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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9/10/02 01:20:44
Name   Jace.WoM
Subject   축제가 필요해


한창 타의로 돈에 미쳐 살던 20대 중반, 부업으로 같은 회사에 다니는 친한 누님의 아들의 과외를 했어요. 누님은 슬하에 아들만 둘 있는 주말부부셨는데, 고1 중2로 2살 터울인데, 저희 어머니보다 몇살 안 어림에도 외모에서 귀티와 멋이 줄줄 흐르던 누님을 닮아서 그런가 둘다 외모도 출중하고 옷도 잘 입고 말도 착하게 하고, 한마디로 스테레오 타입 인싸들이었죠.

과외를 손에서 놓은지도 1년이 넘었고 입시 공부를 손에서 놓은건 그보다도 더 오래됐기 때문에, 처음 과외 의뢰를 받았을땐 당황하기도 했지만, 누님은 당장 성적을 올리는것 보다는 공부의 기초를 쌓고, 뭔가 공부를 좀 열심히 하고 싶다는 동기부여를 해주길 바라셨던것 같아요. 감사하게도 당시 빡세게 살던 제게 용돈을 좀 주고 싶어서 그 구실이 필요하셨던것도 좀 있는것 같고요.

과외는 대개 일이 끝나고 누님의 차를 얻어타고 집에 같이 가서 애들 과외를 해주고 혼자 돌아오고 하는 방식으로 진행했습니다. 하지만 가끔 누님이 휴가를 내시거나 외근으로 밖에서 퇴근하실때는 일마치고 혼자 지하철을 타고 가서 과외를 해주고 밤 늦게 돌아와야 할때도 있었죠. 꽤 먼 거리라서 과외가 끝나고 집에 돌아가면 거진 12시가 넘었던지라 피곤하긴 했는데, 보수가 쏠쏠하기도 하고, 돈이 급했기도 했고, 가르치는게 재밌기도 했고, 누님이 워낙 좋은분이시기도 했고 해서 당시엔 피로도 모르고 신나게 즐겼습니다.

누님이 사정이 있어서 지방에 내려가 계신 어느 과외 날, 그날따라 회삿일이 빡세서 지하철을 거의 졸듯이 하고 타서 이건 아니다 싶어 편의점에서 커피 하나를 사서 쪽쪽 빨며 터덜터덜 아파트로 걸어 올라가는데, 뭔가 아파트 느낌이 평소같지 않더라구요.

왁자지껄 떠드는 사람들 목소리,
뭔가 이쁜듯 아닌듯 이상 야리꾸리한 조명,
그리고 결정타로 세이렌의 노래마냥 사람을 홀리는것 같은 향긋한 음식냄새.

지나가며 곁눈질 슥 보니까 사람들이 잔뜩 나와서 대학교때 지겹게 봤던 철골-비닐로 만든 임시 부스에서 뭔갈 막 깔깔대며 신나게 하고 있더라구요. 예전에 아파트 살 때 바자회나 알뜰시장 뭐 이런 행사를 했던 기억이 없는건 아니었는데, 이렇게까지 대놓고 학교 축제 냄새 나는 축제를 한다고? 솔직히 너무 신기했어요.

당장이라도 신나게 뛰어들어 구경하고 싶었지만, 프로 과외러의 본분을 지키기 위해 흥미로움들을 애써 뒤로 하고 누님 집 인터폰을 눌렀습니다. 근데 평소랑 달리 동생 아이가 인터폰을 받았어요. 위화감 레이더에서는 뗄렐렐레 하고 소리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아 이거, 그거구나.

올라가보니 큰 애가 없습니다. 형 어디갔니 하고 작은 애한테 물어보니 연락을 좀 오래 안 받아서 확실히는 모르겠는데 아마 이 밑에서 친구들이랑 놀고 있을거 같답니다. 역시 내 위화감 레이더는 틀리는 법이 없구나, 작은에게 다시 묻습니다. 넌 왜 안 나가놀고 집에 있니? 그러자 '엄마한테 형 연락 안된다니까 선생님 오실테니까 전 집 보고 있으라고 해서요' 아, 나 때문이었구나 미안. 내가 나쁜놈이네, 내가 나갈게.

