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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8/01/04 11:09:34
Name   제로스
Subject   할아버지 이야기 -3-
할머니께서 세상을 떠나신 뒤, 할아버지의 건강은 눈에 띄게 안좋아지셨다.
할머니 가시는 길에 그동안 수고 많이 했다며, 사랑한다고 이야기하셨던 할아버지는
저세상에서 할머니가 너무 오래 기다리실까 걱정하셨던 걸까. 평생의 반려자가 없어
세상이 재미없으셨던 걸까. 아버지는 할아버지 말벗해드리신다고 1시간 반 거리의
큰댁에 하루걸러 출퇴근하시다시피 했고, 어른이 된 손자 대신 할아버지의 장기 상대가 되셨다.
솔직히 내가 나이 들어서 아버지에게 아버지가 할아버지께 한 것만큼 할 수 있을까? 자신없다.

어느날 할아버지 상태가 안좋아지셔서 아버지도 못알아보신다는 얘기를 들었다.
가슴이 덜컥했다. 할머니가 그렇게 되셨을 때, 내 혈육이 나를 못알아볼 때의 참담함을 절실히 느꼈다.
이건 정말 겪어보지 않으면 모를 공포다. 영화 노트북에서 느꼈던 애잔함과 슬픔이 아니다.
그때 내가 느꼈던 감정은 분명 슬픔이라기보다는 두려움이었다.

다행히 그 때는 일시적이었고, 할아버지는 다시 회복하셨다. 병문안을 갔다가, 정말 오랜만에
할아버지와 장기를 두게 되었다. 처음에는 적당히 져드려야지 생각했다. 아무리 게임에 봐주는 게
없다해도, 예외는 있는 법이다. 이미 마눌님에게 예외를 만들기도 했었고.

그런데 이게 왠걸? 내가 장기를 안 둔지 꽤 오래되었다고는 해도, 내 실력의 저하와 상관없이
할아버지의 장기실력은 아직 현역이었다. 거동도 불편해지시고 손자들 이름도 오락가락하시고
내가 손자인지 아들인지 헷갈리시기도 했지만, 장기실력은 그대로셨다.

봐드려야지...마음 먹고 있었지만 그와는 전혀 무관하게 순수하게 실수로 말을 잘못 옮겼을 때,
할아버지는 '거기 둔거야? 진짜 거기 둔거지?' 라고 그립고 정겨운 익숙한 말씀을 하시고
가차없이 내 말을 잡으셨다. 맹세코 그 수는 봐드리려는 수가 아니었다. 이후 깜짝 놀란 나는
정신을 다잡고 최선을 다해 이기려고, 이기기 힘들어지자 비기려고 발버둥쳤고
거의 비기기 직전까지 갔었다. 서로의 기물이 3개정도씩밖에 남지 않아 승리하기에는 부족한 상황.
그런데 나는 왕을 피하는 자리에 딱 한번 실수를 했고 할아버지는 그 빈틈을 놓치지 않고 결정타를 먹이셨다.

내가 쓴 천원 중에 이보다 가치있고 기분좋은 천원이 있었을까. 아. 할아버지와의 장기는 예전부터 내기장기였다.
백원내기, 5백원내기, 천원내기. 어릴적에는 할아버지께 받은 용돈을 할아버지와 내기하는데 쓰고 오는 그런 모양새였다.
이 때가 작년초쯤일텐데 이게 내가 할아버지와 둔 마지막 장기다.
할아버지는 손자에게 리벤지 매치의 기회를 주지 않으셨고, 마지막 장기를 이기고 가셨다.
할아버지. 따고 배짱이십니다. 저는 여기서 오래오래 살다가 천천히 따라갈테니까
그동안 할머니하고 잘 지내고 계시고 그때 복수전해요. 꼭이요.
화장터에서 고인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라고 할 때, 나는 소리내진 않았지만 속으로 이렇게 인사드렸다.
'언제든지 도전하라' 도전하라와 도전하라우의 중간쯤되는 황해도 사투리발음을 들은 것 같기도 하고.

내가 마지막으로 할아버지 생전 모습을 뵌건 돌아가시기 3주전쯤인데.. 이미 상태가 좋지 않으셔서 식도로 관을 연결하신 상태였다.
그래서 말씀은 하지 못하셨지만 의식은 있으셨고, 인사를 드릴 수 있었다. 무엇보다 자가호흡이 가능하셨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날, 큰아버지는 할아버지가 곧 돌아가실 것 같다고 식구들을 모았다고 한다.
나는 지방에 있어서 연락을 받진 않았는데, 아버지는 오늘내일중으로 돌아가실 거라는 큰아버지 말을 믿지 않았다고 한다.
소위 말하는 회광반조였는지, 할아버지는 그날 아들들과 손주들을 알아보고 눈짓과 손짓으로 의사표현을 하셨다고 한다.
그리고는 맥박과 혈압이 점점 낮아지시더니 결국 맥박이 0까지 떨어졌다 올라왔다를 몇번 반복하시고 가셨다고 한다.

