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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7/10/30 16:48:51
Name   틸트
Subject   시베리아 평원 위, 새까맣게 타버린 계란같은 소설집.
시베리아 평원 위, 새까맣게 타버린 계란같은 소설집.

<블루칼라 화이트칼라 노칼라 : 판타스틱한 세상의 개 같은 나의 일> 홍시 출판사.

'직업'을 소재로 엮은 미국 작가 단편집을 읽었다. 모든 소설이 좋다. 정말 하드보일드하다. 하드보일드의 어원을 따라가자면, 단단하게 익힌 계란 수준을 넘어서 새까맣고 딱딱하고 시큼하게 태워버린 석탄 덩어리다. 차가운 소설, 이라는 단어가 주는 느낌이 보통 영상 4도, 맥주를 맛있게 마실 수 있는 서늘한 온도 정도라면, 이 소설집의 차가움은 영하 40도다. 위스키 속의 에스테르가 뿌옇게 굳어가는 온도, 보드카가 얼어붙는 온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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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에 대한 가벼운 이야기를 나누다가, 친구는 '반찬 냄새 나는 소설'이 싫다고 말했다. <한국 소설을 읽다가 반찬에 대해 언급하는 장면이 나오면 책을 덮고 싶어져. 제철 나물이라거나, 잘 구워진 생선 따위의 것들 말야. 소시민적 윤리의 표상으로 존재하는 지긋지긋한 반찬들과, 그런 소설이 표상하는 지루하고 멍청한 작고 일상적인 윤리가 지겹다 이 말이야. 역시 소설은 쿤데라 같은 거지> 나는 어 그래, 하고 대충 동의하며 시덥잖은 농담을 던졌고, 친구는 그런 농담은 별로 재미가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시덥잖은 농담 외의 선택지가 딱히 없었다. 화려하게 등단해서 지면 잘 받고 있는 소설가 친구에게, 반찬 냄새 나는 일개 소시민인 내가 소설에 대해 무슨 진지한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어느 작가가 어느 작가와 비슷한 급이라고 손쉽게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어려운 일은 대충 해도 되는 일이기에, 김훈을 헤밍웨이에 비견해도 될 것이다. 김훈을 헤밍웨이에 견주는 이런 이야기를 최근 지인 두엇에게 들었고 대충 동의했다. 김훈. 김훈이라. 개인적으로 칼의 노래는 개인적으로 한국 문학의 최고 역작 중 하나라 생각하고, 나머지는 별로 취향이 아니었다. 하지만 역시 김훈의 서늘함은 헤밍웨이에 비견해도 될 것이다. 아, 김훈이 헤밍웨이보다 나은 측면도 있다. 단일 언어 문학의 장 안에서, 당대에 홀로 힘쎈 문학을 독과점하고 있다는 점에서 말이다. 부러운 일이다. 야구 드립을 치지 않는다는 점에서 헤밍웨이에게 살짝 모자랄 수도 있겠지만. 확실한 건 아무튼, 차갑고 딱딱한 소설이 주는 미학이 있다는 것이다.

감상적이고 따듯한 소설이 꼭 덜 똑똑한 소설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뒤에 여러가지 공격적이며 정치적으로 딱히 올바를 게 없는 긴 문장을 몇 개 쓰다 지웠다는 사실을 밝히는 것을 통해, 하고 싶은 말을 우회적으로 밝히는 것은 별로 유려한 자세가 아닐 것이고 나는 유려한 사람이 아니다.