그렇게 괜찮다는 작은 애를 반 억지로 데리고 집에서 나왔습니다. 처음에는 이러면 안되는데 하며 선비답게 체통을 지키던 작은 아이도 제가 계속 날 신경쓰지 말고 친구들하고 연락해서 놀아라, 너 인싸잖아, 하고 계속 얘기해주니 결국 친구들에게 카톡을 돌렸습니다. 그래도 어른의 가오가 있지 용돈이라도 좀 줘서 보내야지 하고 만원짜리를 두장 줬는데, 자기 이번달 용돈 많이 남아서 괜찮다고 끝까지 고사하더라구요. 아싸리 돈 굳었다 싶어서 그냥 닭꼬치나 하나 쥐어주고 보낸 다음에, 저도 찬찬히 혼자 축제를 둘러봤습니다.

다양한 느낌, 감정이 동시에 밀려왔지만, 그 중 제일은 신기함이었어요. 한국 도심내 아파트에서 이렇게 대놓고 놀자판을 벌인다뇨. 어설프고 촌스러운 흉내도 아니고 정말 본격적이었어요. 놀이공원 가면 흔히 보이는 공 던져서 인형 맞추기 게임 어릴적 초등학교때 문구점에서 보던 자석 낚시에 옛날에나 보던 솜사탕 기계, 타코야끼, 닭꼬치, 술 파는 포장마차도 있고, 조명도 진짜 축제 온것마냥 임시조명 여기저기 잔뜩 달아놓고, 사람들도 아무래도 어린애들이 많긴 했지만 꽤 다양한 연령대가 와서 하하호호 웃고 즐기고 있는게 몇년전 학교 축제 기간에 본 광경의 축소판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규모도 꽤 큰게 아파트가 작지 않은 곳이었는데 걷고 걷고 걸어도 부스가 계속 있더라구요.

그렇게 둘러보다가 젓갈을 파는 가게에서 입맛을 다시고 침을 흘리고 있는데, 드디어 큰 아이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집인데 어디시냐, 너무 죄송하다 뭐 인간이라면 당연한 내용이었기에 대충 괜찮다고 말해주고 집으로 다시 올라갔습니다. .

올라가니까 자기도 모르게 너무 집중해서 노느라 폰도 시간도 못 봤다고, 다시 사과하더라구요. 다음에 나도 말 안하고 지각 한번 하면 되니까 괜찮다고 해줬습니다. 그리고 다시 물어봤어요. 그래서 다 놀고 왔어? 놀다 말고 들어온거 아니야? 다 불태웠어? 솔직히 저도 노는거 좋아해서 아는데, 저 나이에 그거 놀고 만족이 될리가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랬더니 더 놀고 싶은 마음이 없는건 아닌데 괜찮답니다. 공부해야 되고 나도 멀리서 왔으니까요. 하지만 그 괜찮다는 표현에서 저는 묘한 기대감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거 있잖아요. 학교 다닐때 친구한테 야 미팅 할래? 했을때 '아 나 요새 진짜 바빠~과제도 많고 시험준비도 해야되고... 근데 애들 잘생겼어?' 그런 느낌.

그 미묘한 기대감 섞인 대답을 듣자마자, 아랫배가 심하게 땡겨옵니다. 아니 사실은 안 땡겨오는것 같기도 한데, 여튼 땡겨와야만 한다는 신호를 뇌에서 보냅니다. 아, 아무래도 과외를 못할것 같습니다.

'쌤도 오늘 안그래도 배도 갑자기 아프고 컨디션 안 좋은데, 그럼 오늘 그냥 파토내고 주말에 보충할까?'

