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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8/07/03 15:54:57
Name   Tikas
Subject   S의 부친상에 부치는 글
오전 반차를 써서 2시 까지만 출근하면 됐지만, 잠이 오지 않아서 뒤척이다 대충 씻고 출근하니 1시를 막 넘긴 시간이다. 아침에 운전해서 대전에 돌아오느라 커피를 마신 것이 문제였을 것이다. 그래도 새벽에 몇 시간 정도는 눈을 붙여서인지, 몸은 피곤하지만 정신은 묘하게 또렷하였다. 원래 오늘까지 마무리해야 했던 일이 있었기에, 바로 커피 한잔을 내려서 자리에 앉았다.

"먼길 와줘서 정말로 고마워"

S 다운 말투였다. 카톡을 본 지는 수 시간 전이지만, 나는 아직 1만 지운 채 아무 답장을 보내지 못하고 있었다.

---

"여러분, 몇몇 분들께는 말씀드렸었지만 아버지께서 백혈병으로 투병 중에 계시다가..."

분주한 월요일 아침, 출근해서 폰을 열어보니 단톡방에 톡이 하나 도착해 있었다. 그리고 이어진 위로의 말들. 곧 이어 A에게서 톡이 왔다.

어떻게 갈 예정이냐.
내 차로 움직이는게 나을 것 같다. 되는 사람들 몇 명 해서 같이 올라가자.
너는 알고 있었냐. 아버님이 투병 중인거.
몰랐다. 원래 이런거 잘 얘기 안하던 녀석이지 않냐.

그래도 내심 서운한 감정이 옅게 깔렸다. 우리한테도 얘기 안한건 무어냐, 그런 생각이 들다가도 무슨 사연이 있겠거니, 생각했다.

퇴근 후 도착한 빈소에 S는 국화로 된 상주 명찰을 차고 있었다. 몸에 맞지 않게 큰 양복을 입은 녀석의 표정은 평소의 S와 다르지 않았다. 투병 중에 돌아가셨으니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겠구나, 생각했다. 하지만 그 녀석의 표정, 맞지 않는 옷, 가슴의 새하얀 국화가 너무나도 생경하여, 나는 같이 온 친구들과 함께 맞절을 해야 하는 것도 까먹은 채 그냥 혼자서 인사를 해버리고 말았다.

많은 조문객들이 다녀가고, 늦은 밤이 되서야 숨을 돌린 상주와 앉아서 얘기했다.

"언제부터 투병하셨어?"
"입원한지 2주 만에 돌아가셨어."

생각보다 짧은 투병기간과, 연명치료를 원치 않으시던 고인의 의지와, 소천 직전의 사랑하는 이들을 향한 마지막 인사까지. 담담하게 이야기하던 녀석의 표정은 아버지의 삽관제거를 이야기하는 순간 미간이 살짝 구겨지며, 눈시울이 붉어졌다.
"생전에도 성질 급하던 분인데, 갈 때도 이렇게 가시더라."
하지만 이내 고인의 목사로써의 삶을 이야기해주다가, 다른 조문객이 와 자리를 떴다.

"나는 S가 그렇게 크게 우는 걸 처음 봤어"
B가 말했다. 같이 안 10년 가까운 세월동안, 우는 모습을 보인 적이 없던 S였다. 고인이 돌봐주시던 교회 친구들이 있었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계속 지켜주던 친구들이었단다. 하지만 작은 개척 교회여서일까, 다른 이유에서일까 하나둘 연락이 끊기기 시작했단다. 고인께서 마지막 순간에 보고싶어 했다고 한다. 그 친구들이 빈소를 방문했을 때, 장을 치르는 마지막까지 울지 않기로 다짐했던 녀석이 무너졌단다.

---

오피스 책상에 앉아서 내린 커피를 다 마실 때까지 아무 답장을 하지 못했다.
나는 빈 텀블러에 다시 커피를 내렸다. 몇 번이나 쓰고 지운 카톡 메시지 창에, 결국 나는 가장 사랑하는 친구에게 기도하겠다는 상투적인, 그러나 진심을 담은 위로의 말을 건넬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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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의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에, 나중에 글을 삭제할 수도 있음을 먼저 말씀드립니다.
    가족을 잃은 이들에게는 말한마디 건네는게 참 조심스럽고 어렵더라구요.
    제 또래의 친구들 중에서는 처음으로 겪는 부친상이라 더 마음이 쓰이더라구요. 누구나 겪는 일이라지만, 그렇다고 그 슬픔이 감해지는 건 아니라는 걸 새삼 느낍니다..
    즐겁게
    화려하지도 성의 없지도 않게, 진심이 담긴 말을 전하려다 보면 표현을 찾기 힘들어요. 그래서 결국 뻔함 말이라도 찾게 되나봅니다.
    2
    저도 그 친구도 개신교인이어서, 서로의 힘든 일을 알게 되었을 때 항상 하는 말이 '기도할게' 였습니다. 한동안은 저 말이 그냥 인삿말이랑 뭐가 다른가 싶어서 의도적으로 거르면서, 다른 위로의 말을 건네곤 했습니다.

    근데 정말로 어제는 다른 말을 찾을 수가 없더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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