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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19/03/01 00:44:51 |
Name | 알료사 |
File #1 | reading_20190301_004409_000_resize.jpg (45.7 KB), Download : 11 |
Subject | 번역본에는 문체라는 개념을 쓰면 안되는가 |
'원서충' 이라는 말을 오늘 처음 봤어요 ; 소설은 모름지기 원서로 읽어야 제맛이지, 하는 독자들을 비꼬는 말 같아요. 오래된 떡밥이죠. 번역된 외국 소설을 필사한다고 하면 번역체 필사해봐야 아무 의미 없다는 사람들도 있고. 저는 여기에 대해 제 자신이 외국어를 모르기 때문이어서인지 몰라도 않이 그게 무슨 상관이야 라고 생각하는 입장이었지만 굳이 외국어 못하는거 자랑할 필요는 없기에 항상 쭈구리고 있다가 다른 커뮤니티에서 누군가가 질문한 글에 답변을 달다가 말이 좀 길어지게 되었는데 본의아니게 제 생각이 잘 정리된거 같아 옮겨봅니다. 댓글들이 많았었는데 제 의견과 거기에 반박하는 의견중 핵심적인 것만 추렸습니다. 질문자 : 번역본에는 문체라는 개념을 쓰면 안되나? 번역을 거치고 나면 느낄 수 없는 원문의 분위기도 있겠지만 거치고 나서도 문체라고 여길만한 요소들은 있지 않나. 전개해나가는 서술의 순서라든가 시점이라든가 서술의 대상으로 선택하는 작가의 방식이라든가. 번역을 하더라도 그 문장의 구성은 숨길 수 있는게 아니잖음? 나 : 되지. 누가 안된대? 질문자 : 아래 글에서 누가 <번역본에 어떻게 문체가 있음?> 하길래... 내가 단어의 정의 나 개념을 잘 모르겠어서... A : 번역하면 문체가 훼손되는 경우가 많지. 카뮈 이방인은 프랑스어 복합과거로 쓰였는데 한국어엔 없는 문법임. 모옌이나 마르케스가 쓰는 환상적인 문체도 한국어로 옮기면 거의 느낄 수가 없다. 한국어는 어휘가 미발달한 요소야. 나 : 훼손되면 훼손되는대로 그것도 엄연히 그 작가의 문체라고 생각함. 예를들어 원문이 훼손된 한국어판 백년의 고독이 있을 때, 다른 외국어 작가 번역판에서 그와 유사한 문체가 존재할 수 있는가? 하면 당연히 불가능하거든. 훼손되었더라도 그것은 <유일한 마르케스 한국어 번역판>이라는거고, 우리가 살면서 콜롬비아 언어를 배울 일이 없는 한 그것을 마르케스의 문체라 단정지어도 무슨 문제가 있느냐는 거지. 우리가 접할 수 있는 마르케스는 오직 그거 하나뿐인데. A : 훼손된 문체도 문체면 그건 번역가의 문체지. 훼손된 문체를 만든 건 번역가니까. 작가가 전혀 개입하지 않고 원문의 문체와 구분되는 별개의 문체가 탄생했는데 그게 어떻게 작가의 문체냐? 나 : 번역가 아무개가 각각 마르케스와 카프카와 조이스를 번역했으면 그 세 작품의 문장들이 모두 번역가 아무개의 문체라고 할 수 있음? 그건 불가능해. 각각의 작가를 번역할 때 아무리 번역가 아무개의 영향력이 크다 해도 결국 가장 큰 바탕이 되는건 원작가가 누구인가 하는거고, 그 번역을 통해서만 해당 작품을 읽을수밖에 없는 독자에게는 사실상 각각의 원작가의 문체로 받아들여도 된다고 생각함. A : 문체가 무슨 뜻인지 모르는거 아냐? 난 번역하면 문체가 지워진다고 한 적 없어. 나 : ok. 그럼 됐음. 나도 그 정도 이상의 의미로 주장하는건 아님. B : 죄와벌만 해도 국내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수많은 번역이 존재하는데 이런 번역본을 읽고 도끼 문체를 왈가왈부하는건 코끼리 본적 없는 사람이 코끼리에 대해 말하는거야. 어디까지나 원서가 있고 번역이 있는거. 번역자는 많은 원서를 접하면서 어떻게 번역해야 좋을지 매번 고민할거고, 거기서부터 번역은 원서와 결이 달라. 2차 가공된거야. 번역가가 원서의 문체를 흉내내서 원서의 뉘앙스를 살렸다고 그걸 원저자의 문체라고 할 수 있어? 나 : 세상의 모든 사물은 생명체의 눈에 있는 그대로 비치지 않아. 빛과 망막의 왜곡이 반드시 끼어들게 돼. 나무에서 사과가 떨어지는 모습을 뱀과 댕댕이와 인간이 같은 자리에서 똑같이 보았다고 해도 그 셋에게 비치는 모습은 전부 달라. 하지만 그것이 다르다고 해도 그 셋이 본 것은 분명 나무에서 사과가 떨어지는 광경인것만은 분명해. 