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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5/10/06 02:26:13
Name   눈시
Subject   사도 - 우리 세자가 달라졌어요


영화 사도에 대한 직접적인 스포는 안 하겠습니다만 어느 정도 섞일 수밖에 없겠네요. 아니 애초에 글 내용 전체가 스포일러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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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종(효현숙) 의 혈맥이 장차 끊어지려 하다가 비로소 이어지게 되었으니, 지금 다행히 돌아가서 열성조에 배알할 면목이 서게 되었다. 즐겁고 기뻐하는 마음이 지극하니, 그 감회 또한 깊다" (영조 11년 1월 21일)
"임금이 원자를 품에 안고 있었는데, 원자가 충실하고 커서 보통 아이들과 달랐으므로 여러 신하들이 기뻐하고 즐거워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11년 4월 12일)

왕의 나이 마흔 둘, 드디어 뒤를 이을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첫째 효장세자가 죽은 지 칠년 후였죠. 얼마나 기다리던 아들이겠습니까. 태어나자마자 원자로 책봉됐고, 1년만에 세자가 됩니다. (이전에 숙종이 경종을 백일만에 원자로 세우려다 반대하는 송시열까지 죽인 걸 생각해봅시다)

어릴 때부터 세자는 영특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네달만에 기고 여섯 달에 영조의 말에 대답하고 두 살에는 한자 육십여자를 쓰는 등의 모습 말이죠. 과자를 먹을 때도 팔괘가 그려진 것은 우주의 근본이라 먹지 않았다 하고 비단과 무명이 사치한지 아닌지를 구분했다 합니다. 영조가 부채에 손을 다쳤다 하니까 부채를 멀리하는 효심도 보여줬죠.

영조는 세살박이 세자를 대신들 앞에 데리고 나와서 글씨를 쓰게 합니다. 대신들이 앞다투어 가지기를 청했고, 세자에게 고르라 해서 나이 많은 이에게 주자 세자도 대신을 알아본다며 또 좋아합니다. 이렇게 글씨를 쓰게 하고 대신들에게 자랑하며 나눠준 게 여러 번 있나 봅니다.

세자의 천재성을 말 하는 에피소드입니다만, 여기서 이미 한 가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도 어린 나이에 세자를 자랑하면서 대신들 앞에 데리고 다녔다는 것잉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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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경궁은 한중록에서 세자가 미쳐가는 이유를 여러가지 들고 있습니다. 어릴 때를 보면 너무 빨리 세자 책봉을 해서 어머니의 곁을 떠나게 했고, (영빈 이씨는 후궁이죠. 세자가 됐으니 법적으로는 정성왕후가 세자의 어머니가 됩니다) 하필 궁인을 전에 쫓아낸 경종의 궁인으로 채웠다는 것이죠. 그들이 영빈 이씨를 무시하고 영조의 맘에도 안 들어 부모에게서 떨어뜨렸고, 어릴 때부터 노는 것만 가르쳤다는 것이죠. 확실히 험담을 하는 등 애 교육에는 영 아니었던 모양으로 이런저런 악평으로 세자 일곱살 쯤에는 쫓겨납니다. 어머니에게서 너무 빨리 떨어지고, 키워주던 사람들은 나무칼 등으로 병정놀이를 자주 해 줬다 하는데... 확실히 이 정도면 영향을 어느 정도 끼치긴 했을 겁니다. 하지만 이게 결정적이라 할 순 없죠. 혜경궁 역시 그렇게 주장하진 않습니다.

+) 여기서 이 궁인들이 친소론이라 세자를 친소론으로 세뇌시켰고 세자가 노론을 적대하자~~~ 이렇게 흘러가는 것이 이덕일이 주장하는 노론 음모론입니다. 그리고 하필 세자가 있던 곳의 소주방(음식 만드는 곳)이 장희빈이 인현왕후를 저주했다는 취선당... 미신이지만 지금 보는 입장에도 충분히 불길한 선택이긴 했죠.

결정적인 건 영조와 세자, 둘의 성격 차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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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 두 분이 성품이 다르셔서, 영조께서는 꼼꼼히 살피시며 재빠른 성품이시고, 경모궁(세자)께서는 덕성은 거룩하시나 과묵하시고 행동이 날래지 못하시니라." - 한중록

안과 밖이 달랐던 왕들은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성종은 낮에는 요순(성군의 대명사죠), 밤에는 걸주(폭군의 대명사죠)라 불렸고, 중종도 과음하고 궁인들을 함부로 대했다 합니다. 유교의 이상적인 군주를 원했던 조선시대, 왕들의 스케쥴은 너무 빡빡했죠. 이런 압박과 신하들에게 받는 스트레스를 궁인들에게 푼 것이죠.