저때메 일부러 그러시는건 아니죠 전 진짜 괜찮아요. 사양의 대답에서도 역시 묘한 기대감이 읽힙니다. 그래 때려치고 놀아라. 노는게 남는거지 아냐 나도 오늘 컨디션이 좀 안 좋아 진짜로, 토요일에 시간 괜찮아? 그렇게 주말 보충 약속을 잡고 아까처럼 애를 데리고 다시 집에서 나왔습니다. 무슨 은인이라도 대접한듯이 아파트 출구까지 배웅해주러 오려고 하길래 괜찮다며 얼른 놀러가라고 만류합니다. 아 맞다 용돈 줘야지, 근데 또 안 받더라구요. 야 괜찮아! 이거 니 사실 엄마돈이야! 제가 가지고 있는 돈도 사실 엄마돈이에요. 형제가 참 쌍으로 논리적이고 돈이 많구나.

그렇게 애를 보내고 나니, 신기하게 아마도 아팠던 배가 낫기 시작하더라구요. 부러워서 배가 아팠던건 아닌가보다. 얼른 수습하고 집에 가야겠다 싶어 누님께 전화를 드립니다.

'아 누님, 저에요. 지금 아파트인데 오늘 저도 컨디션이 안 좋고 여기 축제 비슷한거 하길래 걍 애들 놀으라고 나가 보냈어요. 이런 날 나가 놀게 해야지 성적도 더 잘 나와요. 이런거 한두번 간다고 성적 안 나올거 같으면 진작 공부 때려치고 뭐라도 딴거 하는게 나아요.

저도 놀다가라구요? 누님이라도 와서 놀아주셔야지 놀죠. 여기 아는 사람도 없는데 저 혼자 뭐하고 놀아요. 애들한테 나 수발 들으라고 하느니 걍 과외하는게 낫지. 오늘 빼먹은건 주말에 보충할게요. 고마우면 과외비나 좀 더 넣어줘요. 저 갑니다.'

통화를 마치고 나니 아파트 입구에 와 있었습니다. 돌아서서 다시 한번 사람들이 노는 모습을 봅니다. 아, 놀 판만 깔아주면 이렇게 신나게 잘 노는 한국 사람들인데, 명절도 좋고 회식도 좋지만, 이렇게 좀 더 부담없고 가볍게 함께 놀 수 있는 판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특정 지역에서 지역 홍보를 위해 거창하게 하는 그런거 말고, 딱 날짜 정해놓고 이날은 여기저기서 축제판이 벌어지는 그런거. 우리나라 사람들 진짜 그런거 판만 깔아주면 세계 어느 나라보다 재밌게 놀 수 있는, 음주와 가무의 달인들인데. 그런 생각.

뭐 정작 이렇게 생각하는 저는 당시 놀 수 있는 심적 시간적 여유가 없었기에, 아쉽게도 축제를 배경으로 셀카 한장을 찍는것으로 그 자리를 뒤로 하고 나왔습니다. 원래 글 막바지에 그때 찍은 셀카를 첨부하려고 했는데, 실연의 충격으로 폰 데이터 막 날리고 그럴때 낑겨들어가서 지워졌는지 사진이 없네요.

여튼 보통 애들은 놀면서 크는거란 얘길 하지만, 사실 어른도 놀면서 늙고, 노인이 되어서도 놀면서 마지막을 준비하는게 저는 사람다운 삶이라 생각해요. 우리나라보다 못살거나 비슷하게 사는 나라중에 축제가 자연스럽게 문화에 녹아들어서 하나의 공유하는 컨텐츠가 된 나라들이 많은데, 저는 우리나라도 그렇게 됐으면 좋겠어요.

지금은 저 당시에 비해 할로윈 같은것도 좀 커지고, 무엇보다 지역축제도 많이 활성화되고 예선도 빨아먹고 하고 있지만, 정말 제가 생각하는 놀자판에는 질적으로 아직 한참 못 미쳐요. 우린 여전히 배고픕니다. 살기 빡빡한 세상이지만, 그럴수록 더 억지로 놀 판을 깔아줘야 사람들이 놀 수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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