죄와벌은 번역의 왜곡이 없는 다른 경로를 통해서는 절대로 한국인의 의식에 닿을 수 없어.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우리가 러시아어를 배울 이유가 없다는 전제 하에) 그럼 우리가 유일하게 접할 수 있는 죄와벌을 바로 코앞에 두고 이것은 번역본이기 때문에 도끼의 문체가 아니라고 한다는건 코끼리와 마주해서 빛과 망막의 왜곡 때문에 이건 진짜 코끼리가 아니라고 말하는 거랑 뭐가 다르냐 이거지. 흉내내서 살린거라기보다는 현실적으로 가능한 한도에서 최대한 그대로 옮긴거잖아. 흉내하고는 좀 다르다고 생각함. 하지만 반드시 예 / 아니오 라는 대답을 요구한다면 나도 아니오라고 할수밖에 없긴 해. 결국 내가 처음에 말했던것도 <왜곡>을 인정한 상태에서 <해당 나라의 언어를 습득하는 것이 불가능한 독자에게>라는 가정을 붙인거니까 주장을 끝까지 밀고가기에는 한계가 있다는걸 인정. 여기까지고, 아래로는 움베르트 에코의 <움베르트 에코를 둘러싼 번역 이야기>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전 세계의 독자 가운데 90%는 전쟁과 평화를 번역으로 읽었지만 중국인, 영국인, 이탈리아인 세 사람이 전쟁과 평화를 논하기 위해 마주하게 되었다면 전원은 안드레이 공작이 죽었다는 것에 동의할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미묘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톨스토이에 의해 표현된 도덕적 원리를 기꺼이 인정할 것이다. 번역은 기본적으로 부정확한 현상이다. 완전한 동의어가 존재하지 않는 이상 번역은 불가능한 원리에 따른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엄격한 논리적 검증에 비추어 보면 완벽한 커뮤니케이션이라는 것도 마찬가지로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커뮤니케이션은 이론상으로는 불완전하지만 실천상으로는 잘 실현된다. 번역의 불완전성이라는 것은 다른 모든 커뮤니케이션 행위에 내포된 정도와 별 다른 것도 아니다. . . . 장미의 이름 영어판의 번역은 모든 나라 판본 중에서도 언론에 의해 백미로 평가받고 있는데 영어판의 번역에는 원서와 비교했을 때 무수한 생략과 누락이 발견된다. 이러한 사실의 발견에도 영어판 번역에 대한 평가는 흔들리지 않는다. 번역에서 가장 중요한, 원작자의 단호한 스타일과 예술적 개성을 효과적으로 전달했기 때문이다.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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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작품의 번역은 제2의 창작이라고 흔히들 그러죠. 번역작품의 문체는 정도에 따라 다르지만 번역가의 문체로 봐야 하겠지만, 원작자의 문체로 오독하는 일이 종종 발생해서 그런것 같습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한강의 '채식주의자' 영역본만 봐도 그렇고...
한 작품 분석은 그 작품이 쓰여진 언어에 기반해서 이뤄져야 하고, 그 작품이 탄생한 작은 맥락에서의 해석이 이뤄져야 한다고 봅니다. 넒은 맥락에서의 분석은 그 다음 일이라고 봐요. 기존 틀을 '해체'하는건 좋은데, 원본의 의도는 알고 해체해야지 무작정 해체한다고 덤벼드는건 원작... 더 보기
한 작품 분석은 그 작품이 쓰여진 언어에 기반해서 이뤄져야 하고, 그 작품이 탄생한 작은 맥락에서의 해석이 이뤄져야 한다고 봅니다. 넒은 맥락에서의 분석은 그 다음 일이라고 봐요. 기존 틀을 '해체'하는건 좋은데, 원본의 의도는 알고 해체해야지 무작정 해체한다고 덤벼드는건 원작... 더 보기
문학작품의 번역은 제2의 창작이라고 흔히들 그러죠. 번역작품의 문체는 정도에 따라 다르지만 번역가의 문체로 봐야 하겠지만, 원작자의 문체로 오독하는 일이 종종 발생해서 그런것 같습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한강의 '채식주의자' 영역본만 봐도 그렇고...
