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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8/05/10 00:21:15
Name   자일리톨
Subject   때늦은 <라이프 오브 파이> 리뷰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 믿음에 대한 믿음>


우리는 영어권에서 스토리(story)라고 부르는 것을 이야기로 번역한다. 영화에서 주인공 ‘파이’는 두 가지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1) 호랑이와 함께 바닷가 위에서 표류하다가 아무도 본적 없는 식충섬에 들려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이야기, 2) 프랑스인 요리사와 불교신자, 어머니와 함께 표류하여 식인과 살인을 저지르고 파이 혼자 살아남은 이야기. 과연 두 ‘이야기(story)’ 중 어느 쪽이‘사실(fact)’인가?

주의깊게 살펴보면, 누군가에 의해서 어떤 사건이 말해지는 순간 ‘사실’은 없고 오로지 ‘이야기’만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컨대 ‘나와 친구는 금전적 문제로 심하게 다투었다.’라는 문장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일견 이것은 ‘사실’로 보인다. 하지만 이것은 실제로 일어난 사건의 모든 것(truth)을 담고 있지 않다. 나와 그 친구는 순수하게 금전적인 이유로 다툰 것인가? 그 전의 사건들이 영향을 끼치진 않았는가? 실제로 오간 대화는 무엇인가? 그 대화 속에서 나와 친구가 느낀 감정은 무엇인가? 분노의 정도는 어느 정도였는가? 등등의 질문에 제기될 수 있다. 그래서 우리가 말하는 것에는 “항상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이 무엇인지’에 대해 빠짐없이 밝혀지지도 않을뿐더러 기술되지도 않는, 방대한 영역들이 여전히 남아”(패트릭 오닐, 이호 역, 『담화의 허구』, 예림기획, 2004, 67쪽.) 있다. 더 자세히 말한다 해도 사실에의 도달이라는 과정은 무한히 소급될 뿐 결코 완결되지 않는다. 일상에서 자주 사용되는 “어떤 사건의 시비를 판단할 때는 반드시 양쪽의 이야기를 들어봐야 한다”는 격언은, 언제나 ‘사실’에 도달할 수 없는 ‘이야기’의 특성을 가리키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파이의 이야기는 첫 번째와 두 번째 이야기 모두 ‘사실’이 아니다. 파이는 침몰된 배의 회사에서 파견된 조사관들이 첫 번째 이야기를 믿지 않자 두 번째 이야기를 들려준다. 만약 조사관들이 두 번째 이야기도 믿지 않았다면 세 번째 이야기를 들려주었을 것이다. 실제로 파이의 이야기는 무한대로 펼쳐질 수 있다. 세헤라자데가 천일동안 이야기를 했듯, 파이 역시 무한히 얘기할 수 있다. 자신의 이름 ‘파이(π)’가 유한한 숫자들로 이루어진 무한수인 것처럼, 그의 이야기 역시 유한한 언어로 지속되는 무한이다. 이런 점에서 어렸을 때 어머니가 들려주는 비슈누의 이야기, 즉 양어머니가 비슈누에게 입을 벌려보라고 했더니 우주가 들어있었더라는 이야기는 파이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파이의 입 속에는 무한한 우주가 담겨 있다. 이런 이야기의 특성에 대해 말하는 이 영화는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이야기는 필연적으로 ‘믿음’과, 궁극적으로는 ‘종교’와 연결된다. 어떤 이야기도 사실일 수 없다면 우리는 실제로 허구 속에서 살고 있다는 말이 된다. 하지만 우리는 그 허구 속에서 인간관계를 유지하고 실제의 삶을 살아간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우리가 이야기를 믿기 때문이다. 이것은 타인을 믿는다는 의미도 된다. 왜냐하면 이야기는 항상 누군가가 다른 누군가에게 전하기 위해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언어는 결코 인간과 분리되어 존재할 수 없다. 언어는 언제나 말하는 자와 듣는 자를 전제한다.

그런데 이때 타인은 어떤 존재인가? 타인은 언제나 나와 화합하는 존재인가? 타인은 언제나 내게 윤리적인 존재인가? 호랑이 ‘리처드 파커’가 보여주듯 타인은 언제나 나의 예상을 뛰어넘는다. 바닷가 위에서 200일가까이 생사고락을 함께 했음에도 불구하고, 멕시코 해안가에 도착하자 리처드 파커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숲 속으로 들어간다. 자연과 자연의 근원인 신도 마찬가지다. 폭풍우 속에서 신에게 “왜 내게 겁을 주십니까”라고 묻던 파이는 식충섬에 도착한다. 우주의 근원인 비슈누는 뱀 쉐샤(Shesha) 위에 누워 잠자고 있는데, 식충섬의 겉 모습은 이런 비슈누의 모습과 닮아 있다. 그런데 이 식충섬은 낮에는 풍요로운 자원을 제공하지만 밤이 되면 산성화되어 모든 생명체를 먹어치운다. 즉 신과 자연은 마냥 자비로운 존재가 아니다. 노자의 도덕경에는 “천지불인 이만물위추구/天地不仁 以萬物爲芻狗”라는 구절이 나온다. 천지는 인자하지 않으니, 마치 사람들이 짚으로 엮은 개를 대하듯이, 만물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는 뜻이다. 그래서 기독교의 야훼같은 인격신은 실제로는 ‘신’이 아니라 ‘인간’의 모습만을 투사할 뿐이다. 이 같은 이유로 파이의 아버지는 호랑이의 눈에 비치는 것은 호랑이가 아니라 너 자신이라고 파이를 호통쳤다. 호랑이, 인간, 신, 자연을 비롯한 모든 것은 나에게 타인이며, 나의 예상을 뛰어넘는 존재이다.

