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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8/06/27 22:42:52
Name   매일이수수께끼상자
Subject   산골짝 장마 대비
장마에 대한 예보가 있기 전부터 산골 마을은 비 대비로 분주해진다. 지난 봄 간간히 소낙비가 내렸을 때부터 이미 우비를 쓰고 열심히 산을 오르내리시던 어르신들은 작업 구상을 다 해놓고 있었다. 흙이 허물어져 내리는 경사들과, 가을과 겨울을 지나며 죽어 떨어진 나뭇가지들이나 봄에 지나치게 무성해져 땅까지 드리워진 줄기 때문에 막힌 수로를 파내야 한다고 나를 쳐다보셨다.

특히 우리 집 건너 건너에 있는 집 뒤편의 배수로와, 언덕 위 텃밭을 따라 동네 아이들이 주로 노는 과실수 우거진 곳에 배수로를 더 확연히 드러내야 했다. 우리 집 건너 건너에 있는 집은 흙으로 된 경사 바로 밑에 있었는데, 흙이 조금씩 내려와 배수로가 묻히는 바람에 지난 4월의 소나기 때 물이 조금 집안으로 들어오기도 했었단다.

산딸기나무가 특히 많은 언덕의 배수로는 떨어진 나뭇잎과 무성해진 가지들이 쌓이는 바람에 물이 막힐 수도 있었다. 사실 물이 고이면 안 되는 언덕 위가 아니었다면 그냥 넘어갈 수도 있는 부분이었지만, 혹여 여기서 댐 효과라도 발생하면 아래 집들이 위험해질 수 있어 걷어내기로 했다. 그렇게 ‘배수로 정비 작업’ 일자와 시간이 정해졌다.

장마 대비라고 해봐야 평생 우산만 잊지 않고 다니면 됐는데, 한두 달 전부터 마을 근처 산세를 살피며 물길까지 직접 삽 들고 파내야 한다는 건 또 처음이다. 처음 해보는 산골 일에 대한 기대감과, 수재로부터 내 집을 내 손으로 지킨다는 뿌듯함이 묘한 흥분으로 변해 작업하는 날 기세등등하게 삽 들고 언덕 위로 올랐는데, 그 흥분은 장마와는 하나도 상관없어 보이는 뜨거운 햇빛에 일찌감치 증발해버렸다.

사실 갈고리로 마른 풀 좀 걷어내고, 배수로 일부분의 흙을 파내는 게 뭐 그리 어렵겠냐는 생각이 잠깐의 흥분을 자아냈던 것이었다. 이게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나서는 갑자기 햇볕이 그렇게 따가울 수가 없었다. 설명을 듣고 보니 막힌 흙을 파내고, 풀을 거둬내는 건 진공청소기 돌리기 전에 책이랑 그릇들 제자리에 가져다 놓는 것에 불과했다. 걸레질까지 마쳐야 청소를 완료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고, ‘배수로를 정비한다’는 말 속에는 그 걸레질까지 포함되어 있었는데, 나만 못 알아들었던 것이다. 긴긴 하루의 시작이었다.

생각했던 것처럼 가지 쳐내고 잎사귀 걷어내는 것과 흙에 묻힌 배수로 파내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오전 내에 배수로는 언덕과 마을을 따라 그 모습을 다 드러냈다. 그러니까, 겨우 책이랑 그릇을 바닥에서 치운 것이다. 이제 진공청소기를 등장시켜야 할 차례. “거기 있는 먹줄 좀 가져와보소.” 작업 반장님이 뭔가를 지시했는데, 먹줄이 뭔지 몰랐다. 옆 사람이 뭔가를 가져갔다. 작업 반장님은 실 같은 것의 양쪽 끝을 벽돌에 묶었다. 그리고 그걸 배수로에 곧게 펴서 내려놓았다.

“자, 이제 배수로 기울기를 맞춰야 합니다. 물이 흘러내려갈 수 있도록 구배를 잡읍시다.” 이 작업을 처음 해보는 나한테 하는 설명이었지만, 부족했다. 구배라는 말도 처음 들어봤다. 군대에서 배운 삽질로는 아래로 아래로 깊이만 팔 줄 알았지 기울기를 정교하게 가늠해 수평 방향으로 길게 구배를 잡는다는 건 혼나야지만 깨달을 수 있는 경지였다. 과연 핀잔이 이어졌다. “아니, 기자 양반, 거기는 배수로 첫 부분인데 거길 깊게 파면 어떻게 해? 저 밑에 가서는 얼마나 깊이 파려고? 허허...”

