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te | 17/08/22 00:07:54 |
Name | 코리몬테아스 |
Subject | 브로드웨이와 인종주의 - 흑인 배우가 앙졸라스를 할 때 |
2014년 레미제라블 브로드웨이 리바이벌 공연에서 Kyle Scatliffe 라는 흑인 배우가 앙졸라스 역을 맡았습니다. 앙졸라스는 레 미제라블의 상징적인 캐릭터 중 하나고, 혁명운동가의 이데아 같은 존재죠. 그리고 백인입니다. 하지만, 브로드웨이에서 캐릭터의 인종과 연기하는 배우의 인종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는 이전에도 있었고 그렇게 놀랄 만한 일은 아니죠. 브로드웨이의 colorblind(인종불문주의)는 문제삼기에는 너무 멀리 왔습니다. 브로드웨이에서 배역의 인종과 배우의 인종을 완전히 일치시키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브로드웨이 연극의 상당 부분은 서구 고전(그것도 특히 영국과 미국)을 각색한 것이 차지하고 특히 대형극의 상당수는 1970년대 이전의 작품들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브로드웨이의 프로덕션 회사들은 오랜 경험을 통해 많은 자본을 필요로 하는 대형극의 경우 아직까지도 시대극이 가장 안전하고 인기있기 때문에 이런 전통이 유지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배역의 인종과 배우의 인종을 일치시키려 하면 유색인종에게 주어질 수 있는 역할은 매우 한정적이게 됩니다. 이는 자연스럽게 인종차별 논쟁으로 흐르게 되죠. 그런데 캐릭터의 고증을 중요하게 여기는사람이 ‘난 인종차별주의자는 아니지만, 흑인인 앙졸라스는 인정할 수 없어’ 라는 주장을 한다고 생각해보죠. <“난 인종차별주의자는 아닌데 그래도..” 뒤에 오는 문장들은 전부 인종차별주의적 문장이라는 다이어그램> 저런 주장이 위의 그림처럼 인종차별주의적 주장일까요? 실제로 레미제라블 리바이벌의 캐스트가 정해진 이후에 이런 내용의 항의가 프로덕션사에 전달된 적이 있다고 합니다. 팬으로서 있을 수도 있는 의견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브로드웨이의 환경아래에서 유색인종의 입지를 줄이는 압력이라고 비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브로드웨이는 그런 논쟁을 하기에는 유색인종 캐스트에 대한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었고 저런 항의에 대해서 사람들은 “그럼 25주년 공연은 어떻게 보셨어요? 에포닌이나 팡틴이 리 살롱가인건 괜찮나요?”라고 대답을 돌려주는 걸 선호합니다. 승리의 역사는 때로는 논리보다 설득력 있게 느껴지는 도구거든요. <레 미제라블 25주년 “다른 사람한테 말하기 무서운데..작품의 역사적 배경과 어울리지 않는, 인종불문주의 캐스팅이 싫어. 그래서 레 미제라블 25주년 공연의 자베르가 정말 싫었어.” <1993년 레 미제라블에서 에포닌 역할을 맡아 인종의 벽을 허문 캐스팅을 이뤄낸 걸로 아직까지 회자되는 리 살롱가의 에포닌. 유색인종에게 영감을 준 예술인 리스트를 뽑으면 항상 들어가죠.> “리 살롱가의 에포닌을 변호하던 논리 중 하나는 [그녀는 충분히 백인처럼 보여요. 뭐가 문제죠?] 였어요. [유색인종이어도 괜찮아.]보다 더 강력한 변호였던거 같아요.” 이런 선구자적 인물들의 도움으로 뮤지컬 레 미제라블에서 인종불문주의는 잘 자리잡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선례가 있다.’