한 작품 분석은 그 작품이 쓰여진 언어에 기반해서 이뤄져야 하고, 그 작품이 탄생한 작은 맥락에서의 해석이 이뤄져야 한다고 봅니다. 넒은 맥락에서의 분석은 그 다음 일이라고 봐요. 기존 틀을 '해체'하는건 좋은데, 원본의 의도는 알고 해체해야지 무작정 해체한다고 덤벼드는건 원작에 대한 오독을 낳는게 아닐까 싶어요.
아마 '원서충' 소리를 들어 마땅한 이들은 번역의 가치에 대한 맹목적 무시를 나타내는 무지한 이들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역서에 대한 존중은 갖되 원작에 대한 깊은 이해를 추구한다면 당연히 원서를 읽는건 필수겠지만 말이죠.
한 작품 분석은 그 작품이 쓰여진 언어에 기반해서 이뤄져야 하고, 그 작품이 탄생한 작은 맥락에서의 해석이 이뤄져야 한다고 봅니다. 넒은 맥락에서의 분석은 그 다음 일이라고 봐요. 기존 틀을 '해체'하는건 좋은데, 원본의 의도는 알고 해체해야지 무작정 해체한다고 덤벼드는건 원작에 대한 오독을 낳는게 아닐까 싶어요.
아마 '원서충' 소리를 들어 마땅한 이들은 번역의 가치에 대한 맹목적 무시를 나타내는 무지한 이들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역서에 대한 존중은 갖되 원작에 대한 깊은 이해를 추구한다면 당연히 원서를 읽는건 필수겠지만 말이죠.
번역 과정을 거치면 번역가의 문체가 되는 게 맞습니다. 위 논쟁에서, 그리고 아래 <움베르트 에코를 둘러싼 번역 이야기>에서 알료사님이 말씀하시는 건 문체가 아니에요. 문체를 가다듬기 위해 번역본을 필사한다는 건 확실히 우스꽝스러운 짓이 맞고요. 애초에 문체를 가다듬는다는 게 [저자의 모국어란 틀 속에서]란 조건이 전제된 개념이니까요.
필사는 글쓰기 교정에서도 곧잘 쓰이지요. 타인의 글을 받아쓰는 과정에서 상황과 맥락에 맞는 어휘와 표현이 무엇인지 체득하기 때문입니다. 이때 ... 더 보기
필사는 글쓰기 교정에서도 곧잘 쓰이지요. 타인의 글을 받아쓰는 과정에서 상황과 맥락에 맞는 어휘와 표현이 무엇인지 체득하기 때문입니다. 이때 ... 더 보기
번역 과정을 거치면 번역가의 문체가 되는 게 맞습니다. 위 논쟁에서, 그리고 아래 <움베르트 에코를 둘러싼 번역 이야기>에서 알료사님이 말씀하시는 건 문체가 아니에요. 문체를 가다듬기 위해 번역본을 필사한다는 건 확실히 우스꽝스러운 짓이 맞고요. 애초에 문체를 가다듬는다는 게 [저자의 모국어란 틀 속에서]란 조건이 전제된 개념이니까요.
필사는 글쓰기 교정에서도 곧잘 쓰이지요. 타인의 글을 받아쓰는 과정에서 상황과 맥락에 맞는 어휘와 표현이 무엇인지 체득하기 때문입니다. 이때 [상황과 맥락에 맞는 어휘와 표현]을 판단하는 기준은 무엇일까요? 당연히 저자의 모국어입니다. 정확히는 특정한 어휘와 표현이 기존 언어에서 어떻게 쓰이는지요. 딱히 작가지망생이라고 문학 작품만을, 기자지망생이라고 기사만을 필사하지 않는 이유도 마찬가지고요. 모국어의 범위와 틀을 체득하는 게 먼저니까요. 특유의 문체나 그 문체의 미감은 저 모국어란 틀 위에서 성립하는 겁니다. 어떤 작가의 개성적인 표현이 개성적인 이유는 그 표현이 기존 한국어 표현의 용례에서 다소 벗어나기 때문입니다. 더불어 그 개성적인 표현이 작가 고유의 미감으로 인정되는 건 그 작가가 글 속에서 용례에 비추어 벗어난 표현과 벗어나지 않은 표현을 적절한 비율과 리듬에 맞추어 배치했기 때문일 테고요.