짜집기 단편집을 좋아하는 친구가 있고 완성된 단편집을 좋아하는 친구가 있다. 편집부가 엮은 단편집을 극도로 혐오하는 친구가 있었다. '그러니까, 단편이라는 건 작가가 구성한 하나의 단편집이라는 맥락 안에서 더 빛나는 거라고.' 대승적으로 어떤 맥락에 동의한다(쓰고 보니 굉장히 모순적인 느낌이지만 실제로는 딱히 모순적일 게 없다). 완성된 개인 단편집이란 일종의 앨범이니까. 하지만 한 아티스트가 만들어 낸 하나의 앨범에 들어있는 모든 노래가 좋다는 건, aiko 정도나 가능한 일이다. 쿤데라의 단편집에도 재미없는 소설이 하나쯤 끼어 있곤 한다. 하여 나는 편집부가 엮어낸, 여러 작가의 작품으로 구성된 단편집을 꽤 선호하는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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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린 작품들이 우열을 가릴 수 없이 좋은 작품집이다. 애초에 참여한 작가군의 급부터 이미 올스타급이니. 리차드 포드가 엮고, 존 치버에. 제프리 유제니디스에. 퓰리처 상 한번 못 타본 놈들 따위가 어디 작가로 깝쳐. 저기 가서 놀아 안 끼워줘, 수준이다.

17편의 작품 중 무작위로 세 편만 간단히 소개하고 싶다. 이 작품이 제일 좋거나 제일 나쁘거나 제일 인상적인 작품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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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첫 작품. 부부가 있다. 남자는 거대한 일에 종사한다. 그는 얼마 전 아랍인들에게 빙산을 팔아치우는 프로젝트를 맡았고, 그를 위해 아랍인들을 토플리스 식당에 데려가 접대하고 곧 테헤란으로 출장을 간다. 여자는 자기 사업을 하고 싶어한다. 그런 여자는 사업을 구상하고, 대출을 받고, 건물을 빌리고, 아이스크림 가게를 차리고자 한다. 일들은 조금씩 어긋나고, 은해으이 대출 담당 여직원은 그런 말도 안되는 사업성 없는 '여자의' 사업 따위에 돈을 빌려주고 싶어하지 않고, 비지니스 파트너 노먼은 그녀의 부적절하게 몸을 더듬는다. 여자는 권태의 도피로서의 일과 일로서의 일 사이를 그저 차분하게 걷는다. 마지막 페이지에서 여자는 남편 제임스에게 말한다.

"흥분되어 죽겠어요. 하지만 모든 게 겁나요. 돈을 몽땅 날릴 수도 있고 노먼이랑 눈이 맞아 도망칠 수도 있잖아요. 지니랑 서로 틀어지기 시작할 수도 있고, 아이들에게 소홀해질 수도 있으니까요. 또 당신이 원하는 안락한 삶을 테헤란이나 리야드에서 찾으면 나한테 쥐꼬리만한 별거수당을 보내주고 끝낼지도 모르잖아요. 여하튼 내가 집을 나서면 많은 일이 벌어질 것 같아요."
제임스가 말한다.
"사업은 사업이니까."
우리는 고양이처럼 한숨을 쉰다.
나는 윤활제를 바르고 제임스는 콘돔을 낀다. 때때로 우리는 실수하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하는 고리타분한 사람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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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혁명의 자유로운 분위기로 한 몫 잡은, 개방주의적이고 진보주의적인 출판사의 사장인 섹스광 할아버지는 자기 밑에서 일하는 편집자에게 마땅이 주어야 할 수당을 주지 않으며 착취한다. 주인공인 편집자는 보수적이고 성실한 아버지 아래서 금전적이고 정치적인 자유를 만끽했고, 젊은 시절 '자유와 진보'의 분위기를 즐기고 그렇게 결혼까지 했지만, 덕분에 이제는 돈이 없어 집 여기저기가 고장난 채로 살아간다. 어린 그의 딸은 난방도 제대로 되지 않는 추운 집이 싫어 매일 친구 집에 놀러간다. 그런 일상 속에서 사장은 그에게 알렉산드 드 토크빌의 '미국의 민주주의'의 포켓 요약본을 만들어 팔자고 말한다. 미국의 정신. 진보. 자유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자며.