는 걸로는 충분하지 않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역사는 순종하지 않겠다는 사람이 나타날 수도 있고 저변의 논리가 더 중요하게 느껴질 수도 있죠. PC 문화가 만들어낸 잘못된 전통을 이제 뒤집을 때가 왔다면서 카일의 캐스팅을 뒤집으려 하는 사람이 등장한다면 앞선 선구자들은 중요하지 않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인종불문주의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캐스팅에 인종이 반영되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체계적 질문(Systematic questioning)을 해보라고 합니다. A “앙졸라스는 백인이에요. 백인이아닌 앙졸라스는 인정할 수 없어요. 원작(Original)을 중요시 여겨야 한다는 주장은 인종차별이 아닙니다.” B “당신이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니라면 배우의 피부색은 정체성이 아니라 신체의 특징적 색깔(color)일 뿐이죠? 당신은 캐릭터의 신체적 특징과 배우의 신체적 특징이 맞기를 바랄 뿐인가요?” A “그렇죠” B “그럼 마이클 맥과이어(10주년 공연)의 앙졸라스도 마음에 안드시나요?” A “왜죠?” B “마이클 맥과이어는 백인이라 흰 피부를 가지고 있을지 몰라도 그의 머리색은 검은 색이죠. 빅토르 위고는 앙졸라스가 태양처럼 타는 듯한 금발을 가지고 있다고 묘사했고요. 피부색만 맞으면 다른 신체적 특징들은 달라도 되는 건가요? 피부색과 머리색은 무슨 차이가 있죠? 그게 단순한 신체적 특징이 라면서요?” A “19세기 프랑스의 경찰이나 혁명지도자가 흑인일 수는 없어요.” B “19세기 프랑스에선 사람들이 총을 맞은 다음 노래하고 춤추면서 죽어갔나요? 물리법칙을 무시한 괴력을 내는 전과자가 대부호가 되고 시장이 될 수 있고요? 이런 극적이고 픽션적 요소는 수용하면서 인종만은 선택적으로 거부해야 하나요?” A “그걸 다 똑같이 중요시 여겨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B “당신을 인종차별주의자라 하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솔직해지세요. 당신은 ‘고증’이 맞지 않는 게 싫은 게 아니죠. ‘피부색에 대한 고증’이 맞지 않는 게 싫은 거죠.”
(10주년 공연, 마이클 더글라스의 검은 머리 앙졸라스) (아랍계 캐나다인 라민 카림루의 25주년 앙졸라스) 위의 체계적 질문들은 인종주의와 그걸 회피하려는 사람들에 대한 특별한 가정들을 깔고 있기 때문에 공감이 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 논리(연극에서 피부색의 차이는 다른 신체적 차이만큼 똑같이 사소하고, 피부색에 대한 불평 역시 그만큼 사소해야만 인종주의자가 아니다.)가 얼마나 정밀한지와 관계없이 저 주장들은 브로드웨이에서는 지금까지 강력한 힘을 발휘했습니다. 여기에 더해 공연예술이 영화나 드라마에 비해 사실주의에 대한 요구에서 자유롭다는 점 덕분에 인종불문주의는 빠르게 자리잡아가고 있습니다. <미스 사이공 크리스와 킴>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인종불문주의가 백인 배역들한테만 선택적으로 작용한다고 불평합니다. 가령 미스 사이공에서 백인 병사인 <유색인종의 비율이 눈에 띄는 해밀턴> 이런 백인 배우들에 대한 역차별 논란이 가장 크게 일었던 건, 뮤지컬 ‘해밀턴’의 2016년 캐스팅 공고 때 였습니다. 해밀턴은 2015년 혜성처럼 등장한 뮤지컬로 독립전쟁 시기 알렉산더 해밀턴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이 극은 독립전쟁이라는 시대극을 힙합,랩,재즈,블루스 등을 도입하여 풀어냈고, 시대극을 다루고 있음에도 캐스트 중 흑인,라티노,아시안 등 유색인종의 비율이 백인보다 높은 걸로 유명합니다. 인종주의에서 자유로운 뮤지컬이란 찬사를 받는 해밀턴은 이미 토니상을 타기도 했죠. 그런데 작년 프로듀서 측에서 낸 공고문이 이렇게 되어있어 논란이 일었습니다.