한국어와 달리 어휘와 개념이 풍부한 영미권 작가들은 말놀이의 어감을 중시합니다. 수백년 전의 셰익스피어든 오늘날의 살만 루시디든 이 점은 마찬가지죠. 그리고 그 규칙성을 어떻게 준수하고 때로는 어떻게 파괴하는지가 바로 작가의 문체지요. 하지만 그걸 한국어로 옮겨올 때, 대체 준수는 무엇이며 파괴는 또 무엇이겠습니까. 문체를 논함에 있어 '번역이 원문을 왜곡했다'란 말은 부적절합니다. 왜곡이 아니에요. 아예 기준이 다른데요.
화려하고 다채로운 색감이 장점인 미술 작품을 전혀 다른 색으로 바꾼다고 생각해봅시다. 그래도 예술은 예술이고 감상자는 나름의 심미성을 느낄 것입니다. 하지만 다른 건 몰라도 특유의 색감에 있어, 원저자가 표현하고자 했던 바를 느낀다고 말하는 건 거짓입니다. 어떤 영화의 한 장면에서 채도와 명도를 아예 다른 식으로 바꾸어서 관객에게 보여준다고 해볼까요. 전 그 관객이 거짓된 영화를 봤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미쟝센'이란 표현을 쓰는 건 어불성설이라고 생각합니다.
클래식팬들이 돈 들여서 공연장을 찾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래도 마이크와 스피커를 경유한 소리는 실제 홀에서 울려퍼지는 음향과 다르니까요. 어떤 팬이 1920-30년대의 열악한 음원 파일을, 음악감상용으로 적절치 못한 pc방 사운드바로 들은다고 생각해보죠. 저 역시 같은 경험이 있고 그 또한 즐거운 예술 경험이긴 했습니다만, 그래도 이걸 기준으로 제가 들었던 연주자나 연주 단체의 '음색'을 말한 적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문학가에 있어 문체란 연주자의 음색보다도 훨씬 복잡하고 까다롭습니다.
바흐는 건반 악기를 위해 참 많은 곡을 썼는데요. 어찌나 많은지 바흐만을 전문적으로 파고 드는 피아니스트도 많답니다. 하지만 현대의 피아니스트가 바흐가 구상한 음색을 표현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아뇨, 불가능합니다. 그 연주자가 피아노를 다루는 피아니스트인 이상 어쩔 수 없습니다. 왜냐면 바흐 당대에 현대와 같은 그랜드 피아노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 하프시코드나 쳄발로가 아닌 그랜드 피아노로 연주를 하면서 '바흐가 추구한 음색' 운운하는 건 그냥 헛소리에요. 생전에 포르테피아노조차 몇 번 접해보지 못한 사람이 어떻게 오늘날로 구현된 피아노의 음색을 추구하고 말고 할 수 있을까요. 단지 연주자들 자신의 해석이 있을 뿐이고, 그 해석이 또 하나의 세계를 만드는 거죠.
필사는 글쓰기 교정에서도 곧잘 쓰이지요. 타인의 글을 받아쓰는 과정에서 상황과 맥락에 맞는 어휘와 표현이 무엇인지 체득하기 때문입니다. 이때 [상황과 맥락에 맞는 어휘와 표현]을 판단하는 기준은 무엇일까요? 당연히 저자의 모국어입니다. 정확히는 특정한 어휘와 표현이 기존 언어에서 어떻게 쓰이는지요. 딱히 작가지망생이라고 문학 작품만을, 기자지망생이라고 기사만을 필사하지 않는 이유도 마찬가지고요. 모국어의 범위와 틀을 체득하는 게 먼저니까요. 특유의 문체나 그 문체의 미감은 저 모국어란 틀 위에서 성립하는 겁니다. 어떤 작가의 개성적인 표현이 개성적인 이유는 그 표현이 기존 한국어 표현의 용례에서 다소 벗어나기 때문입니다. 더불어 그 개성적인 표현이 작가 고유의 미감으로 인정되는 건 그 작가가 글 속에서 용례에 비추어 벗어난 표현과 벗어나지 않은 표현을 적절한 비율과 리듬에 맞추어 배치했기 때문일 테고요.
