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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18/06/03 03:11:37 |
Name | 호타루 |
Subject | 작전과 작전 사이 (8) - 당랑거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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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병사들의 싸울 의지가 퇴로가 없다고 어디서 생겨나는 것도 아니고, 교두보로 적합한 위치는 더더욱 아니었다는 거죠(위에서 언급한 바 있습니다). 배수진의 고사가 있기는 합니다만 그것도 정도껏이지... 아무튼 일이 이렇게 되자 탈출도 안되겠다, 내부 병력은 자꾸 위험해져만 가고 뭔가 방법을 찾아야 했는데, 뜻밖에도 영국 항공전 내내 털려대서 체면을 와장창 구겼던 독일 공군이 대활약을 했습니다. 지금의 라트비아와 러시아의 경계선에 있는 프스코프(Pskov)에서 발진한 항공기가 수송물자를 들고 데미얀스크에 착륙해서 부상병을 실어 다시 프스코프로 귀환하는, 바로 공중수송이었죠. 이게 정말 뜻밖에도 초대박을 친 겁니다. 물론 여기에는 상당한 운이 따랐습니다. 일단 이에 대응해야 할 소련군 공군이 지리멸렬 상태였고, 날씨도 무진장 좋았으며, 결정적으로 포위망 내에 제대로 된 비행장이 있엇습니다. 셋 중 하나라도 없었으면 실패하고도 남았겠죠. 이러고도 독일군은 사용 가능한 제1공군대(Luftflotte 1, 야전군급 스케일) 거의 전부를 탈탈탈탈 털어넣어야 했고, 손실도 상당히 컸습니다. 252대의 수송기가 날아갔다고 하는데, 차후에 독일군이 스탈린그라드에서 손실을 인정했던 수송기가 266대였다고 하니(소련측 주장은 600대 이상 격추) 하여간 손해가 막심한 건 확실했습니다. 하긴 멀쩡히 소련군이 눈 시퍼렇게 뜨고 감시하는 지역 위로 적의 수송기가 날아간다는데 그럼 그걸 보고 어디 손수건 흔들며 환영하겠습니까? 대공포로 환영하지... 그리고 소련군이라고 데미얀스크 포위망을 눈 뜨고 녹기만 기다리고 있던 것도 아니라서, 공수부대를 투입해 가면서 점령하려 애를 썼습니다. 이게 2월 15일 ~ 25일 사이의 일. 그런데 공수부대는 별반 뭘 하지도 못하고 엄청난 피해만 본 채 그대로 녹아버렸고, 이건 이후 스탈린이 공수부대에 별로 신경을 안 쓰는 - 정확히 말하면 공수부대의 사용 자체를 꺼리는 - 원인이 되죠. 양군을 괴롭혔던 것은 2월이 되면서 점차적으로 풀려 가는 날씨였습니다. 날씨가 좋고 기온이 올라가서 눈이 녹으면 뭐가 나오냐... 라스푸티차죠. 그리고 어디까지나 공수작전도 하루 이틀이지 천년만년 비행기를 띄울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 때문에 안쪽과 바깥쪽 양쪽에서 포위망을 찢어버리는 전략을 세우게 되고, 이게 먹힙니다. 물론 여기에도 공군의 역할이 컸습니다. 가용 근접항공지원기와 폭격기가 죄다 이 전역으로 몰려들어갔거든요. 이렇게 될 때까지 포위망을 좁히지 못하고 소련군의 진격과 공세가 더뎠던 것은 근본적으로 지형상의 문제와 보급 문제가 같이 터져버렸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인구가 많은 소련이라지만 병력이 뭐 실시간으로 충원됩니까? 아니죠. 병력과 물자의 손실과 보충 사이에는 항상 텀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이번 소련군에게 있어서 되도 않는 전 전선에서의 무리한 공세로 인해 이러한 보급 문제가 소련군의 큰 골칫덩이가 되었고, 결과적으로 어쩌면 손쉽게 섬멸했어야 할 데미얀스크 포위망조차도 섬멸하지 못하고 실패로 돌아간 것입니다. 그렇게 이 데미얀스크 포위전은 독일군, 정확히는 독일 공군의 승리로 갈무리됩니다. 물론 그렇다고 히틀러가 데미얀스크에 병력을 박아두라는 명령이 철회된 건 아니라서 이들은 1943년 2월까지 이런 좁은 틈을 바탕으로 보급을 주고받으며 뻗대고 있었습니다. 가뜩이나 늘어진 전선으로 인해 가용 병력이 줄어서 고심하던 독일군에게 결코 좋은 소리가 나올 리 없는 구상이었죠. 게다가 이 과정에서 입은 독일 공군의 손실이 커서 리처드 오버리의 경우 아예 피로스의 승리로 규정해버리더군요. 그리고 이 데미얀스크에서의 공방전은 히틀러에게 있어서 엄청나게 잘못된 교훈을 하나도 아니고 둘씩이나 남겼는데, 하나는 다들 짐작하셨다시피 후퇴불가 현지사수 명령으로 전선이 유지되었다는 강력한 믿음이었고(더구나 르제프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져서 이제 이에 대한 히틀러의 확신은 아예 맹종 수준이 되었습니다), 또 하나는 설령 이러한 포위망이 생겨도 충분히 독일 공군이 보급할 수 있다는 믿음이었습니다. 물론 스탈린그라드에서 문자 그대로 박살이 났던 것은 괴링의 되도 않는 호언장담이 큰 영향을 끼친 결과이기도 했습니다만, 근본적으로 그게 가능하다고 믿었으니까 히틀러도 작전을 실행했던 거죠. 일종의 의도하지 않은 큰 그림이 된 셈인데... 소련군으로서는 전화위복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데미얀스크 포위전을 위해 잃어버린 병사의 수(부상자 포함)가 독일군 5만, 소련군 25만이라 소련군의 입장에서도 재앙 맞기는 합니다만. 결국 소련군은 되도 않는 일에 매달린 덕분에 무모하게 여러 전선에서 지나치게 낙관론적인 작전을 펴다가 전쟁을 조금이라도 빨리 종결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일을 제대로 그르쳤고, 이걸 보고 또 자기 능력에 확신을 가진 히틀러는 얼마 안 가서 되도 않는 일에 매달리게 되는 것이죠. 참으로 아이러니한 장면입니다. 데미얀스크 포켓은 이렇게 마무리되었습니다. 이제 두 군데 남았군요. 세바스토폴과 하리코프. 제2차 하리코프 전투가 분량이 진짜 애매해서 아마 두 차례 정도 글을 더 쓰고 연재가 마무리될 듯 합니다. 마감날에 쫓기는 기분이 드니 확실히 키보드에 손이 가긴 가는군요. 어떻게든 7월 5일 전에는 끝내야 75주년을 맞으니...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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