영조는 정말 초인적인 노력으로 탕평을 했습니다. 하지만 안으로는 전혀 아니었죠. 왕이 되기까지 너무도 험난했던 시절과 이인좌의 난 등의 스트레스 때문이기도 했을 겁니다. 그리고 탕평을 위한 노력과 편집증 같은 모습들이 전혀 동떨어진 것도 아닐 거구요. 완벽주의자였기에 밖으로는 그만큼 탕평을 시도했지만, 안으로는 정말 무서운 모습을 보여 준 거겠죠.

죽을 사, 돌아갈 귀 자는 쓰지 않고, 일을 본 후에는 옷을 갈아입고, 안 좋은 말을 들으면 귀와 입을 씻고 다른 사람에게 한 마디라도 건네서 불길한 걸 씻어낸 다음에야 안으로 들어왔죠. 좋은 일 나쁜 일에 출입하는 문이 달랐고, 사랑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에 대한 구분이 너무도 심해서 둘이 함께 있는 것도 싫어했습니다.

이런 게 세자에게 고스란히 갔습니다.

영조의 불우했던 환경, 왕이 된 후에도 계속된 열등감, 너무도 늦게 본 세자... 이 모든 걸 세자를 완벽한 세자로 만들려는 노력으로 이어졌습니다. 어릴 때부터 대신들 앞에 불러서 공부를 확인하고, 세자가 공부할 책을 직접 쓰면서 말이죠. 그렇게 완벽한 왕을 만들려는 집착은 세자에게 너무도 큰 짐이 되었습니다.

반면 세자는 공부를 너무 싫어했습니다. 아주 어릴 때야 좀 하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겠지만, 공부가 어려워질수록 그런 영재의 모습은 사라질 수밖에 없죠. 공부를 이렇게도 멀리한 세자는 조선 역사상 없습니다. 그 연산군도 딱히 큰 문제는 없었죠. 하지만 이것도 모릅니다. 아버지가 평범한 왕이었다면, 세자가 공부 싫어한 것도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았을지도요. 영조의 집착은 심해도 너무 심했거든요.

"공부에 대한 것이라도 정무회의 때나 제신들 많이 모인 때에 굳이 세자를 부르시어 글뜻을 물어보시는데, 어려서 자세히 대답하지 못할 마디를 추궁하여 물으시니라. 경모궁께서는 본디 부왕(父王) 앞에서는 분명히 아는 것도 주뼛주뼛하시는데, 여럿이 모인 데서 잘 대답할 수 없는 부분까지 캐 물어보시니, 더욱 두렵고 겁이 나서 답을 잘 못하시니라."

세 살부터 나와서 글씨를 쓰게 했습니다. 커 갈수록 난이도는 더욱 올라가겠죠. 세자가 서연(신하들과 유학 공부)을 열기 시작한 일곱 살, 성균관에 입학한 여덟 살부터 둘의 갈등은 본격적으로 드러납니다.


우리 근영이 혜경궁은 여덞 살에 세자빈이 되었는데, 이 때 세자가 공부하러 갈 때 늑장을 부리는 걸 봅니다. 세수를 너무 늦게 해서 아침공부에 스승들이 계속 보챈 후에야 갔는데, 어디 아픈가 생각했다 하죠. 이 정도로 세자는 공부를 싫어했고, 영조의 기대를 전혀 따라가지 못 했습니다. 그의 나이 아홉살부터 눈병을 호소했고, 세자의 스승들은 세자에게 휴식을 줄 것을 청합니다. 하지만 영조는 '세자가 책만 보면 어지럽다 하니 치료는 필요없다'면서 꾀병으로 취급합니다. 진짜 꾀병일지 모를 세자의 병치레는 이미 시작된 것이죠.

