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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18/04/04 21:55:35 |
Name | 매일이수수께끼상자 |
Subject | 산 속에서 안 써본 근육을 쓰다가 |
한 3년 방치된 숲을 갈고리로 정리할 일이 있었다. 칡뿌리가 많이도 나왔다. 처음 몇 번이야 가위로 잘라가며 단면에서 나오는 그 풋풋한 향까지 즐길 수 있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갈고리에 툭툭 걸려 힘겨루기를 청하는 녀석들이 여름 날 모기보다 더 성가시게 느껴졌다. 긁어내야 할 잔풀들이 산더미인데 진도는 칡들 때문에 나갈 줄을 몰랐다. 경치가 좋은 곳이었다. 낙조가 강에 비치는 걸 시야 한 가득 담을 수 있을 정도로 트인 장소였다. 일을 저녁 전까지는 끝내고 밥까지 일찍 먹은 후 커피 한 잔 들고 석양을 즐길 요량이었는데, 이놈의 칡 때문에 다 그른 것 같았다. 이따금씩 허리를 펴 태양의 자리를 살피면 매정할 정도로 빠르게 낙하하고 있었다. 도시에서 자란 근육들이 산의 일에 적합하지 못하다는 것도 한몫했다. 그래도 계속 하는 수밖에 없었다. 기자 반 번역가 반으로 길러온 근육 중 그나마 쓸모 있는 건 막막한 백지를 한 글자 한 글자 채워봤다는 경험이었다. 이 칡 저 칡 정리하다보면 어느 새 끝나있겠지, 하고 마음먹는 게 크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갈고리 휘두르고 칡이 걸리면 자르고(감히 뽑기엔 3년 동안 너무 실하게 땅속에 박혀 있었다)의 반복. 일 자체는 단순해 머리로는 다른 생각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많은 경우 몸과 머리가 따로 논다는 건 집중력을 잃었다는 소리다. 집중력 잃은 갈고리질은 익숙하지 못한 갈고리질과 다른 건지, 보다 못한 친구가 저쪽 편에서부터 도와주러 왔다. 산과 밭에 대해서 조금 잘 아는 녀석이었다. 오자마자 땅바닥에 뒹굴고 있는 칡넝쿨의 굵기와 갈고리에 묻어나는 흙들을 보며 내 일터에 대한 다른 해석을 내놓았다. “정말 비옥한 흙이다. 집에 퍼가고 싶다.” 그 말을 듣고 보니 향긋한 풋내가 잘라낸 칡에서만 나오는 것은 아니었다. 3년간 아무도 손대지 않은 숲은 그 땅에 충분한 낙엽을 공급했고, 가끔 근처에 빠끔히 왔다가 사람 발소리에 달아나던 야생 꿩들과 토끼들의 분비물들도 좋은 영양소가 되었다. 진한 흙냄새가 그제야 나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맡아 본 냄새였다. 기억을 더듬으며, 허리를 잠깐 펴고 해의 위치를 살폈다. 몸과 생각이 따로였지만 집중력을 잃은 건 아니었다. 낙조 직전의 해를 보며 마침내 떠올랐다. 80년대만 해도 서울 여느 풀밭과 낮은 언덕들에서 무성히 자라던 쑥 근처에서 나던 냄새였다. 그 쑥을 캐려 옹기종기 모여 계시던 어머님들의 챙 둥근 모자들이 기억났다. 개나리 핀 담장 따라 학교에서 돌아왔는데 집 문이 굳게 잠겨 있으면, 어머니를 찾으러 그런 풀밭들로 나가곤 했었다. 친구들도 그랬다. 새끼들 반기는 어머님들의 발밑에서 그 흙냄새를 맡았었다. 그 쑥내 가득한 풀밭에서 친구들이라도 만나면 우린 어머니들이 집으로 들어간 줄도 모르고 놀기 시작했다. 어머님들은 그런 날 쑥국을 끓였다. 혹은 쑥전을 부쳤다. 난 둘 다 좋았다. 음식이 다 되면 약속한 것처럼 노을이 지기 시작했다. 그래서인지 지금까지 내가 아는 노을에는 배경 소리가 쨍쨍하다. 누구야, 저녁 먹어라! 누가 저녁밥 지은 어머니만큼 자식 이름을 힘차게 불러 줄 수 있을까. 이제는 친구와 나밖에 없는 조용한 칡밭 위로 젓지 않은 쑥국의 건더기처럼 해가 내리기 시작했다. 자식들은 어머님들이 떠나고 계시다는 걸 그때나 지금이나 알아채지 못한다. 그저 어머니들과의 약속을 지키려 해만 혼자 오래전부터 정해진 위치로 움직이기 시작하고, 그 해를 따라 자식들의 배는 어김없이 고프기만 하다. 집에 가는 길에 쑥을 한 봉지 샀다. 집사람에게 쑥국 끓일 줄 아냐고 물어보지도 않았다. 흙이 채 털리지 않은 쑥이 가득한 봉지 입구를 손에 쥐고, 좁은 틈을 코에 가져다 댔다. 아까 그 냄새인지 오래전 그 냄새인지, 난 둘 다 좋았다. ‘학교 갔다 왔니?’라는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고 ‘밥 먹으라’는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고, 난 둘 다 좋았다. 일은 못 끝냈지만 보고 싶었던 낙조는 충분히, 배경음까지 곁들여 감상할 수 있어서 괜찮았다. 못 다한 일은 다음 주에 하면 그만이다.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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