“비-백인의 20~30대 남녀 배우를 찾고 있습니다.” 이는 뜨거운 논쟁을 불러일으켰고, 전미배우협회는 이 캐스팅 공고문에 대해 프로덕션 사에 대해 항의했습니다. ‘Non-‘ 뒤에 인종적 특징(ethnic characteristic)을 붙이는 공고는 배우협회에서 금지하는 것이고, 이는 인종주의에 해당한다는 항의였죠. 해밀턴 측은 이에 대해 공고 전에 이미 배우협회와 사전협의를 끝마친 상태였고 문제없는 걸로 합의 본 일에 대해 다른 말을 한다고 반격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비백인 배역들을 찾는 공고를 낼 것이란 것을 사전에 타진했는데 전미배우협회측에서는 설마 저런 언어로 공고를 낼 줄은 몰랐던 사건으로 결론났습니다. 최종적으로 저 공고를 통한 캐스팅은 성사되었고 해밀턴은 성황리에 2017년 투어를 진행했습니다. 그러나 전미배우협회와 해밀턴 프로덕션 사이의 문제가 어떻게 해결되었는 지와 무관하게 이 캐스팅 공고에 대한 찬반양론은 공연계를 넘어서도 뜨거웠습니다. 사실 해밀턴의 공고자체는 인종불문주의와는 조금 다른 영역에 있습니다. 프로덕션에서 특정 나이 인종 성별 키 등을 고려하여 캐스팅 하는 것 자체는 자유와 재량의 영역입니다. 인종불문주의 캐스팅을 옹호한다 해서 인종적합주의 캐스팅에 반대할 필요는 없습니다. ‘나는 흑인 배우가 앙졸라스는 맡는 데 문제없다고 생각하지만, 백인배우만을 캐스팅하는 것 역시 프로덕션의 자유라고 생각해.’ 자체는 일단 양립가능한 주장입니다. ‘can’과 ‘should’는 동의어가 아니니까요. 하지만, 그런 모호한 지점을 완전히 이해하는 인종불문주의자들과 역인종주의에대한 성토는 많지 않고 이 논쟁은 아주 소모적인 방향으로 서로에게 상처만을 남긴 채 식어버렸습니다. 또 이 문제에서 해밀턴이 역인종주의적 모습을 보이거나 혹은 그렇게 오해할 수 있을 것 같은 행동을 한 것은 사실이기도 하고요. 브로드웨이에서 어떤 피부색의 배우들이 어떤 역할에 캐스팅되냐에 대한 문제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미국 사회 전반, 그리고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문제들에 쉽게 대비됩니다. 리 살롱가가 에포닌에 캐스팅된 것은 영광의 역사였고 승리의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후 3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 그 승리는 평등의 시대로가는 이정표로 빛나고 있는 지 잘 모르겠습니다. 파편화된 문제들은 과거의 빛을 잃어버린 듯 합니다. 브로드웨이가 진보와 혁신, 자유의 웅변자라고 자처하는 만큼 이런 문제들을 현명하게 해결 함으로서 사회에 모범을 보여주길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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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캐스팅 문제에서 흥미롭게 기억하는 것이 해리 포터의 작가 조앤 롤링의 이야기였습니다. 해리 포터 연극판으로 기억하는데 헤르미온느(허... 허마이오니?) 역의 배우가 흑인이 캐스팅되었던가 뭐 그래서 논란이 됐던 적이 있습니다. 이에 작가는 '나는 내 작품 어디에도 헤르미온느의 피부색을 묘사한 바가 없다'라고 답했... 더 보기
이런 캐스팅 문제에서 흥미롭게 기억하는 것이 해리 포터의 작가 조앤 롤링의 이야기였습니다. 해리 포터 연극판으로 기억하는데 헤르미온느(허... 허마이오니?) 역의 배우가 흑인이 캐스팅되었던가 뭐 그래서 논란이 됐던 적이 있습니다. 이에 작가는 '나는 내 작품 어디에도 헤르미온느의 피부색을 묘사한 바가 없다'라고 답했죠. 여러 해리 포터 팬들의 분석을 보면 명시적이지는 않지만 백인으로 봐도 무방할 정도의 단서는 있지만 어쨌거나 작가가 이러한 방식으로 논란을 종식시켰고, 연기 역할의 인종문제에 대해서도 꽤 좋은 답이 아니었나 뭐 그런 생각을 합니다. 미스 사이공은 아예 대놓고 인종적인 요소가 핵심 요소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이런 작품은 좀 어쩔 수 없지 않나 싶긴 한데...
