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원들이 추천해주신 좋은 글들을 따로 모아놓는 공간입니다.
- 추천글은 매주 자문단의 투표로 선정됩니다.
Date 21/12/30 14:01:43
Name   코리몬테아스
Subject   중세 판타지의 인종다양성, 시간의 수레바퀴(Wheel of time)
원래 탐라 글이었는데 쓰다보니 1500자가 넘어 오랜만에 티탐을 찾게 되었어요.


탐라에서 남혐 마법사짤로 소개한, 아마존 오리지널 '시간의 수레바퀴'의 마지막화를 얼마 전에 봤어요. 시즌이 끝나고 나서 아쉬운 마음을 검색으로 달래면 원작이 장편 시리즈물이라 엄청난 스포일러가 기다릴 것을 알고 있었지만. 전 마쉬멜로 테스트하면 실패하는 아이로 자라났기 때문에 검색을 멈출 수는 없었음. 이 시리즈를 추천해준 친구가 톨킨이 판타지의 할아버지라면, 이 소설의 원작자인 로버트 조던은 아버지급은 된다 이럴 때. 헛소리라 생각했거든요. '그렇게 유명하다면 내가 읽지 않았을 리 없어!' 약간 이런 근자감도 있었고요. 그런데 검색하다가 조지 마틴이 시간의 수레바퀴가 불러일으킨 판타지에 대한 열정 덕분에 얼불노가 나올 수 있었다는 말을 했다는 거 까지 보고는 ㅋㅋ 바로 개심하여, 로버트 조던은 정말 북미 판타지의 아버지라는 것에 동의함. 영상화 되지 않은 판타지 소설 중에서는 팬베이스도 굉장히 크더라고요. 이쯤 되니 어떻게 지금까지 몰랐는 지가 더 신기함 ㅋㅋ

그런데 그렇게 인터넷 세상을 찾아다니다 보며 데자뷰를 느꼈는데, 이 드라마를 둘러싸고 위쳐가 영상화 되었을 때와 똑같은 쌈박질을 하고 있었기 때문 ㅋㅋ 중세 판타지가 인종의 용광로인게 말이 되냐는 싸움이요.



사진 속의 다섯 배우는 드라마의 다섯 주역을 연기해요. 그 캐릭터들은 모두 '투리버스'라는 지역 출신인데, 드라마 속에서 언급되기로는 적당히 폐쇄적이고 적은 인구 규모를 가진 곳. 불만을 표하는 팬들은 자신들이 '인종주의자'라서 투리버스에 서아시아인이나 흑인, 인종혼혈이 있는 게 싫은 게 아니라고 해요.

다인종 사회는 다분히 근대적인 개념인데 중세 사회에 억지로 적용하니 몰입(immersion)이 깨져서 싫다는 것. 가뜩이나 이동성이 낮은 세계에서도 투리버스는 특히나 폐쇄적인데 인데 저런 인구구성일 수 없으니 핍진성의 문제라는 거죠. '중세 판타지는 서유럽적이니까 백인들이 나오는 게 맞다.' '작가와 독자들은 주연을 백인들로 상상한다' 이런 건 ㅋㅋ 이제와서는 논의할 가치도 없는 주제라고 생각하지만, 코스모폴리탄 중세마을의 핍진성이 너무 떨어져 몰입이 깨진다는 건 일리가 있죠. 그래서 그런 말에는 보통 '백인일 필요는 없으니까 인종을 통일시켜라. 다 흑인이거나 아시아인이거나' 같은 설명이 부연으로 붙고요.

이쯤에서 전 그 정도의 핍진성은 다른 부분에서도 눈에 띄니 굳이 인종 문제에만 달라 붙어서 몰입이 깨져야 하냐고 반문해보기도 하고. 프로덕션 가치나 '미국화'된 매체라는 점을 반영해야 한다면서 적당히 작품 바깥으로 물러나 선을 그었을 꺼에요. 아니면 뭐 마법사들도 있고 순간이동 포털이 있는 세계는 다인종 사회가 좀 빨리 왔다는 사후적인 정당화를 좀 하거나 ㅋㅋ


(드라마에서 묘사된 3000년 전 풍경)

그런데 '핍진성'의 문제로 다인종 캐스팅을 결정한 제작자들을 'Woke'하다고 신나게 패는 데 신물이 난 팬들이 많았나봐요. 쳐 맞던 드라마의 옹호자들은 마지막화 까지 보고는 중세의 다인종 마을에 대한 적절한 내적인 설명을 준비함. 주인공들이 돌아다니는 세상은 현실의 지구처럼 한 곳에서 발원한 인류가 세상의 여러 곳에 퍼져 정착한 뒤 환경에 따라 진화의 압력을 받으며 발전한 결과가 아니에요. 그랬다면, 서로 다른 인종끼리 모여사는 중세 시골마을은 어색할 수 있죠. 그 대신, 시간의 수레바퀴의 세상은 3000년 전 일어난 아포칼립스의 결과물이에요. 멸망하기 전 인류는 SF뺨 후려갈기는 날아다니는 자동차가 즐비한 미래도시에서 살아가고 있었어요. 그러다 드래건이라는 슈퍼짱쎈 마법사가 어둠의 존재를 봉인하려다가 실패하고는 세상을 멸망시켰죠. 그렇게 문명은 암흑기로 후퇴한 뒤 지금 시점에 와서야 중세 봉건 사회 비스무리하게 회복된 것. 그러니 투리버스는 기원이 어찌되었든 간에 멸망해버린 다인종 아틀란티스의 후손인거죠. 그러니 저렇게 다양한 주연들의 인종구성도 자연스럽게 설명됨. 게다가 이런 '발전과 멸망'의 사이클은 드래건의 여러 환생동안 반복되었다니 다인종 사회는 더더욱 정당해짐!