그런 아주 낭만적인 삶 속에서, 출판사의 회계사가 그에게 은밀한 제안을 건낸다. 어차피 저 사장새끼, 비아그라 처먹고 어린 여자랑 떡칠 생각밖에 안 해. 사실 일다운 일은 똑똑한 자네가 다 하잖아. 이래저래 해서 돈을 빼돌리자고. 그리고 둘은 유령 인쇄소를 차려 회사 돈을 빼돌리려는 작업을 시작한다. 편집자는 옳은 삶, 미국, 진보, 내가 할수 있는 일, 내게 주어저야 할 공평한 일과 몫 등에 대해 고민하다 회계사와 합류한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일년에 한번쯤 사무실에 출근하던 사장은 주인공에게 전화를 건다.

그동안 수당을 제대로 챙겨주지 않아서 미안하다고. 앞으로 잘 챙겨주겠다고.
그리고 저 회계사 새끼가 돈을 빼돌리고 있는 것 같으니 한번 조사해보라고. 아, 굳이 위험한 수준까지 깊게 조사를 할 필요는 없네. 이미 몇 년 전부터 감시 시스템을 만들어 뒀거든. 조만간 최근에 신규로 계약한, 그 수상한 인쇄소에서 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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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소설은 첫 문장을 소개하는 것으로 퉁치자.

'한동안 뜸하다가 오랜만에 니콜슨 네 집 저녁 초대를 받아 가는 길에 마저리 리브스는 남편 스티븐 리브스에게 일 년 전 조지 니콜슨(초대받은 집 주인)과 잠자리를 한 적이 있다고, 하지만 지금은 다 지난 일이므로 남편 스티븐이 이 일로 이성을 잃지 말고 잘 지내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강렬하지만 너무 짧으니 도입부의 단락을 하나 더.

'조지 니콜슨은 덩치가 크고 스쿼시를 즐기며 가슴팍이 듬직하고 팔에 털이 부슬부슬 나 있는 예일 변호사였으며, 에식스 외곽에서 자기 소유의 오트 힝클리 61을 타며 쉰 살부터는 고액 수임료를 받는 하트포드 소송 일에서 물러나 승부를 다투는 라켓 경기와 시니어 스키에 더 많은 시간을 쏟기 시작했다. 조지는 스티븐이 다니는 회사 중역 중 한 명과 대학 시절 룸메이트이며, 스티븐과 마저리가 결혼 직후 이 지역으로 옮겨왔을 때 두 사람을 "아들 딸로 삼았다." 마저리는 코네티컷에 와서 처음 육 개월 동안 토요일마다 조지의 부인 팻시와 함께 감독교회 중고품 할인점에서 자원봉사를 했다. 조지 니콜슨은 메인 주 마티니커스 외곽에서 나이 많고 강인한 노련한 뱃사람과 함께 깊은 바다의 바닷가재 올가미를 끌어올리던, 기억에 남는 여름 이야기를 스티븐에게 들려주었다. 그 후 조지는 뱃사람 생활을 한 적이 있었고 팔뚝에 희미하게 남은 닻과 공과 체인 문신을 뽐내며 자랑했다. 그렇지만 그 후에는 스티븐의 아내와 관계를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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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집에는 두 개의 단점이 있다. 하나는 제목이다. 원제는 Blue collar, White Collar, No Collar : Stories of Work인데 '판타스틱한 세상의 개 같은 나의 일'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다. 편집자 혹은 번역자를 매우 쳐야 한다. 이건 뭐랄까 '지구를 지켜라'를 엽기코믹영화로 홍보하는 수준의 제목 아닌가 싶다.

그리고 인용한 구절에서 암시되듯, 번역의 질이 썩 좋지 못하다. 몇몇 작품은 심각한 수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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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을 읽고 다음에 잡아읽은 어느 소설집에서, 자신을 내팽개친 68세대 히피 부모를 결국은 용서하고 살아가는 공화당원 미국인이 등장하는 한국 소설을 읽었다. 삶이란 차갑게 흥미로운 것이다. 모든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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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훈씨는 한국의 헤밍웨이가 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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