해리포터 아주 재밌게 봤는데 헤르미온느의 인종이 표현된 적이 없는 줄은 몰랐네요. 그리고 미스 사이공과 같은 문제에서 유색인종 배역에 유색인종의 정체성이 강하기 때문에 거기 백인 캐스팅하기 꺼려진다는 건 얼핏 맞는 말이긴 해요. 19세기 프랑스에서 흑인 경찰이 노래하는 것을 용인받는 다는 건 단순히 그게 연극적 허용 때문에 가능한 건 아니니까요. 레 미제라블의 '자베르'나 '장발장' '마리우스' 이런 캐릭터... 더 보기
해리포터 아주 재밌게 봤는데 헤르미온느의 인종이 표현된 적이 없는 줄은 몰랐네요. 그리고 미스 사이공과 같은 문제에서 유색인종 배역에 유색인종의 정체성이 강하기 때문에 거기 백인 캐스팅하기 꺼려진다는 건 얼핏 맞는 말이긴 해요. 19세기 프랑스에서 흑인 경찰이 노래하는 것을 용인받는 다는 건 단순히 그게 연극적 허용 때문에 가능한 건 아니니까요. 레 미제라블의 '자베르'나 '장발장' '마리우스' 이런 캐릭터들은 '백인 남자'라는 정체성을 가진 게 아니라 그냥 '인간'으로서 정체성을 가지고 당시 사회의 보편적 가치들을 노래하는 사람들이죠. 극이 쓰여질 당시 백인인건 걍 인간의 조건인거고 다른 인종의 사람들도 인간이 되어서 괜찮아졌는데, 미스 사이공의 킴이 '베트남계'이고 '여성'인건 외부적으로 변화가 없었으니까요. 다만, 그런 인종적이고 역사적 배경에서 오는 아픔을 훌륭하게 표현할 백인 배우들은 분명히 있을 테니 원칙적으로는 킴도 오픈 캐스팅을 해야 맞죠.
근데 사람들이 아랍인 장발장은 재밌게 보는데 백인 킴은 너무 논란이 거셀 것 같아서 참 시도하기가..
확실히 얼굴이 전형적인 아시안 얼굴은 절대로 아니죠.
전형적인 베트남 얼굴은 http://entertain.naver.com/read?oid=003&aid=0000602821 이 분 같아요 ㅎㅎㅎ;;
레아 살롱가는..
이제는 뭐 거의 백인 아주머니 다 되셨더라구요 ㅋㅋㅋ;;
미스 사이공 25주년 공연에서 보니 백인이라고 해도 전혀 위화감이 없을 외모...