열 살 때는 영조가 글을 읽는 것이 좋은지 싫은지 묻는데, 머뭇거리다가 싫을 때가 많다고 대답합니다. 영조는 솔직하게 말하니 좋다고 말은 했습니다만... 3년 후에는 자치통감을 읽게 했는데 갈수록 소리가 작아지자 '12시진(24시간) 중 책 읽기 좋아하는 마음이 얼마나 되냐 하니 '1~2시진(2~4시간)' 정도라 답 합니다. 그의 스승이 12시진을 미처 생각지 못 했다고 실드를 쳤지만, '나는 알고 한 말이다고 했죠. 이를 보면 세자도 공부를 못 하면 영조가 원하는 대답이라도 해 줘야지 하는 마음이 듭니다. 하지만 그럴 성격이 아니었나 봐요. 이 때도 영조는 솔직히 말하니 됐다고 합니다만...

그나마 실록에 있는 건 대신들이 보고 있을 때로 자기들끼리 있을 때는 구박을 그리도 한 모양입니다. 기대는 실망으로, 실망은 혐오로 변해갑니다. 세자는 그럴수록 더 숨어 들어가게 됐죠. 덩치도 크고 말도 씩씩했던 세자가 영조 앞에만 서면 한없이 작아지고 목소리는 기어들어가게 됩니다. 그럴수록 영조의 분노는 더 커졌고, 세자도 더 기가 죽었죠. 이를 막아 줄 사람도 없었습니다. 영조의 사랑을 받았던 화평옹주가  열세 살 때 죽었고, 그나마 영조가 세자한테 뭐라 할 때 세자 실드 치던 사람이 사라집니다. 영조의 꾸중은 이후 더 심해졌다 하죠. 세자도 잘 한 게 없는 게 영조가 화평옹주의 죽음으로 슬퍼서 자신에게 관심 없는 사이 활쏘기, 칼 쓰기, 그림 등을 즐겼다 합니다.

+) 영조에게도 세자에게도 정말 잘 해 준 인원왕후, 하지만 그녀도 정말 궁중 법도에 까다로운 여인이었고 왕의 자식 교육을 막을 순 없었을 겁니다. 세자를 위로해 주는 정도였죠. 왕비인 정성왕후야 영조가 미워하는 대표적인 사람이었으니... 그 외에 세자 가족 중 화완옹주는 세자와도 친했고 세자를 위해 영조에게 여러 가지를 얻어내 주지만 영조의 분노를 막을 정도는 못 됐습니다. 화협옹주는 세자처럼 영조가 미워했고, 영조가 귀 씻은 물을 세자나 화협옹주 쪽으로 흘려보내서 세자랑 '우리는 아빠 귀 씻는 물이다'고 같이 자조했습니다.

세자가 기대에 못 미칠수록 영조는 세자를 더 싫어하게 됩니다. 그만큼 세자는 더 엇나갔구요. 영조 앞에서 기 죽고, 돌아가서는 게임만 즐깁니다. 영조는 이것도 알아채서 세자의 장난감을 들고 오게 한 후 많은 사람들 앞에서 망신 줬구요. 세자는 더욱 게임과 그림에 빠졌죠. 그래도 영조는 세자에 대한 기대를 저버릴 수 없었습니다. 유일한 자식이니까요. 그럴수록 더 강하게 꾸짖게 되고, 더 공부하게 하고 그걸 확인합니다. 그 결과를 보고 더 싫어하게 됐구요.

세자 나이 열넷, 이런 건 이제 실록에서도 보입니다. 세자가 대답을 잘 한 상황에서 영조는 한나라 문제와 무제 중 누가 더 좋냐는 질문을 했고 세자는 모범답안인 문제를 고릅니다. 어이없게 영조의 분노가 이 때 폭발합니다. 니 활달한 성격에 문제가 좋을 리가 없다는 것이죠. 세자는 어떻게든 모범답안을 말 하지만 영조는 니 성격이 너무 강한 게 문제라면서 고치라고 욕 합니다. 신하들의 실드도 무시하고 말이죠. 이게 두 번이나 있었습니다. 세자가 듣기 싫은 답을 말 하면 당연히 욕 하고, 모범답안을 말 하면 거짓말 한다고 욕한 것이죠.

이런 가운데서 세자가 열 다섯 되던 해, 영조는 대리청정을 시도했죠. 비극으로 가는 길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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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는 이전에도 선위를 주장한 적이 있었습니다. 탕평을 거부하는 신하들을 다스리기 위해서 말이죠. 하지만 이 때의 선위 파동은 좀 달랐습니다. 신하들은 물론 대비도 계속 선위를 반대했고, 세자도 거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대리청정 얘기를 꺼냈죠. 신하들은 이것도 반대했지만 영조가 계속 밀어붙이자 받아들입니다.

