라는 말을 쓰고 갑(甲)도 많이 쓰입니다. 하지만 한 음절 단어는 동음이의어가 많아서 쓰기 좀 그렇죠. 특히 '개'는... 패판(棑板)이라는 말도 있는데, 이것은 아이템 종류 말고 방어력이라는 스탯으로도 쓰이는 게임 속 용도와 맞지 않는 단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둘을 붙인 개갑(鎧甲)이라는 말을 쓰기로 했습니다. 거의 안 쓰이기는 하지만 엄연히 사전에도 등재되어 있는 단어고, '장갑'처럼 다른 단어와 헷갈릴 일도 적으니까요. 농사 용어로 개갑 (開匣)이 있긴 한데 어차피 그쪽 분야에서만 쓰이는 전문 용어인데다, 군사 용어 개갑보다도 사용량이 적을 정도.

그렇게 번역해서 게임사에 넘긴 지 2년이 지난 결과, 지금은 완전히 정착해서 이 게임을 하는 모든 한국인들이 '개갑'이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고 나니까 이 번역어가 좀 더 널리 퍼져나가서, 일본식 한자어 '장갑'을 완전히 대체했으면 좋겠다는 소박한 욕망이 생기네요.



5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7944 영화영화 인랑을 보고 5 저퀴 18/07/26 4427 1
    756 일상/생각아이고 의미없다....(2) 2 바코드 15/08/09 4428 0
    2188 일상/생각담배 <2> 3 이젠늙었어 16/02/08 4428 0
    2735 음악아직도 유효한 한 가수의 고백 - 금관의 예수 4 Terminus Vagus 16/05/02 4428 3
    6927 음악[번외] Kenny Burrell And Grant Green - Genius of Jazz Guitar Erzenico 18/01/11 4428 4
    4057 일상/생각실시간으로 의견받지 말입니다(...) "3g폰 들고 다니면 그리 보기 싫어요?" 46 진준 16/11/02 4429 0
    4301 스포츠[MLB] 카를로스 벨트란 휴스턴과 1년 1,600만 달러 계약합의 2 김치찌개 16/12/05 4429 0
    7834 음악고전명곡)Say yes-활(김명기) 놀보 18/07/12 4429 0
    4684 스포츠[오피셜]황재균, '총액 310만 달러' SF행...AGAIN '자이언츠맨' 4 김치찌개 17/01/24 4430 1
    11360 여행코로나다 보니까 여행가고싶네요 ㅠㅠ 22 물티슈 21/01/21 4430 1
    12787 일상/생각용어의 재발견: 기갑, 장갑, 개갑 9 르혼 22/05/07 4430 5
    13806 기타보드게임 할인 소식 53 토비 23/05/01 4430 2
    3859 일상/생각울적한 밤, 커피 마시면서, 티타임 게시판에 끄적끄적 19 진준 16/10/10 4431 0
    5367 도서/문학나를 거부했던 세상이지만 너를 위해 용서한거야 2 알료사 17/04/04 4431 1
    5741 게임락스팬의 어제자 롤챔스 경기 감상 2 하나마루 17/06/04 4431 0
    9751 음악[팝송] 리암 갤러거 새 앨범 "Why Me? Why Not." 2 김치찌개 19/10/02 4431 0
    12067 오프모임[조기종료] 머리 아픈 음(mm)벙 하나 개최해보고자 합니다. 11 거위너구리 21/09/11 4431 0
    13048 IT/컴퓨터아이패드 액정보호용 강화유리를 갈아봅시다~~ 20 whenyouinRome... 22/08/04 4431 6
    13131 음악르 샤를리에의 법칙 6 바나나코우 22/09/03 4431 6
    3008 일상/생각결혼과 사람과 나 7 레이드 16/06/12 4432 0
    13613 경제사교육 군비경쟁은 분명 출산율을 낮춘다. 그런데... 10 카르스 23/03/02 4432 11
    4083 일상/생각(사진 포함)롤드컵 이벤트 경품 수령 후기 3 hunnyes 16/11/04 4433 2
    892 음악Yann Tiersen - Esther 5 새의선물 15/09/02 4434 0
    3631 일상/생각운행보조기구 경험담#2 (성인용 킥보드, 전기자전거 etc) 3 기쁨평안 16/09/02 4434 1
    4510 방송/연예소사이어티 게임이 끝났습니다. 4 Leeka 17/01/01 4434 0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