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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2/30 10:23:30
Name   횡빈
Subject   천덕꾸러기에서 전설의 주인공으로
일본어에 一発屋(いっぱつや/잇파츠야)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심플하게 원히트원더죠. 다이유우사쿠(ダイユウサク/1985-2013)는 일본 경마사상 최강의 一発屋로 불립니다. 원히트원더라는 건 원래 커리어가 대단찮기에 가능한 겁니다만 이 말은 참으로 마생(馬生)이 기구했습니다.

경주마로서 아주 탁월한 혈통은 아니었지만 가계도가 나쁜 건 아니었고, 태어났던 목장 내에서도 제법 기대가 있었던 모양이지만 막상 크고 보니 영 별볼일 없는 말이었습니다. 어릴 적 모습을 보고 입도선매했던 나이토 조교사가 성장한 말을 보고 속았다고 당황했다는 얘기도 있죠. 체질이 약해서 데뷔가 무지 늦었는데 어지간한 말들보다 거의 1년 가까이 늦은 4세(당시엔 말의 나이를 만나이가 아니라 한국식 나이로 세서 지금 기준으론 3세)  10월 말이 되어서야 겨우 데뷔, 그나마도 2전 연속으로 특례 덕분에 타임오버를 면한 압도적 꼴찌였습니다.

원래 이 말의 이름은 마주의 손자에게서 이름을 따온 다이코우사쿠(タイコウサク)였습니다. 그게 누군가의 실수로 등록할 때 코(コ)가 유(ユ)가 되어버린 거죠. 당시엔 이미 레이스에 나온 말도 이름을 바꿀 수 있었지만 '이렇게 별볼일 없는 말에게 손자의 이름을 붙일 수는 없다'는 이유로 이름이 정해졌고요. 이름만 이런 게 아니라 마방 내의 담당조수도 미승리마 전담의 말단이 '짬처리'를 당했고, 여물을 제대로 못 먹어서 끼니를 해결하는 것도 문제였다고 합니다.

다이유우사쿠는 그야말로 천덕꾸러기였습니다. 잔디와 다트, 두 종류의 경마에서 다 말아먹다보니 도저히 가망이 안 보이는 상태였고, 나이도 전혀 어리질 않았습니다. 이런 말들은 조기에 은퇴당해서 운이 좋으면 관광시설의 승마용 말, 보통은 도살당하고 맙니다. 다이유우사쿠도 승마용 말로 갈 뻔 했지만 나이토 조교사는 1년만 더 기회를 주기로 했고, 5번째 도전만에 첫 승리를 따냅니다.

7월에는 당시 G2(2티어) 대회였던 타카마츠노미야배(高松宮杯)에 출주, 비록 7위로 끝났지만 중상(重賞)에 처음으로 참가해봤고, 9월에는 한신경마장 1200m 코스에서 신기록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일류 경주마에겐 택도 없지만, 어쨌든 중앙경마의 하급대회라면 이길 수도 있는 경주마가 된 거죠. 그리고 이 해에 주전 기수가 쿠마자와 기수로 정해졌습니다.

6세 시즌에는 마침내 오픈마가 되었고, 오픈 우승, 중상 게시판 입성(5위 이내), 그리고 천황상(가을)을 통해 G1 참가도 경험했습니다. 타임오버를 당하던 천덕꾸러기로서는 천지개벽할 변화였습니다. 물론 뒤늦게 재능이 개화했다곤 하더라도 여전히 일류 경주마들을 꺾고 우승할 정도는 아니었죠. 아직까진 G2 4위, G3 3위가 최고 기록이었으니까요.

그리고 개막한 운명의 7세 시즌, 신년벽두에 G3였던 교토의 금배(金杯)에서 인기 1위로 우승, 염원하던 첫 중상 우승을 거머쥡니다. 이후 중상에만 참여하며 꾸준히 상위권에 들었고, 11월에는 마일CS에서 5위, 처음으로 G1 대회에서 게시판 입성에 성공했습니다. G1에 도전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은 쿠마자와 기수와 히라타 조수는 나이토 조교사에게 단거리 G1 대회인 스프린터즈에 참가하자고 건의하지만 나이토 조교사의 목표는 더 높은 곳에 있었습니다.