본문에도 언급하셨듯이 충분히 백인처럼 보였 -_-;;;
사실 피부색 그 자체는 물리적으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멜라닌 세포의 양의 차이일 뿐이죠. 하지만 사람들이 피부색으로부터 완전히 초연해질 수 없으니 피부색과 관련된 문제들이 중요한 것일 따름이고요. 즉 피부색이 중요한 이유는 오로지 사람들이 그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인간의 개성적 특성을 무시하려는 리버럴들에 대해서 인종차별반대론이 고유한 맥락을 가질 수 있는 것도 이런 전제 때문이죠. 가령 '어차피 똑같은 인간이니 똑같은 기준으로 평가하고 넘어가면 끝 아니냐'는 주장에 대해서는 '그런 식으로 접근해서는 인종 간 불평등 및 그로부터 비롯된 독특한 문제들에 대해 적실한 해법을 내놓기 어렵다. 사람들은 여전히 인종에 구애되어 이런저런 판단을 하고 행위를 하기 때문에 보편주의적/자유주의적 접근만으로 대처할 수 없는 지점이 있다'는 식의 반론을 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를 반대로 뒤집으면, 연극 상영이나 원작 구현에 있어 피부색과 관련된 관습이 있다고 할 때, 이것이 그 자체로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일이더라도 이에 구애 받는 사람들이 있다면 간단히 무시할 수 없다는 주장을 펼 수도 있는 것이죠. <레 미제라블>로 돌아와 말하자면, '피부색이 어떻든 똑같은 인간일 뿐이고 그저 작품의 설정대로 캐스팅하면 된다'는 관점에 대한 비판의 메인 포인트는 결국 '그것은 브로드웨이 무대가 백인중심적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대부분의 각본과 배역이 백인에게 유리하게 설정되어 있다는 진실을 은폐한다. 이런 상황에서 인종적 맥락을 무시하는 일반적 접근은 옳지 않다'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피부색이 어떻든 똑같은 인간일 뿐이고 그저 배우의 실력만 보고 캐스팅하면 된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똑같은 접근이 가능하다는 것을 지적할 수 있지요. '그것은 관객들은 이미 <레 미제라블>의 시대적 배경을 인지하고 그에 맞는 기대를 가지고 관람에 임한다는 것을 은폐한다'라고. 나아가 '피부색이 중요하다는 관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사람은 없다'라고.
인종 문제의 민감한 당파성으로부터 거리감을 확보하기 위해, 보다 관습적으로 의문시 되지 않는 배우의 성별로 예를 바꿔봅시다. 가령 팡틴을 남배우가, 자베르를 여배우가 수행한다면, 그것이 쉽게 용인 될 수 있을까요. 초연한 사람은 가능할 겁니다. 그깟 인종 그깟 성별 그깟 외향적 정체성 따위 하고 말이죠. 사실은 저도 그런 입장이고요. 하지만 이런 관점이 보편적으로 통용되기는 힘들 겁니다. 왜냐하면 캐릭터의 성별은 고정된 관습이고 디폴트값이며 '투명한 것'이라고 폭넓게 여겨지기 때문이죠. 이는 사람들의 기대와 욕망과 관습과 경험을 무시해버리는 것은 설득에 성공하기 어렵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만약 관객들의 기왕의 인식이 배역의 성별을 교체하는 시도를 패러디 이상이 될 수가 없게끔 제약한다면, 인종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일 수 있지 않느냐는 것이죠.
이쯤 되면 산업적인 작동 양태도 고려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연극이나 뮤지컬은 대개의 경우 영화 같은 양산형 공산품과 격을 차별화하는 데에서 마케팅 포인트를 찾죠. 이것이 지탱되는 데에는 남들과는 소비를 하기를 원하는 자아도취적 감상자가 필요하고요. 연극 감상자 모두가 허영덩어리라는 식의 이야기가 아니라, 산업적으로 연극이 지탱되는 기반이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감상자들은 상당한 수준의 교양과 문화자본을 획득한 이들이며, 고증에 대한 지식과 그에 대한 엄격성도 비례적으로 갖추고 있기 마련입니다. 만약 '원작의 인종 설정을 구성하는 것이 배우 산업의 현실에 적합하지 않다'고 한다면, 반대로 '원작의 고증을 파괴하는 것은 연극 산업의 소비 양태와 맞지 않을 수 있다'고 반박할 수 있다는 것이죠. 그럼 이건 윤리적 이상의 문제가 아니라 시의적 제도와 현실을 긍정하냐 마냐의 문제가 됩니다. 물론 이런 자아도취적 감상자들은 인종 이슈에 대한 감수성이 비례적으로 높을 것이고 그만큼 원작의 고증을 파괴해서라도 캐스팅의 인종 평등을 구현하는 데에 친화적일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결론은 같죠. 어느 쪽이든 간에 논리의 문제가 아닌 산업과 정치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보편원칙이 아니라 제도주의적으로 해결이 나는 것이죠.