한국어와 달리 어휘와 개념이 풍부한 영미권 작가들은 말놀이의 어감을 중시합니다. 수백년 전의 셰익스피어든 오늘날의 살만 루시디든 이 점은 마찬가지죠. 그리고 그 규칙성을 어떻게 준수하고 때로는 어떻게 파괴하는지가 바로 작가의 문체지요. 하지만 그걸 한국어로 옮겨올 때, 대체 준수는 무엇이며 파괴는 또 무엇이겠습니까. 문체를 논함에 있어 '번역이 원문을 왜곡했다'란 말은 부적절합니다. 왜곡이 아니에요. 아예 기준이 다른데요.
화려하고 다채로운 색감이 장점인 미술 작품을 전혀 다른 색으로 바꾼다고 생각해봅시다. 그래도 예술은 예술이고 감상자는 나름의 심미성을 느낄 것입니다. 하지만 다른 건 몰라도 특유의 색감에 있어, 원저자가 표현하고자 했던 바를 느낀다고 말하는 건 거짓입니다. 어떤 영화의 한 장면에서 채도와 명도를 아예 다른 식으로 바꾸어서 관객에게 보여준다고 해볼까요. 전 그 관객이 거짓된 영화를 봤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미쟝센'이란 표현을 쓰는 건 어불성설이라고 생각합니다.
클래식팬들이 돈 들여서 공연장을 찾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래도 마이크와 스피커를 경유한 소리는 실제 홀에서 울려퍼지는 음향과 다르니까요. 어떤 팬이 1920-30년대의 열악한 음원 파일을, 음악감상용으로 적절치 못한 pc방 사운드바로 들은다고 생각해보죠. 저 역시 같은 경험이 있고 그 또한 즐거운 예술 경험이긴 했습니다만, 그래도 이걸 기준으로 제가 들었던 연주자나 연주 단체의 '음색'을 말한 적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문학가에 있어 문체란 연주자의 음색보다도 훨씬 복잡하고 까다롭습니다.
바흐는 건반 악기를 위해 참 많은 곡을 썼는데요. 어찌나 많은지 바흐만을 전문적으로 파고 드는 피아니스트도 많답니다. 하지만 현대의 피아니스트가 바흐가 구상한 음색을 표현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아뇨, 불가능합니다. 그 연주자가 피아노를 다루는 피아니스트인 이상 어쩔 수 없습니다. 왜냐면 바흐 당대에 현대와 같은 그랜드 피아노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 하프시코드나 쳄발로가 아닌 그랜드 피아노로 연주를 하면서 '바흐가 추구한 음색' 운운하는 건 그냥 헛소리에요. 생전에 포르테피아노조차 몇 번 접해보지 못한 사람이 어떻게 오늘날로 구현된 피아노의 음색을 추구하고 말고 할 수 있을까요. 단지 연주자들 자신의 해석이 있을 뿐이고, 그 해석이 또 하나의 세계를 만드는 거죠.