사실 임종 전날 자손들을 보고 임종을 지킨 자식들이 있었다는 것. 할아버지는 행복한 삶을 사셨고
어느정도 행복한 죽음을 맞으셨다. 그렇다. 연세도 많으셨고. 그래. 호상. 호상이지.
하지만 나는 장례식장에서 그 말은 한번도 하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호상이 싫다고 하셨거든.
할아버지는 여든 무렵에 할아버지 아는 동생분의 장례식에 가셨다가, 거기서 조문객들이
호상이라고 얘기나누는 것을 듣고 큰 충격을 받으셨다. 할아버지는 '나보다 어린데, 다들 호상이래.
내가 지금 죽어도 나도 다 호상이라고 하겠어. 허참. 호상이래. 호상.' 이얘기를 몇번이나 들었는지.
그래서 나는, 객관적으로 호상임에 틀림없지만, 절대 호상이라는 말은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강풀의 '그대를 사랑합니다'의 주인공 할아버지도 사람들의 호상얘기에 화를 냈다.
젊은 우리는 늙은 당신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숫자가 70넘고 80이 가깝고 90이 넘으면
살만큼 산거 아닌가 해서 호상이라고들 한다. 하지만 그게 아니다.
고등학교 동창들과 이야기하다보면 다들 그때랑 정신상태는 별로 달라진 것 같지 않다.
사실 뭐 중학교 동창을 만나도 마찬가지다. 20년전이나 지금이나 인간적으로 뭐 엄청 달라진 거 같나?
몸은 좀 늙었지. 마음이 뭐 다른가? 아니다. 근본적으로는 크게 달라지지도 않았다.
3~40대인 사람들은 이해할거다. 그런데 참, 이게 여전히 더 윗세대 쪽으로는 이해가 확장되지 않는다.
그래 맞아. 내가 앞으로 5, 60대가 되어도 7, 80대가 되어도 뭐 얼마나 더 달라지겠나?
몸은 늙어도 마음은 크게 변하지 않는다. 우리 부모님도, 할아버지 세대도, 마음은 젊은 시절 그때와
다를 게 없을 거다. 달라진 건 맘대로 따라주지 않는 몸뿐이지.

그러니까 호상이라는 말은, 젊고 어린 우리가 우리 슬픔을 위로하는 데는 쓸모있는 말이지만,
나는 쓰지 않는다. 그게 나쁜 뜻이 아니란 건 알고 있지만, 그래도 쓰지 않는다.
할아버진 호상이란 말을 싫어하셨으니까.

이천호국원에 할아버지 할머니를 모신 뒤에, 할아버지가 좋아하셨던 오장동 함흥냉면집에 냉면을 먹으러갔다.
따뜻한 육수를 주시며 '여기 아미노산이 있어서 감칠맛도 좋고, 소화에도 좋다고' 여러번 이야기하시던 할아버지.
마눌님이 어머 방금 한거 할아버님하고 진짜 똑같다고 말한다. 그래? 수없이 들은 말이니까.
생전에 워낙 단골이셨어서 주인내외분이 우릴 알아보셨다. 상복차림이어서 누가 돌아가셨냐고 물으시는데
아마 예감은 하셨겠지. 연세도 연세고, 할아버지를 모시지 않고 이집에 왔을때는 냉면을 꼭 포장해가곤 했으니까.

음. 할아버지. 다음에 복수전 하러갈때는 여기 냉면 싸갈께요.

장례미사를 하면서 십수년만의 고해성사를 하고 영성체를 받았다. 미사에 여러번 빠졌습니다. 구체적으로 얼마나..?
어..저기.. 훈련소에서 미사갔던게 마지막인데.. 음. 아니 신부님 전에는 구체적으로 얼마나 빠졌는지 자세히 물어보시지
않으셨던 것 같은데요....

장례미사를 진행하는데 아무래도 우리 할아버지 성함이 잘못 적힌 것 같다. 처음엔 내가 잘못들었나 했는데
세례명은 맞는데 이름을 계속 틀리시네..-_-..아마 못쓴 글씨를 못알아보시는 듯. 계속 틀리시다가 어딘가부터는 맞았다..!
'욱'을 계속 '직'이라고 읽으셨는데 뭐가 문제셨을꼬. 혹시 한자 욱자를 직자라고 생각하셨나? 뒤에는 한글로 써있었나?
뭐 우리집 사람들은 다들 형식에 그다지 구애받지 않으니까 할아버지도 딱히 신경쓰지는 않으셨을 거다.

주님. 요셉형제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영원한 빛을 그에게 비추소서.
요셉형제와 세상을 떠난 모든 이도 하느님의 자비로 평화의 안식을 얻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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