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20/05/13 10:38:30수정됨
Name   사이시옷
Subject   제주도에서의 삶

  퇴근길은 산중턱 - 시골 - 신도시로 이어진다. 회사에서 나와 내리막길을 쭈욱 내려가면 파란 하늘과 바다의 풍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하늘과 바다는 경계선이 희미하다. 여객기와 컨테이너선을 봐야 그 둘을 구분해 낼 수 있다. 한치철이 되면 저녁 바다는 온통 새하얀 빛으로 가득 차는데 그게 참 장관이다.

  내려오다 보면 작고 구불구불한 길 주위에 푸른 귤밭이 펼쳐지고 옆쪽 공터엔 벌이 붕붕 날아다니는 양봉장도 조그맣게 자리 잡고 있다. 비릿한 흙내음이 지나가면 꽃의 향기가 코를 가득 채운다. 이곳을 조금 더 지나면 작은 공장과 고철상 사이로 거대하고 낡은 트럭이 미꾸라지처럼 굽이굽이 빠져나가곤 한다.

  회사가 산중턱이라 집 근처에 다다르면 귀가 먹먹해진다. 이제 눈앞에는 아파트로 가득한 신도시가 모습을 드러낸다. 여기에 아늑한 내 보금자리가 있다. 겉으로는 서울과 꽤나 비슷하다. 아파트 많고 가게 많고. 이렇게 퇴근하는 길의 풍경은 꽤나 다채롭다. 계절마다 변화무쌍해 운전의 지루함을 느낄 틈이 없다.


  서울쥐인 나에게 제주는 재미있는 곳이다. 시골도 아니고 도시도 아니다. 껍질을 요렇게 까도 저렇게 까도 도시의 모습만 나오는 서울에 비해 한 커풀만 벗기면 귤밭이 펼쳐지는 제주의 모습이 어떤 때는 가냘프고 어떤 때는 사랑스럽다.

  조금만 걸어가도 바다가 펼쳐져 일 년 내내 서핑을 즐길 수 있어서 좋다. 차를 타고 20분만 나가 텐트를 쳐도 멀리 여행 온 것 같아 좋다. 조금만 움직여도 일상에서 벗어날 수 있다. 도시의 껍질이 얇기에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마음에 안 드는 점도 있다. 제주에 온지 4년이 되어가니 서울 가면 먹고 싶은 음식들이 마음속에 줄을 선다. 전국 맛집은 서울에 몰려있다는 말에 격히 공감한다. 제주의 맛집은 대부분 메뉴가 비슷하거나(향토음식) 인스타용(관광용)이다. 그래서 선택의 폭이 좁다. 요즘엔 석촌동의 돼지야채곱창을 먹고 싶다. 잘 가던 분식집의 떡꼬치와 순대볶음도 그립다.


  그래도 이젠 서울로 돌아가지 않아도 괜찮겠다 싶다. 이곳이 좋아지는데 퍽 오래 걸렸다. 정확히 말하면 제주가 싫은 게 아니었다. 이유는 어찌되었던 경쟁하는 삶에서 도태되었고, 실패해서 제주에 왔다 생각했다. 이 장소가 아니라 내 자신이 싫었었다.

  출퇴근길에 흙내음을 맡으면, 서핑 보드 위에 누워 파도 소리를 듣고 있으면 작지만 내 마음을 적당히 채우는 행복감을 느낀다. 마음속의 나는 이제야 조금씩 고요함을 배우는 듯하다. 끊임없이 나를 채찍질하는 모습도 볕에 내놓은 해삼같이 녹아내렸으면 한다. 작지만 소중한 일상이 지금처럼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26
  • 혼저옵서예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10855 일상/생각풀 리모트가 내 주변에 끼친 영향 16 ikuk 20/08/12 6378 25
10850 일상/생각엄마와 나 1 머랭 20/08/10 6563 11
10844 일상/생각'문화적 전유' 개념을 반대하는 이유 3 치리아 20/08/08 7285 9
10841 일상/생각설거지 하면서 세탁기 돌려놓지 말자 22 아침커피 20/08/06 6236 39
10836 일상/생각FOMO, 비교에서 오는 문제 9 존보글 20/08/04 5898 28
10835 일상/생각꿈만으로도 행복한 게임 리뷰어의 길 8 Xayide 20/08/02 5934 22
10832 일상/생각올해는 완벽하게 망한 해외출장 3 집에가고파요 20/08/01 6258 1
10821 일상/생각2차를 앞두고 서둘러 남기는 생각;;;; 4 켈로그김 20/07/27 5183 9
10809 일상/생각의도치 않게 입은 혜택에 대해서도 갚아야할 도덕적 의무가 존재할까? 21 ar15Lover 20/07/23 6375 4
10798 일상/생각천하장사 고양이 아침커피 20/07/21 4668 9
10795 일상/생각Kimchi Warrior의 탄생 6 이그나티우스 20/07/19 4793 8
10793 일상/생각자기 객관화라는 덫 8 necessary evil 20/07/17 5540 18
10777 일상/생각한 가족의 고집, 그리고 나의 고집에 대한 고백 자몽에이드 20/07/14 5617 9
10768 일상/생각인국공을 보며. 시간을 변수로 삼지 못하는 인간. 5 sisyphus 20/07/11 6303 9
10767 일상/생각동물복지 달걀 56 오쇼 라즈니쉬 20/07/11 9509 12
10763 일상/생각40대 부부의 9급 공무원 도전기 36 4월이야기 20/07/08 8318 52
10754 일상/생각집밥의 이상과 현실 42 이그나티우스 20/07/06 6694 43
10747 일상/생각자위에 관한 옛날 이야기 5 하트필드 20/07/04 6891 9
10737 일상/생각수출 계약서 만드느라 미쳐가는 중입니다. 4 집에가고파요 20/07/02 6067 2
10729 일상/생각머리 아픈 질문. 자유주의자에게 학문이란? 19 sisyphus 20/06/29 6078 0
10728 일상/생각그냥 써보는 그냥 일상 7 쉬군 20/06/29 5451 19
10726 일상/생각취업면접 오실때 노쇼는 하지 말아주세요. 28 집에가고파요 20/06/29 9751 0
10706 일상/생각자격은 없다. 94 절름발이이리 20/06/22 10177 37
10705 일상/생각피서가야할 날씨네요 3 필교 20/06/22 5664 0
10696 일상/생각85일간의 연애 29 거소 20/06/17 7664 60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