"어린 세자로 하여금 아득히 국사를 모르는 상태에 두었다가 뒷날 만약 노론과 소론에 의해 그릇된다면 내가 비록 알더라도 어찌 일어나 와서 깨우쳐 줄 수 있겠는가? 오늘 이 거조는 뒷날에 반드시 효험이 없지 않을 것이다."

이걸 두 가지로 해석합니다. 첫째는 위의 저 말이죠. 세자 나이 열다섯, 영조 나이 쉰일곱이었습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렇게 기대하는 세자에게 정치 교육을 제대로 시킬만 했습니다.

둘째는 대리청정 자체가 가지는 의미입니다. 영조의 컴플렉스의 시작은 건저와 대리였습니다. 노론이 경종에게 세제의 대리청정을 요구한 것이 곧 역모였고, 그건 자신에게 연결되었죠. 그런 상황에서 이제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한다면? 역모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이죠. 그 때의 대리 요구가 역이 아니었다는 것, 대리가 별 게 아니라는 것을 대외적으로 알리는 것이었죠. 이 두 가지 목적이 모두 있었을 겁니다. 아예 틀린 것도 아니었구요. 세자 욕을 참 많이 하긴 했지만, 분명 세자를 가르치려는 목적은 있었거든요. 열 살 이전에도 세자를 정사에 참가시키려는 시도를 했었고, 대리 과정에서도 가르쳐주긴 참 많이 가르쳐 줬거든요.

문제는 영조 자신이 정말 세자에게 권력을 넘겨주려 했던 게 아니었다는 것이죠. 언제나 황형의 은혜를 얘기하고 세자에게 선위를 얘기하며 왕위에 욕심 없는 것처럼 행동했지만, 그는 자신의 권력을 조금이라도 내려놓을 생각이 없었습니다. 특히 저 미운 세자에게는 말이죠.

"모든 일이 대리 청정 후에 난 탈이니 어찌 서럽고 서럽지 않으리오" - 한중록

+) 숙종의 정유독대에 이은 대리청정, 경종 때의 세제 대리 문제, 사도세자의 대리에 이어 세손(정조)의 대리까지 이런저런 문제가 터집니다. 특히 정조는 자신의 대리를 반대한 홍인한과 정후겸을 숙청하면서 순조가 효명세자에게 대리청정을 시도하자 신하들은 무조건 찬성을 외쳤죠. 대리에 대한 인식이 갈수록 바뀌어 갔네요.

이젠 제법 유명한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세자가 처음으로 정사를 보는 날로 말이죠. 영조는 신하들에게 모든 건 세자에게 말하라 하고 자기는 앉아서 지켜보겠다고 말 합니다. 세자에게도 조언을 해 주면서 말이죠. 이 때 나온 게 함경도의 성진에 있는 병력을 길주로 옮기자는 거였습니다. 세자는 길주로 옮겨도 성진을 방어할 병력이 남아있는지를 물었고, 그렇다 하자 옮기는 걸 결정하려 합니다. 이 때 영조가 이렇게 말하죠.

"네 말이 비록 옳기는 하다만 당초 방영을 성진으로 옮긴 것은 이미 나에게서 나온 것인데, 길주로 다시 옮기는 것은 경솔하지 않느냐? 의당 먼저 대신에게 물어 보고, 또 나에게도 물어본 뒤에 시행하는 것이 옳다.”

다시 말하자면, 영조는 맨 처음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늘은 곧 원량이 시좌하여 처음으로 정사를 여는 날이다. 품달하여 결정할 일이 있으면 원량에게 품달하라. 나는 앉아서 지켜보고자 한다"

세자가 결정을 잘못한 게 아니라, 자기에게 물어보고 하지 않은 게 문제라 했구요. 대리 첫 날부터 말이죠. 이런 식이었습니다.