알료사님께서 클래식을 들으셨다면 이야기가 쉬울 거 같은데, 같은 지휘자, 혹은 같은 연주자라도 다루는 악단과 악기, 작곡가에 따라 음색을 달리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한편 곡에 따라 연주자들마다 유사한 음색을 추구하는 작곡가가 있는 반면, 그 해석의 자유도가 굉장히 높은 곡들도 있지요. 연주자에 따라 어울린다,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곡이 있고요. 알료사님이 발견하셨다는 헤밍웨이와 피츠제럴드가 알료사님께서 원문을 직접 읽으며 느낀 그것과 같은지 저는 모르겠습니다만, 만약 같다고 한다면 아마 이런 이유가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더 보기
알료사님께서 클래식을 들으셨다면 이야기가 쉬울 거 같은데, 같은 지휘자, 혹은 같은 연주자라도 다루는 악단과 악기, 작곡가에 따라 음색을 달리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한편 곡에 따라 연주자들마다 유사한 음색을 추구하는 작곡가가 있는 반면, 그 해석의 자유도가 굉장히 높은 곡들도 있지요. 연주자에 따라 어울린다,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곡이 있고요. 알료사님이 발견하셨다는 헤밍웨이와 피츠제럴드가 알료사님께서 원문을 직접 읽으며 느낀 그것과 같은지 저는 모르겠습니다만, 만약 같다고 한다면 아마 이런 이유가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헤밍웨이나 피츠제럴드는 제가 앞서 언급한, 셰익스피어나 살만 루시디와 같은 식의 말놀이를 즐기는 예술가는 아니니까요. 국내에 번역된 셰익스피어를 무대에서 올릴 때면 알기 쉬운데, 셰익스피어는 대사를 시처럼 써서 특유의 운율과 독법이 있습니다. 그래서 언뜻 오페라와 같은 효과를 주는데 이건 아무래도 국내 연극에서는 노력은 하지만, 충분히 살리기 어려운 부분이죠. 오늘날에도 오페라는 어지간하면 자막을 다는 한이 있어도 원어로 내보내는 것과 비슷한 이치랄까요.
아.. 제가 음악을 잘 안들어서.. 근데 어떤 식으로 이해해야 하는지는 좀 감이 잡히네요. 음악 연주에서의 자유도와 번역에서의 자유도가 비슷한지는 쪼금 갸우뚱 하지만 어쨌든간에..
써주신 댓글을 계속 읽어보니 제가 문체라는 개념에 대해 다시 생각해봐야 하나 싶네요. 저는 이제까지 단어들의 집합인 문장에서 의미를 중심으로 느껴지는 스타일 같은걸 문체라고 생각했었거든요. 그래서 '모로 가도 의미만 통하면 된다, 그 과정에서 스타일만 살아 있으면 된다' 라는 결론이 나왔던건데, 말놀이나 운율의 관점에서 본다면 얘기가 아주 달라지는건 맞는듯 합니다.
써주신 댓글을 계속 읽어보니 제가 문체라는 개념에 대해 다시 생각해봐야 하나 싶네요. 저는 이제까지 단어들의 집합인 문장에서 의미를 중심으로 느껴지는 스타일 같은걸 문체라고 생각했었거든요. 그래서 '모로 가도 의미만 통하면 된다, 그 과정에서 스타일만 살아 있으면 된다' 라는 결론이 나왔던건데, 말놀이나 운율의 관점에서 본다면 얘기가 아주 달라지는건 맞는듯 합니다.
음악 연주에서 자유도가 당연히 훨씬 풍부하죠. 그 자유도와 개성을 바탕으로 성립된 시장이니까요. 다만 연주에도 저런 제약이 있는데 번역은 오죽하겠느냐는 이야기입니다z
번역 문학에 문체가 존재하느냐: YES
그 문체는 누구의 것이냐: 간단치 않음.
이렇게 생각합니다. 번역 문학에서는 문체에 대해 수입, 생성, 변조, 감쇄가 동시에 일어난다고 봐요.
그래서 알료사님의 말씀 중 재밌었던 것은 [우리가 살면서 콜롬비아 언어를 배울 일이 없는 한 그것을 마르케스의 문체라 단정지어도 무슨 문제가 있느냐는 거지. 우리가 접할 수 있는 마르케스는 오직 그거 하나뿐]이라는 지점입니다.
이는 제게 곧 "마르케스"와 "Márquez"를 구분하겠다는 것으로 들... 더 보기
그 문체는 누구의 것이냐: 간단치 않음.
이렇게 생각합니다. 번역 문학에서는 문체에 대해 수입, 생성, 변조, 감쇄가 동시에 일어난다고 봐요.
그래서 알료사님의 말씀 중 재밌었던 것은 [우리가 살면서 콜롬비아 언어를 배울 일이 없는 한 그것을 마르케스의 문체라 단정지어도 무슨 문제가 있느냐는 거지. 우리가 접할 수 있는 마르케스는 오직 그거 하나뿐]이라는 지점입니다.
이는 제게 곧 "마르케스"와 "Márquez"를 구분하겠다는 것으로 들... 더 보기
번역 문학에 문체가 존재하느냐: YES
그 문체는 누구의 것이냐: 간단치 않음.
이렇게 생각합니다. 번역 문학에서는 문체에 대해 수입, 생성, 변조, 감쇄가 동시에 일어난다고 봐요.