이것은 윤리주의자들이 흔히 범하는 딜레마입니다. 이들은 기존의 관습이나 전통이 보편원칙에 비추어봤을 때 기만적으로 억압을 수행하고 있는 것에 대해 문제의식을 느낄 수밖에 없다는 데에서 출발합니다. 하지만 대개는 래디컬하게 문제의식과 윤리를 끝까지 밀고 나가지 않습니다. 적당한 지점에서 무의식적으로 인식의 도달을 정지시키죠. 익숙한 논의 중에 대표적인 것으로 소라넷으로 대변되는 포르노 유통에 대한 논쟁이 있겠죠. 리벤지 포르노 등을 근절시키려는 이들의 주 논점은 '초상권'이나 '성적 자기 결정권'과 같은 개인의 권리입니다. 그런데 이런 논점은 근절 대상의 상당 수가 상호 '동의' 하에 생산된 '설정물'이라는 것에 취약합니다. 스와핑과 NTR을 어떤 식으로 구별할지도 모호할 뿐더러. 물론 이런 논쟁을 침묵시키는 것은 '불법'이라는 거의 절대에 가까운 반론입니다만, 애초에 법이라는 것 자체가 현실윤리고 가설적 제약인 것이지 논리적 일관성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은폐하고 있는 것이죠. 비슷하게 친일파나 독립운동 관련 담론도 있겠죠. 매국행위자는 나쁘다는 논점에서 출발해서 일제시대의 각 인물과 단체에 대한 가치평가를 하려는 정의감에서 이런 논의는 출발합니다만, 친일파와 비친일파 사이의 구분의 모호성, 독립운동가의 상당수가 친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는 점, 해방 이후 독립운동가들과 친일파의 협치, 나아가 식민통치 하의 조선인들이 과연 조선왕조나 아직 건국되지 않은 대한민국, 혹은 대표성이 있었다고 말할 수 없는 이런저런 독립운동 단체에 '로열티'를 바칠 의무가 있었는지 등등을 논하다보면 쉬이 그 동력을 잃고 맙니다. 남는 것은 역사의식이나 시민적 합의나 국가의 정통성을 위해서 실체나 진실과는 무관하게 명분론적으로 그 시절 역사에 접근하고 가언적 가치판단을 어거지라도 해야한다는 결론 뿐이죠. 원칙의 보편성이나 진실의 근본적 관철 같은 것은 이미 휘발된 지 오래인 것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인종불문주의'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궁극적인 차원까지 인종을 불문에 부친다고 하면 '불문에 비추어 캐스팅에 대해 전혀 터치하지 말아야한다'라는 지점에 도달할 수밖에 없지요. 하지만 그렇게 되어버리면 인종적 평등의 성취라는 목적에 도달할 수 없다는 위기감을 무의식적으로 감지하기에 그 이전 지점인 '배우의 피부색을 관객이 의도적으로 무시하면 된다'라는 데에서 멈춰버리는 것이고요. 이것은 자기기만이죠. 그러면 그보다 안쪽 지점인 '원작의 인물 설정의 인종적 편향을 업계인들이 무시하면 된다'는 데에서 멈추면 안 되는 것이냐는 반문이 따라올 수 밖에 없고요. 인종차별반대론자들은 '솔직해지자. 어차피 다른 극적 요소들도 비현실적이기는 매한가지인데 인종에 대해서만 현실성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자기기만이 아니냐'라고 말하지만, 정작 본인들 역시도 다른 관습적 요소(위에서 말한 성과 같은)들이 아닌 인종에 대해서만 파괴를 행하려 한다는 것이나 피부색에 완벽하게 초연할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자기기만을 수행하고 있다는 것은 다르지 않죠. 사실 순수 논리적으로 올 오어 나띵의 관점에서 이 문제를 바라보면 결론은 둘 중 하나입니다. 