그 다음에 왕은 어떡해야 하며 어떡해야 하는데 너는 너무 성급하게 결정했다. 이런 식으로 하면 나랏일 못 한다. 사백년 조선의 운명이 너에게 달렸다. 니가 잘 해야 한다는 식으로 말 합니다. 네, 틀린 말은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하면 어느 세자라고 제대로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세자가 혼자 결정하면 그 중요한 걸 왜 자기에게 먼저 물어보지 않았냐고 화를 냅니다. 그렇다고 물어보면 왜 이런 사소한 것도 물어보냐며 대리한 보람이 없다 합니다. 도저히 종잡을 수 없는 아버지의 반응에 아들은 갈수록 기가 죽어갑니다. 신하들이 무엇을 말 하든 그저 대조(영조)께 물어보겠다는 말밖에 못 하게 됐죠. 이래놓고도 천재지변이 일어났다 하면 소조(세자)의 덕이 없어서 그렇다고 한탄합니다.

이 상황에서 세자가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요? 오죽하면 신하들도 이를 반대하고 나섭니다.

"동궁 저하께서 어린 나이에 대리하여 수응이 다 합당하고 정령의 사이에 또한 일찍이 성상의 뜻을 우러러 몸받지 않음이 없으니 신은 일찍이 찬탄하였는데, 전하께서는 매양 지나치게 책망을 하십니다" - 김재로

"너는 내가 진짜 믿고 의지하는데 이런 시기에 나를 곤란하게 하는 거냐? 애석하다." - 영조

아예 그런 말도 듣기 싫은 모양이군요.

+) 이 중에 노론이 소론에게 벌을 주라 계속 청했고, 세자가 이를 거부한 것 때문에 세자가 친소론이라고 음모론을 폅니다. 하지만 영조는 탕평을 고수하며 소론을 계속 보호했고, 이 때 세자는 그저 영조가 안 된다 했으니 소론을 벌할 수 없다 했습니다. 친소론? 세자는 무슨 자기 주장을 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게 균역법이든, 노론이 가진 군권이든 말이죠.

영조의 마음은 다르지 않았을 겁니다. 세자가 정말 싫었고, 그래도 뒤를 이을 아들이니 계속 가르칠 수밖에요. 싫으니 욕은 계속 하게 됐고, 그래도 잘했다 잘했다는 해 주고, 하지만 싫은 것은 더 크게 보이구요.
세자도 마찬가지였죠. 어떻게든 아버지 마음에 들고 싶지만 한계가 너무 컸습니다. 도저히 종잡을 수 없는 반응은 그를 더욱 현실에서 도피하게 만들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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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2년, 영조 28년, 세자 18세 되던 해 12월 8일, 영조는 또 다시 선위하겠다고 했습니다.

"이 문에 앉은 이유는, 희정당은 정사당이므로 왕세자에게 대리 청정케 한 뒤로는 다시는 앉고 싶지 않아서이다. 송현궁에 거둥한 것은 나의 큰 뜻이었는데, 자전의 분부로 인하여 이루지 못하였다"
"이 옷을 벗은 뒤라야만 이 마음이 드러날 것이다. 태조와 세종대왕께서도 이미 행하셨다"
"이 어제는 내가 연잉군으로 있을 때에 (경종이) 주신 것이다. 내가 그냥 연잉군으로 있었다면 어찌 이런 아픔이 있겠는가? 이 옷을 벗지 않는다면 무슨 얼굴로 지하에 돌아가 형님을 뵐 수 있겠는가?"

"대리 청정하는 것이 하나의 기휘(욕 먹을) 거리가 되었다. 노론은 일찍이 이 때문에 화를 받았기 때문에 겁을 먹어 뜻을 받들지 않고 있으며, 소론은 일찍이 대리 청정하는 것을 죄로 삼았기 때문에 이것을 의리로 삼으려고 뜻을 받들지 않고 있는데, 신하들의 노론이니 소론이니 하는 것이 나에게 무슨 관계가 있기에 하나는 무함이라고 하고 하나는 무함이 아니라고 하니, 내가 어떻게 견디어 낼 수 있겠는가?"

그러면서 세자를 욕 되게 하더라도 조상께 죄를 지을 수 없다느니, 세자에게 효성이 있다면 지금 내 명을 들어야 된다느니라는 말을 했죠. 진눈깨비가 쏟아지던 날이었습니다. 늙은 영조는 땅바닥에 엎드려 통곡하고 있었죠. 다들 만류하지만 영조는 요지부동이었습니다. 세자 역시 땅바닥에 엎드려야 했구요. 세자가 홍역 때문에 친했던 화협옹주도 잃고, 그 자신도 홍역에 걸렸다가 겨우 나았을 무렵이었습니다. 병을 겨우 이긴 세자를 겨울에 이렇게 했으니... 몸과 마음 모두 엄청난 스트레스였겠죠. 결국 인원왕후가 계속 말려서 진정됩니다.