그래서 알료사님의 말씀 중 재밌었던 것은 [우리가 살면서 콜롬비아 언어를 배울 일이 없는 한 그것을 마르케스의 문체라 단정지어도 무슨 문제가 있느냐는 거지. 우리가 접할 수 있는 마르케스는 오직 그거 하나뿐]이라는 지점입니다.
이는 제게 곧 "마르케스"와 "Márquez"를 구분하겠다는 것으로 들렸어요. 좀 말장난 같지만, "마르케스"의 문체가 번역본에는 있는 것이죠. 이건 번역가 모모의 문체라고 할 수도 없을 것이고 "Márquez"의 것이라고 할 수도 없을 겁니다. "마르케스"라는 한국어 저자명은 스페인어를 쓰는 "Márquez"와 한국어를 쓰는 번역자 모모가 혼재된 무엇인 것이고, 이 바탕엔 문체를 작가라는 실체적 인격체에 귀속시킬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있는 듯해요.
그 문체는 누구의 것이냐: 간단치 않음.
이렇게 생각합니다. 번역 문학에서는 문체에 대해 수입, 생성, 변조, 감쇄가 동시에 일어난다고 봐요.
그래서 알료사님의 말씀 중 재밌었던 것은 [우리가 살면서 콜롬비아 언어를 배울 일이 없는 한 그것을 마르케스의 문체라 단정지어도 무슨 문제가 있느냐는 거지. 우리가 접할 수 있는 마르케스는 오직 그거 하나뿐]이라는 지점입니다.
이는 제게 곧 "마르케스"와 "Márquez"를 구분하겠다는 것으로 들렸어요. 좀 말장난 같지만, "마르케스"의 문체가 번역본에는 있는 것이죠. 이건 번역가 모모의 문체라고 할 수도 없을 것이고 "Márquez"의 것이라고 할 수도 없을 겁니다. "마르케스"라는 한국어 저자명은 스페인어를 쓰는 "Márquez"와 한국어를 쓰는 번역자 모모가 혼재된 무엇인 것이고, 이 바탕엔 문체를 작가라는 실체적 인격체에 귀속시킬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있는 듯해요.
알료사님 소설 읽으시다가 가끔 "이 사람"이 번역하지 않았으면 어떻할뻔 했나 싶은 순간이 있지 않으셨나요. 저는 있었어요. 그리고 그는 동시에 뛰어난 작가이기도 해서 이 맛깔난 번역의 덕을 봤다는 생각이 든 적이 있거든요. 그리고 번역된 그이의 책은 딱 그이의 소설에서 느낄수 있는 언어의 결이 느껴졌었어요. 저는 영어원서를 가끔 읽기는 합니다만, 전문적인 번역가들의 번역을 보면 제가 전체적인 맥락은 이해했으되, 마치 너무 삶아서 향을 잃어버린 봄나물마냥 그 향이 날아가버렸다는 생각이 들때가 있어요. 좋은 번역가의 번역은 그의 것입니다. 단 좋은 번역일때만요.
사실 다른 언어를 배우더라도 바이링궐 수준이 아닌 한 결국 우리 말로 번역되는 과정을 거친 다음 읽히기 때문에 번역문을 보나 원문을 보나 거의 똑같이 다가올 수 밖에 없는 것 같아요.
다른 나라 말의 단어 하나의 이미지를 알기도 너무나 어렵기 때문에, 우리말은 바로 이미지로 들어오지만 외국어는 (많은 경우) 우리말로 번역된 뒤에야 이미지로 들어오죠.
즉 영어를 줫나 잘하면 문체가 달라보일 수 밖에 없지 않을까란 생각이에요. 언어의 결부터가 처음부터 다르니까요. 번역본을 먼저 접함으로써 생각이 굳어진 점도(오염된?) 무시할 수 없을거 같구요.
다른 나라 말의 단어 하나의 이미지를 알기도 너무나 어렵기 때문에, 우리말은 바로 이미지로 들어오지만 외국어는 (많은 경우) 우리말로 번역된 뒤에야 이미지로 들어오죠.
즉 영어를 줫나 잘하면 문체가 달라보일 수 밖에 없지 않을까란 생각이에요. 언어의 결부터가 처음부터 다르니까요. 번역본을 먼저 접함으로써 생각이 굳어진 점도(오염된?) 무시할 수 없을거 같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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