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21/07/10 14:54:50
Name   사이시옷
Subject   보증기간 만료
제가 가지고 있는 물건들은 대부분 보증기간이 끝난 물건들입니다. 한 마디로 고장나면 수리비로 피박을 쓰게 되는 제품들이지요. 보증 기간이 지난 것 중 제 몸뚱아리도 있읍니다. 흙흙.

몸의 보증기간이 물건의 그것과 퍽 다른 점이 있다면 기간이 명시되어 있지 않다는 데에 있습니다. 30대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보증따위 생각하지 않았어요. 밤을 꼬박 새고 술을 먹어도 멀쩡. 운동하다 여기저기 부러져도 몇 달 지나면 멀쩡. 며칠 피곤해도 하룻밤 푹 자고나면 에너지 빵빵. 삶에서 가장 건강한 시기가 있긴 하잖아요. 문제는 그 다음이지. 어느날 몸이 무너집니다. 그리고 여느날처럼 회복될거라 믿어요.

부정, 분노, 타협, 우울, 수용. 죽음의 다섯가지 수용 단계래요. 죽음이란 단어는 '삶이 다하다'라는 사전적인 의미도 있지만 단절이라는 맥락에서는 이미 떠난 보증 기간도 죽음과 비슷한 것 같아요. 저는 병에 걸린 후 차근차근 저 다섯 단계를 밟았어요. 하지만 컨디션이 좋아지면 위의 다섯 단계를 비참하게 지난 제 자신을 까맣게 잊죠. 그리고 다시 병원에 기어올때가 되면 분노와 우울 단계 사이에서 다시 시작해요. 제주도에 앉아 이너 피쓰를 외치며 마음 챙김 메디테이션을 했던 것도 모두 소용이 없는 것이야요.

지난주 목요일 빨피인 상태로 섬에서 대륙으로 넘어와 몸을 질질 끌며 입원했어요. 물약을 빵빵하게 넣고 푹 쉬고 있으니 이제야 살만합니다. 누워만 있을 수는 없어 돌아다니다 각 병실 사람들의 이름이 적힌 명패를 물끄러미 봤어요. 대부분 60대분들 이더라고요. 저같이 운 나쁜 30대도 있지만 더 안타까운 20대분들도 종종 보이고. 보증기간이 끝난 몸을 쓰다보면 병원에 와서 대수선을 해야할 때가 오는거죠.

곰곰이 생각해보니 신체의 보증 기간은 평균적으론 50대쯤이 아닐까 해요. 물론 사람마다 다르겠지요. 지능, 운동신경, 집안환경처럼 그냥 랜덤으로 주어진 스탯이라는 결론을 내려봅니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 한 켠에 있는 병에 대한 우울함이 한걸음 뒤로 물러나는 기분입니다. 아주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면 수용해야죠.

어쨌든 이번에 3개월 정도 휴직을 하게 되었습니다. 16년도 컨디션 회복후 5년이나 잘 버텨왔으니 제 몸에 대한 책망보다는 칭찬을 해주고 싶어요. 직장도 다시 생겼고 득남했고 학위도 새로 얻게 되었으니까요. 그러니 이번 기회에 보증 기간이 끝난 몸을 잘 돌봐야겠어요. 기름도 치고 나사도 조이고. 보증이 좀 빨리 끝나긴 했지만 아직은 그럭저럭 쓸만하니까요.

오랜만에 글을 올리는건데 저에 대한 위로나 공감을 바라고 쓰는 글은 아니에요. 그냥 그런 것들, 내가 어쩔수 없는 것들로 자신의 가슴을 찌르는 일이 없으시길 바라는 마음 뿐입니다. 우리 자신의 잘못이 아니에요. 그런건 그냥 받아들이고 내 앞에 있는 고양이 머리를 쓰다듬으며 사랑을 주는거죠.


바꿀 수 없는 것을 평온하게 받아들이는 은혜와 바꿔야 할 것을 바꿀 수 있는 용기, 그리고 이 둘을 분별하는 지혜를 허락하소서. -라인홀트 니버



17
  • 여긴 멋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 어르신 힘내십시오 ㅠㅠ
  • 선생님, 항상 응원합니다.
  • 그저 추천 드릴 뿐이요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12392 일상/생각중년 아저씨의 베이킹 도전기 (2021년 결산) (스압주의) 22 쉬군 21/12/31 5278 29
12386 일상/생각배달비 인상에 대해서 어떻게들 생각하세요? 45 탈론 21/12/27 7326 0
12385 일상/생각저희 아이가 다른 아이를 다치게 했다고 합니다. 9 엄마손파이 21/12/27 6014 2
12379 일상/생각코로나19 무서워요... 흑; 22 *alchemist* 21/12/24 6007 26
12376 일상/생각구박이는 2021년에 무엇을 어떻게 먹었나 61 구박이 21/12/23 7252 70
12366 일상/생각국내 헤드헌터/서치펌에 대한 실망과 아쉬움 26 SCV 21/12/21 8880 14
12359 일상/생각요리 초보의 단상 21 2막4장 21/12/19 5107 15
12352 일상/생각뜻하지 않게 다가온 자가검열시대 6 sisyphus 21/12/15 5708 1
12348 일상/생각도어락을 고친 것은 화성학과 치과보철학이었다 2 Merrlen 21/12/15 5722 1
12347 일상/생각헌혈하는 것의 의미 9 샨르우르파 21/12/14 5064 23
12340 일상/생각호의에 대한 보답 (feat 고얌미) 12 천하대장군 21/12/10 6067 29
12335 일상/생각직장인무상 6 2막4장 21/12/09 5513 4
12334 일상/생각개콘은 정말 심의 때문에 망한건지 궁금하네요 14 Picard 21/12/09 5572 2
12333 일상/생각벨기에 맥주 오프모임에 참석하지 못해서 하는 벨기에 맥주 셀프시음회(어?) 10 세리엔즈 21/12/08 5340 22
12331 일상/생각회사에 확진자가 나왔습니다. 10 Picard 21/12/07 5931 2
12324 일상/생각홍차넷을 떠나며 29 플레드 21/12/04 7218 1
12323 일상/생각서울대병원 응급실에 대한 단상 6 경계인 21/12/03 5722 13
12313 일상/생각중국에서 박사졸업대장정 [나는 팔린것인가..?] 15 천하대장군 21/11/30 5548 5
12310 일상/생각둘째를 낳았습니다. 14 고양이카페 21/11/29 5217 27
12306 일상/생각동물복지에 대한 생각 4 천하대장군 21/11/27 9168 10
12301 일상/생각중국에서 박사졸업대장정 [출국 & 학교 가는 길] 12 천하대장군 21/11/24 5580 16
12296 댓글잠금 일상/생각종부세를 맞았네요 33 엄마손파이 21/11/22 6873 5
12292 일상/생각잠 하루에 8시간 자는 이유에 대한 나의 생각 8 초록매실 21/11/21 5742 5
12287 일상/생각한 달여의 한국 방문에서 느낀 아쉬운 면들 11 Alynna 21/11/19 6775 6
12282 일상/생각기면증 환자로 살아남기 - 1 4 BriskDay 21/11/18 5580 19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