그리고 핍진성의 문제를 제기하던 팬들은 이런 '다인종 아틀란티스의 후예' 이론을 맞서니. 순식간에 중세 판타지는 서유럽적인거다! 후퇴했어요. 그게 너무 실망스러워서 더 이상 논의를 지켜보지 않게 됨.

앞으로 영상화 될 판타지에는 유색인종들이 빠지지 않을꺼고, 그게 기준으로 자리잡기 전 까지는 이런 논쟁이 계속 되겠죠. 그런 다인종 판타지를 환영하는 팬들이 작품 내적으로도 그런 사회상을 정당화할 만한 설정들이 이렇게 몇 개 쯤 예비되었으면 좋겠네요 ㅋㅋ. 딱 이 정도로 억지부릴 수 있는 언덕만 줘도 훨씬 숨통이 트일텐데.



p.s 이 얘기를 친구에게 소개하니 ㅋㅋ 그거 위쳐 드라마에서도 대륙이 다인종 사회라고 윽박지르는 원작 팬들에 지쳐서, '천구의 결합 때 흑인들도 넘어왔나 보지!!!'하며 반격하는 사람이 생긴 거랑 완전 똑같은 전개라고 ㅋㅋ 위쳐는 시즌2 쯤 되니까 익숙함이 불편함을 이겨버려서 인지 인종가지고 뭐라하는 사람은 눈에 띄게 줄어든 거 같은데. 역시 일단 질러보고 봐야하는 듯.



* Cascade님에 의해서 티타임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22-01-11 00:45)
* 관리사유 : 추천게시판으로 복사합니다.



8
  • 잘 읽었습니다 :)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1376 기타삶의 의미를 찾는 단계를 어떻게 벗어났냐면 8 골든햄스 24/03/14 965 19
1375 기타소수 사막은 얼마나 넓을까? 4 Jargon 24/03/06 882 4
1374 기타민자사업의 진행에 관해 6 서포트벡터 24/03/06 836 8
1373 기타노무사 잡론 13 당근매니아 24/03/04 1544 16
1372 기타2024 걸그룹 1/6 2 헬리제의우울 24/03/03 630 13
1371 기타소회와 계획 9 김비버 24/03/03 863 20
1370 기타터널을 나올 땐 터널을 잊어야 한다 20 골든햄스 24/02/27 1567 56
1369 정치/사회업무개시명령의 효력 및 수사대응전략 8 김비버 24/02/21 1401 16
1368 체육/스포츠(데이터 주의)'자율 축구'는 없다. 요르단 전으로 돌아보는 문제점들. 11 joel 24/02/19 955 8
1367 역사 AI를 따라가다 보면 해리 포터를 만나게 된다. 4 코리몬테아스 24/02/18 1058 11
1366 체육/스포츠(데이터 주의)'빌드업 축구'는 없다. 우루과이전으로 돌아보는 벤투호의 빌드업. 13 joel 24/02/12 1333 30
1365 기타자율주행차와 트롤리 딜레마 9 서포트벡터 24/02/06 1189 7
1364 영화영화 A.I.(2001) 18 기아트윈스 24/02/06 1119 23
1363 정치/사회10년차 외신 구독자로서 느끼는 한국 언론 32 카르스 24/02/05 2561 12
1362 기타자폐아이의 부모로 살아간다는건... 11 쉬군 24/02/01 2155 69
1361 일상/생각전세보증금 분쟁부터 임차권 등기명령 해제까지 (4, 完) 6 양라곱 24/01/31 2818 37
1360 기타텃밭을 가꿉시다 20 바이엘(바이엘) 24/01/31 1003 10
1359 일상/생각한국사회에서의 예의바름이란 18 커피를줄이자 24/01/27 6535 3
1358 일상/생각전세보증금 분쟁부터 임차권 등기명령 해제까지 (3) 17 양라곱 24/01/22 6163 22
1357 일상/생각전세보증금 분쟁부터 임차권 등기명령 해제까지 (2) 17 양라곱 24/01/17 5696 14
1356 요리/음식수상한 가게들. 7 심해냉장고 24/01/17 1257 20
1355 일상/생각전세보증금 분쟁부터 임차권 등기명령 해제까지 (1) 9 양라곱 24/01/15 2676 21
1354 기타저의 향수 방랑기 31 Mandarin 24/01/08 3296 2
1353 의료/건강환자의 자기결정권(autonomy)은 어디까지 일까? 7 경계인 24/01/06 1283 21
1352 역사정말 소동파가 만들었나? 동파육 이야기. 13 joel 24/01/01 1310 24
목록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