그렇다면 이런 존재들을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 타인에 대한 믿음은 리처드 파커에 대한 파이의 믿음과 같다. 파이는 리처드 파커와 함께 살아가고자 한다. 하지만 리처드 파커가 사람이 아닌 맹수라는 사실을 잊지 않는다. 자신은 언제든지 리처드 파커에게 잡아먹힐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대한의 노력을 쏟아부어 리처드 파커와 연대하고자 한다. 때로는 먹이로, 때로는 호통으로 리처드 파커에게 메시지(이야기)를 전달하려 한다. 하지만 자신의 메시지가 전해지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인다.

(나아가 파이가 들려준 이야기의 두 번째 버전이 1884년에 일어난 실제 사건에 기반해 있다는 점에서, 함께 표류한 존재가 호랑이가 아니라 설령 사람이었을지라도 이 영화가 전달하는 메시지는 달라지지 않는다. 1884년 대서양 위에서 표류한 인물들은 선장 토마스 더들리, 일등 항해사 에드윈 스티븐슨, 일반 선원 에드먼드 브룩스, 그리고 잡일을 담당한 17세 소년 ‘리처드 파커’였다. 세 명의 선원들은 리처드 파커를 죽여 식인을 함으로써 생존할 수 있었고, 구조된 이후 이들은 재판을 받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취재하러 온 소설가에게 두 버전의 이야기 중 어느 이야기가 맘에 드냐고 물은 뒤, 소설가가 첫 번째 이야기가 더 좋다고 하자 파이는 “신도 그러하지요”라고 대답한다. 신 혹은 종교는 인간에게 언제나 믿을 수 없는 형태로 메시지를 전달한다. 하지만 그 ‘믿을 수 없음’을 ‘믿음’으로 극복할 때 종교가 탄생한다. 소설가가 첫 번째 이야기가 ‘더 좋은 이야기(the better story)’라고 말한 것은 단순한 흥미로움 때문이 아니다. 두 번째 이야기는 첫 번째 이야기에 비해 믿을만한 이야기이다. 두 번째 이야기에는 ‘믿을 수 없음’이 없기 때문에 ‘믿음’ 역시 생겨나지 않는다. 그래서 소설가가 첫 번째 더 좋다고 이야기한 것은 파이에 대한 믿음을, 비유적으로는 파이가 상징하는 무한, 혹은 종교에 대한 믿음을 나타낸다.

이런 의미에서 ‘라이프 오브 파이’라는 제목은 역설적이다. 파이(π)가 무한한 것이라면, 생명(life)은 유한한 것이다. ‘무한한 것의 생명(Life of π)’이라는 제목은 유한과 무한이 별개의 것이 아니며, 오히려 유한 속에 이미 무한이 깃들어 있음을, 우리의 삶 속에 믿을 수 없는 것들이 항상 존재함을 의미한다. 유한과 무한, 인간과 자연, 개인과 전체, 필멸자와 불멸자를 매개하는 것은 바로 ‘믿음’이다. 그래서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는 ‘믿음에 대한 믿음’에 대해 말하고 있다. '믿음'이 인간을 신에게로 이끌 것이라는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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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오브 파이가 개봉된지 한참되었는데, 여태껏 보지 않다가 우연찮게 오늘 보게 되었습니다.
초중반부에서 자연과 신에 대한 동양적 세계관을 이야기하는 그저그런 영화라고 생각했는데, 결말부분을 보고 여러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중요한' 영화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ㅎ 안보신 분들은 꼭 한번 보세요! 재미있습니다!



14
  • 정말 좋은 영화죠. 추천!
  • 이해하는 만큼 보인다고 했습니다. 덕분에 제가 보지 못했던 부분을 알았습니다.


맥주만땅
영화를 본 것 같은 리뷰가 아닌 영화가 보고 싶어지는 리뷰이군요
3
자일리톨
감사합니다! 언제나 제멋대로 읽는 것을 좋아하는 저에게 최고의 댓글이네요ㅎ 혹시라도 안 보셨다면 나중에 꼭 보시길!!
성공적
좋은 글 감사합니다. 책으로 나왔을때 읽고 시간이 함참 지난 후 개봉된 영화를 보니 제 기억속의 원작이랑 얘기가 너무 달라서 약간 당황했던 영화였습니다.

소설가 얀 마텔이 '파이이야기' 다음에 출간한 '셀프' 라는 소설도 괜찮으니 문학을 좋아하시는 분들께 일독을 권합니다.
자일리톨
셀프 꼭 읽어보겠습니다!
정말 잼나게 봤던 영화입니다.
그래비티 안보셨으면 그래비티도 한번 보세용.
자일리톨
그래비티도 정말 재미있게 봤습니다. 생각해볼 여지가 많은 영화죠 그래비티도.
한소리
영화를 볼 땐 영상미만 비중을 둔 그런저런 영화라는 느낌으로 제법 지루했었는데 많은 이야기가 들어 있었네요..역시 아는 만큼 보이는가 봅니다. '운명은 정해져 있으니 한없이 자유로울 수 있다' 라는 말이 떠오르네요. 좋은글 감사합니다
자일리톨
저도 솔직히 중반부까지는 조금 지루했었습니다. 근데 마지막에 좀 정신이 번쩍 들었다고 해야할까요. 깜짝 놀랐습니다.
가위바위보
좋은 글 감사해요 책도 영화도 봤지만 생각도 못했던 해석의 여지가 숨어있었네요
자일리톨
좋은 예술작품들은 그냥봐도 재미있고, 제멋대로 해석해서봐도 재미있는 것 같습니다 ㅎ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무한한 파이와 유한한 인생이 대조를 이룬다는 설명 멋집니다.
자일리톨
댓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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