그래서 판 부분을 다시 흙으로 메웠다. 그러면서 배수로를 따라 파내려갔다. 내 눈으로 보기에는 경사가 일정하게 졌는데 먹줄을 가져다 대면 울퉁불퉁 그 자체였다. 그러면 또 다시 메우고, 다시 파고를 반복했다. 그러다 보니 내가 지나간 자리에는 ‘다이크’마저 솟아올랐다가 꺼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다이크란, 제방을 말하는데, 배수로 옆에 쌓인 언덕을 말한다. 혹여 배수로에서 물이 범람하지 못하게, 배수로에서 파낸 흙을 바로 옆에 쌓아 추가 안전 장치를 마련한 것이었다. 경험 많으신 어르신들은 누가 설명하지 않아도 이미 ‘파내기와 쌓기’ 두 가지를 모두 하고 있었는데, 기자 양반께서는 그저 파는 것만 급급해 이를 놓쳤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삽을 들고 배수로를 따라 걸어야 했다.

갓 보수를 마친 배수로는, 게다가 초보가 한 명 끼어 있었기 때문에, 아직 흙이 보슬보슬한 상태였다. 다이크도 마찬가지였다. 많은 물이 쏟아지면 다이크와 배수로부터 흙에 잠길 것 같았다. 그래서 궁리 끝에 배수로를 따라 비닐을 씌우기로 했다. 아직 불안한 흙을 보호하기 위해서 다이크의 중간 부분부터 배수로 바닥을 지나 반대편 벽까지 비닐이 둥글게 붙도록 해야 했다.

그런데 이것 또한 쉽지 않은 작업이었다. 비닐이란 얼마나 가볍고 쉽게 휘휘 말리는 물질인가. 바닥에 펴놓는다고 해서 알아서 예쁘게 자리잡아주지 않았다. 우리는 한 번에 3m씩 비닐을 깔고, 다들 배수로 안에 들어가 비닐의 양끝을 갓 쌓아올린 보슬보슬 다이크 안으로 말아 넣어야 했다. 비닐 끝을 두 손으로 잡고, 김밥을 말듯, 흙과 돌을 같이 움켜쥐고 둥글려서 흙속에 파묻었다. 전진의 단위가 ‘움큼’이 되었다. 엉금엉금 쪼그려 한 움큼씩 언덕 위부터 산 아래까지 내려왔다.

중간에 사람이 하나만 들어갈 수 있는 구간들도 있었다. 젊고, 아직 일을 한참 더 배워야 하는 내가 자처했다. 물론 보다 못해 다른 사람들과 교대되기 일쑤였다. 하지만 비닐을 김 삼아, 흙을 밥 삼아 말아가며, 김밥 싸기가 이렇게 어려운 것인가 깨닫기에는 충분했다. 심지어 밥은 쩍쩍 눌어붙으니, 진짜 김밥 만들기란 난이도가 훨씬 높을 터였다.

문득 예전 유치원 소풍가던 날, 생전 처음 싸본 김밥이 도무지 말리지를 않아 도마 앞에서 엉엉 울었다는 어머니가 생각났다. 요즘이야 김밥 집이 골목마다 있어 겨우 김밥 때문에 도마 앞에서 우는 엄마를 보는 게 쉽지 않은 때지만, 그땐 그렇지 않았다. 언젠가 이 흙말이도 손수 다 해주는 사업이 생겨날까? 여기 계신 아버지들 허리 다 펼 수 있게.

결국 비닐이 필요한 구간까지 작업을 마쳤다. 천만다행이도 산 아래까지 내려갈 필요는 없었다. 해는 이미 산 너머로 갈 길을 간 이후였다. 그날 어떻게 잠이 들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다만 새벽부터 오독오독 거리는 빗소리에 저절로 눈이 떠졌다. 온 몸이 쑤셨지만 우산을 쓰고 나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가 파낸 고랑과 내가 입힌 비닐들이 잘 견디고 있는지 보고 싶었다. 배수로를 따라 올라가면서, 미리 김밥을 말아둔 덕분에 우리 아이들 오늘 장화 신고 소풍 나와 물웅덩이에서 첨벙거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겠다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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