피부색은 전혀 중요하지 않으므로 누가 전원 백인 캐스팅을 하든 전원 흑인 캐스팅을 하든 말든 아예 터치하지 말자는 관점이 있을 수 있고, 그 반대편에는 피부색은 근본적인 중요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원작이고 나발이고 피부색 쿼터를 아예 할당해야하는 식의 관점이 있을 수 있죠. 하지만 양자 모두 성공적이긴 힘들 겁니다. 현실 세계의 사람들의 관념과 행위, 산업적 작동방식 등을 아예 고려하지 않는 관점이니까요. 결국 어떤 주장을 하든, 어떤 포지션에 위치하든, 이 논쟁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이 논리적 일관성을 다소 희생하고 현실적 타당성을 위해 '타협'을 수행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그 타협점이 누군가에게는 왼쪽인 것이고 누군가에게는 오른쪽인 것 뿐이죠.
모든 가치와 권위와 격을 파괴하고 반지성주의적 입장에서 지성주의자들에게 적대감을 보이는 사해x신주의들이 난행을 저지르는 맥락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들을 추동하는 동기는 열등감이죠. 자신의 초라함으로부터 고개를 돌리기 위해서는 모두 다 자신과 똑같이 x신이 되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x신이 아닌, 가치 있고 고귀한 대상은 나무에서 떨어뜨려 자신들과 똑같은 x신으로 끌어내려 하향평준화-그네들의 표현으로는 '민주화'인데, 엘리트주의자들이 민주정에 적대적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의미심장하죠-는 심리입니다. 그렇게 결핍이 심하다보니 막상 자신들의 질시 대상들이 발 딛고 있는 전제가 자신들과 크게 다를 것도 없다든가 어차피 진실과 정의를 추구한다고 해봐야 그게 그닥 일관성 있는 것도 아니라든가 하는 것이 무의식적으로 감지되면 조야한 언어로나마 허점을 파고들어 서슴없이 '팩폭'을 갈기려 들죠.
결국 이것은 근본적인 도덕 규범의 문제라기보다는 정치 문제라고 보아야합니다. 우리가 초연하게 대할 수 없는 인종 간 긴장을 앞에 두고서, 각 인종에게 '권력'을 '평등하게' 분배하는 문제란 거죠. 정치가 항상 그러하듯 본질을 따지는 문제가 아니라 잠정적 합의를 추구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좀 야하게 말하면 모두의 비위를 적당히 맞추는 것으로, 신 존재 증명 같은 것이라기보다는 최저임금 협상과 유사한 성격을 가진 것이라고 할 수 있겠죠. 이렇게 잠정적 합의를 추구하는 일이라고 한다면, 윤리적 과몰입을 경계하는 잠정적 태도가 요구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어차피 잠정적 타협이라면, 어차피 올 오어 나띵이 아니라면, 굳이 상대방을 악마로 간주할 필요는 없을 테니까요. 윤리적 우월감에 도취될 것도, 진실의 관철에 목을 맬 일도 아닌 것입니다. 최저임금 10000원 인상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노동자의 적도 아닌 것처럼. 물론 그 중에 인종차별주의자가 진짜로 있을 수도 있겠지만, 래디컬하게 대의를 추구하는 윤리적 심판장이 아니라 정치게임과 근사치 설정의 장이라면 구태여 상대의 왜곡된 양심을 까발려서 망신을 주고 조리돌림을 할 필요도 없는 거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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