+) 이것의 표면적인 이유는 노론이 소론을 탄핵한 것입니다. 그 외에 영화 사도에도 나온 (물 그릇 받던) 후궁 문씨가 영빈 이씨에게 막말하는 등 깽판을 치자 인원왕후가 회초리를 친 사건 직후라서 이것과 관계있는 게 아니냐는 거죠. 혜경궁은 그녀가 딸을 아들로 바꿀 정도로 권력에 욕심을 부렸고, 결국 정조 때 이런 죄로 죽습니다. 만약 이게 맞다면 세자는 자기 자리를 노리는 후궁 때문에 고통을 받았다는 겁니다.
하지만, 전 이것보단 소론 탄핵 때는 세자가 홍역에 걸릴 때였으니 다 나은 다음을 노린 거라고 생각하구요. 선위는 당연히 쇼고, 쇼 하다가 세자가 죽으면 안 되니까요.

이 상황은 일주일간 계속됩니다. 하지만 영조의 본심은 다른 데 있었습니다. 신하들이 계속 전교를 거두어 달라고 청했지만 듣지 않고 일도 안 하던 상황이었죠. 이 때 세자가 영조 앞에 있었는데 영조가 손으로 가라는 시늉을 하더니 이렇게 말 합니다.

"너는 무엇 하러 나왔는가?"
"내가 시를 읽을 것인데, 네가 눈물을 흘리면 효성이 있는 것이므로 내 마땅히 너를 위해 내렸던 전교를 취소하겠다."


이게 본심이었던 거죠 뭐. 충성서약이요. 세자는 다행히 눈물을 쏟았고, 신하들은 약속대로 명을 거둬달라 합니다. 하지만 인원왕후의 허락이 떨어졌다면서 계속 선위하겠다 하죠. 인원왕후는 선위를 허락했다가 뒤늦게야 귀가 잘 안 들렸다면서 '내 귀가 나라를 망치겠다'면서 반대했죠. 솔직히 그녀도 질려서 홧김에 허락했다가 아니다 싶어서 반대한 게 아닌가도 싶습니다.

"세자가 찬 곳에 있으면 안 좋으니 빨리 명령을 받고 들어가라."

영조는 이렇게 말 했다는데, 이게 진심이겠습니까. 세자는 매일마다 닫힌 문을 열고 들어가서 선위를 취소해 달라고 빌었습니다. 그렇게 4일이 지난 후에야 겨우 명이 취소되죠.

그 2년 후에는 신위라는 자가 올린 상소가 문제가 됐습니다. 신하들을 너무 쉽게 벌 준다는 거였죠. 세자는 이를 꾸짖었는데, 이 소식이 영조에게 들립니다. 신위는 아버지인 자기를 깐 것인데 왜 너는 가만히 있었냐는 거였죠. 그러면서 "차마 듣지 못할 말"을 세자에게 했고, 세자는 이 때문에 관을 벗고 석고 대죄를 합니다. 이런 식이었습니다.

혜경궁 홍씨가 지은 한중록은 세자의 증세를 아주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음모론을 주장하는 측에선 이게 다 혜경궁이 자기 가문을 변호하기 위해 세자의 병을 만들어낸 것이라 주장하고, 세자는 아무런 병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정조가 지은 사도세자의 행록에 세자의 잘난 점만 나온 것이 진실이라는 것이죠.

하지만, 실록의 기록으로도 세자가 충분히 미칠 수준입니다. 세자가 평균적으로 떨어지는 세자였을 순 있겠지만, 조선 역사상 이 정도의 일을 당한 세자는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었습니다. 아니 이런 성질머리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이 있기나 싶을 정도였죠. 불행인지 다행인지 이게 가능했던 사람이 진짜 나타나 버리긴 했습니다. 조선에는 복이었지만, 세자에게는 더 큰 비극이었죠. 아무튼, 이 정도로 당한 상태에서 세자가 병을 얻는 게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일까요?

"의관의 말을 듣건대, 세자가 근래에 가슴이 막히고 뛰는 증상이 있어 발자국 소리만 들어도 이런 증세가 일어난다고 합니다" - 1755년, 영조 31년, 세자 나이 2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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