아리마기념(有馬記念)은 연말에 열리는 G1 그랑프리입니다. 한 해를 결산하는 대회로서도 의미가 있고, 연말 보너스를 털어서 마권을 사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G1 중에서도 특별한 대회죠. 그런 꿈의 무대에 다이유우사쿠를 내보내려는 거였습니다. 물론 일반적인 경우라면 무리였습니다. 아리마기념은 팬투표를 통해 뽑힌 말들만 참가할 수 있는 대회거든요. 하지만 이 1991년은 유력한 말들이 부상으로 불참하는 경우가 많았고, 아리마기념 전에 열린 특별오픈에서 우승한 게 인정받아 '깍두기'로 참가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세간의 시선은 냉정했습니다. 중상 상위권에 꾸준히 들었다고 한들 대부분 G2와 G3에 결국 우승은 G3 1회뿐이었고, 가을에 G1 5위로 경쟁력을 입증했다기엔 플루크였을 가능성도 있는데다 1600m 경주였기에 2500m짜리인 아리마기념하고는 아예 다른 무대였습니다. 심지어 아리마기념이 열리는 나카야마 경마장은 처음 경험해보는 곳이었죠. 누가 봐도 들러리였고, 다이유우사쿠의 이름이 배우 마츠다 유우사쿠를 연상시킨다는 이유에서 마권을 사는 사람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가장 강력한 우승후보였던 메지로맥퀸이 영화배우 스티브 맥퀸에서 이름을 따온 거라 메지로맥퀸과 함께 영화배우 마권이라고 세트로 샀다나요.

인기순위 15두 중 뒤에서 2위인 14위, 단승 마권 137.9배. 이게 다이유우사쿠의 위치였습니다. 마주는 경주를 보긴 하되 경마장이 아니라 TV로 보고 있었고, 딸에게 손녀 데리고 디즈니랜드 가는 김에 경마장에 들리라고 했습니다. 나이토 조교사는 시상식에 참여할 때를 위해 정장 차림으로 입장했지만 주변으로부터 이후 결혼식이나 장례식에 참여하는 걸로 오해받았습니다. 개중에는 비웃는 사람도 있었겠죠.



그러나 다이유우사쿠는 이 무대에서 우승, 그것도 향후 12년 동안 이어질 신기록으로 우승을 해버립니다. 아리마기념에서의 7세마의 우승은 역사상 3번째였고, 특히 100배 이상 배당률 우승은 최초였는데 앞으로도 깨지지 않을 거란 말이 많습니다. 이 사건을 두고 세기의 이변(世紀の番狂わせ)이라고 합니다. 당시 이 경주를 중계하던 후지테레비의 아나운서가 これはビックリ、ダイユウサク!!(깜짝 놀랐다, 다이유우사쿠!!)라고 외친 것도 유명하고요(위 영상은 일본경마협회 공식 유튜브에서 가져온 건데 이 영상은 다른쪽 중계라서 대사가 다릅니다).

이 기적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이듬해 8세시즌은 평범했습니다. 전부 G1과 G2였지만 다이유우사쿠는 한 차례도 5위 이내에 들지 못하고 은퇴했습니다. 이미 경주마로서는 무척 많은 나이이기도 했도요. 이후 종자마로 전향, 큰 업적을 남기지는 못했지만 원체 전설적인 일화의 주인공인지라 도축당하는 일은 없었고, 관광시설과 목장 등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눈을 감았습니다.



13
  • 춫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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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자별
로열로드를 걸은 경주마보다는 행복한 노년을 보냈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나저나 참 뭉클합니당.
경마는 특히 스토리가 중요한 거 같더라고요. 우승 많이 못하더라도 배경이 특별하거나 뭔가 임팩트가 있는 말들이 인기도 좋고요.
1
사이시옷
재미있어요!
Vinnydaddy
역시 꾸준함보다는 임팩트가...
역시 고점이 중요하다는게 느껴지네요.

커리어 내내 4강 안에 들다가 은퇴하는 선수보다
만년 꼴지로 뒹굴다가 미친 기록으로 우승 찍고 다시 바닥으로 내려와서 은퇴한 선수가 더 기억에 남는게 아닌가...
근데 커리어 내내 4강에만 들어서 전설이 된 케이스도 있읍니다 ㅋㅋㅋ 이 말도 나중에 쓰려고요.
3
오오 기대하겠습니다 ㅋㅋ
저 우승 영상에서 다이유우사쿠가 마지막 결승점 앞두고 신들린 것 처럼 뛰쳐나가는게 좀 소름이네요.
마지막 직선주로 접어들때만 해도 3등인 것 같은데요? 대단하네요...
경마에서능 마지막 직선 코스에서 뛰쳐나오는 전략을 쓰는 경우가 되게 많아요. 그래서 극단적으로 그 이전 과정 볼 거 없이 마지막 직선 30초 정도만 봐도 재밌어요 ㅋㅋ
파란아게하
드라마에 드라마에 드라마에 드라마를 썼네요
너무 재밌어요 잘 읽었습니다
조지 포먼
일관성 보다 임펙트가 더 값어치 있는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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