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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7/12/05 14:54:13
Name   살찐론도
Subject   찌질남
출퇴근시 자주 이용하는 전철역 앞엔 포장마차가 몇개 있다.
동선과 가까운 곳을 자주 이용했는데, 어느날엔 먼 위치의 포장마차만 문을 열었기에 자연스레 들어갔고, 그 포장마차의 이모가 가까운 지인과 매우 닮은것을 보고는 앞으로 몇걸음 더 걷기로 마음먹었다.
그 이모는 발이 퍽 넓으신 분이셨는지 그 오는 사람마다 정겹게 인사를 건넸고, 손님들도 아는체를 하는 사람이 많았다. 나는 제법 일정한 출퇴근 시간으로 일정한 시간대에 들렀기에, 같은 시간대에 오는 단골들 얼굴이 점점 익어갔다. 하지만 숫기가 없는 나는 이모 외 그 누구와도 말을 섞지 않았다. 아니 섞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어젠 평소보다 살짝 늦은 시간에 퇴근을 해 아슬아슬하게 전철을 놓쳤고, 다음 열차까진 18분이란 시간이 있었다. 장화반도 친구놈이 한국에 와서 한잔하기로 했는데, 공복에 마시긴 부담스러워 배채울 요량으로 포장마차에 들렀다. ㅡ순대 1인분에 내장은 염통이랑 오돌뼈만 주세요-
타임어택하듯이 먹어야 하는데 또 엄청 많이 주신다. 순대 몇개 먹다보니 소금이 없어 찍어먹을 것을 좀 달랬더니 떡볶이를 1인분 퍼주신다. ㅡ단골한텐 이거 돈 안받아 그냥 찍어 먹어..- 염치불구하고 넙죽 받아 먹기 시작했다.
그 때 익숙한 얼굴의 여고생이 친구랑 들어온다. 역시 단골이다. 친구랑 어묵꼬치 하나씩 먹고 국물을 마시면서 ㅡ미래엔 뭐할거야? 나? 유치원 선생님 애기들을 좋아하는구나 응 잘 자신도 있고, 무엇보다 내가 행복할 것 같아- 같은 사뭇 진지한 대화도 나눈다. 귀엽다.

한창 먹고있는데 이모가 말을 꺼낸다. ㅡ이거 어떻게 먹어?- 꺼내는걸 보니 커피가루다. 커피통에 담겨있어 뭔가 이상했지만 그냥 일반적인 설명을 해드렸다. ㅡ깔대기에 거름망 씌워서 커피가루 채우고 따듯한 물을 부어 받아먹으면 될거예요- 이모는 연신 고개를 끄덕거리며 집에가서 해봐야겠다 하신다. 그 때, 옆의 학생이 살짝 깜빡이를 켜더니 끼어든다. ㅡ저기.. 이모 그거 좀 봐요.- 커피통을 받아서 이리저리 보고 냄새를 맡더니 말한다. ㅡ이거 이미 커피내릴때 쓴거같아요, 드시지 마시고, 그냥 냄새나 습기 제거용으로만 쓰세요- 듣다보니 뒤통수가 띵하다. 괜히 아는체 했나 싶다. 다시 받아보니 습기는 없지만 군데군데 뭉친것도 보이고 냄새가 좀 쓴 것 같다. 주도권을 뺏긴 채 포장마차에 두면 어떨까 화장실 냉장고 블라블라 하는데 귀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학생에게 지식배틀에서 졌다는 찌질함이 남았다.

시간이 많이 흘렀다. 시간을 보고 남은 떡볶이와 순대를 보니 도저히 다 먹지 못하겠다. 급하게 떡볶이를 다 먹고 남은 순대를 비닐째 묶어 챙겼다. 찌질했지만 음식을 남기지 않는것은 부모님께 물려받은 신념이라 자위하며 지속한다. 직후 계산을 하며 ㅡ이모 잘 먹었습니다. 너무 마이 주시가 다 묵도 모하고 싸간데이- 표준어도 사투리도 존댓말도 아닌 괴상한 말을 남기고 전철을 타려 가는데 뒤에서 학생이 "안녕히가세요~☆" 인사한다. 착하다. 하지만 찌질한 나는 제대로 눈을 마주치지도, 대꾸도 못하고는 고개만 살짝 끄덕이고 전철을 향해 뛰어갔다. 플랫폼에 올라가니 전철문이 열려있었고 간신히 탔다. 그러고는, 남은 순대를 마저 먹고 왔더라면, 학생의 인사에 신사적으로 대응했더라면 전철을 타지 못했을 것이라고 스스로를 위안한다. 끝까지 찌질하다.



경험을 바탕으로 한 픽션입니다.
글쓰기 참 어렵네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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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의 찌질은 내일의 멋짐을 위한 발판!
  • 춫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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