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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7/10/29 15:23:38
Name   틸트
Subject   어떤 남자가 여자를 떠내보내는 장면, 鏡




여자는 모든 걸 정리한 얼굴로, 현관으로 나가는 복도에 서 있다.

모든 것들이 차분하게 정리된 캐리어 두 개가 그녀를 호위하듯 서 있다. 칫솔. 양말. 팔꿈치가 헤진 잠옷. 사랑. 서너 권의 책. 줄이 꼬이지 않은 이어폰. 추억. 아아. 추억은 두고 갈 걸 그랬나. 이제는 아무래도 상관 없는 일이지. 지금 와서 캐리어의 지퍼를 내리는 것도 우습잖아. 남자는 아무 것도 정리되지 않은 얼굴로 그녀를 빤히 바라본다. 너저분한 원룸, 오직 그녀만이 단단하게 정리되어 있다. 표면장력을 초월한 세탁바구니. 탁자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책과 음반들. 살짝 비뚤어진 거울. 거울이 또 왜 비뚤어졌을까. 아냐, 지금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야.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해야 하지. 방법이 없을까. 하지만 오늘은 방법이 없는 것 같은데. 지난 주처럼. 하지만 방법이 있어야 하는데. 그는 그녀를 잡기 위해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려본다. 그런 그의 눈에 지난 가을에 일주일 정도 입었던, 비싼 라이더 자켓이 들어온다. 비록 일주일밖에 입지 못했지만, 참 잘 산 옷이야. 예쁘니까. 그는 저 옷을 사려고 고생했던 날들을 떠올린다. 아니. 아니지. 지금 이런 생각이나 할 때가 아닌데. 하지만 이런 생각이 나는 건 어쩔 수 없잖아. 여자는 그를 한심한 눈으로 바라보며 입을 연다.

너는 또 네 생각만 하고 있나 보구나.

남자에겐 할 말이 없다. 그게 아닌데 그게 맞다. 아. 그게 아니라. 이쁜이, 라고 말하고 남자는 후회한다. 오래도록 그녀를 불러온 '이쁜이'라는 언명은 지금 아무런 권력도 행사하지 못한다. 그는 그녀를 빤히 바라본다. 하지만 예쁜데. 이마가, 눈썹이, 눈이, 콧잔등이, 뺨이, 입술이. 입술이. 아. 숨이 막히는군. 한심하군. 뭐라고 말을 해야 할까. 그는 그녀를 빤히 바라본다. 그녀의 모습을 눈에 새겨넣겠다는 듯. 그게 무슨 의미를 행사할 지 모르겠지만. 뭐라고 하지. 거울이 왜 또 비뚤어졌을까. 나는, 아니 우리는, 왜, 이렇게 되었을까. 내일의 나는 너는. 그리고 우리가 살던 집은. 문득 모든 걸 다 버려서라도 그녀를 잡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무엇을 어떻게 버려야 할 지 알 지 못했다.

이젠 정말 끝이야. 지긋지긋하다. 여자는 그렇게 말하고 돌아선다. 현관의 센서가 여자의 움직임에 반응해, 현관등이 하이라이트처럼 그녀를 비춘다. 천천히 재생되는 영상의 어느 한 장면에서, 현관등 불빛이 묻은 그녀의 옆 얼굴이 환하게 빛난다. 하얗게 빛나는 옆얼굴이 아름답네. 남자는 가슴이 무너질 것 같음을 느낀다. 사랑하는데. 그녀는 문을 열고 떠나간다. 이미 지난 주에 끝난 거겠지. 아니 어쩌면 그 전에 끝난 건지도 몰라. 끝 다음에는 이렇게 끝이 있지만, 끝의 끝 다음에는 무엇이 있을까. 무엇이 없겠지. 그렇게, 안녕. 남자는 그렇게 우두커니 서 있다.


-이 노래에 담긴 감정과 상황은 이런 거겠지요. 아니어도 상관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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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야마, 라는 친구가 있습니다. 1970년대 도쿄에 살던 젊은이입니다. 백수에 마약중독자고, 폭력적입니다. 술과 약에 취한 채 표도 끊지 않고 야외 음악당에 놀러갔다가 그를 제지하는 경비를 화장실에서 두드려패고, 지하철에서 중년 여성을 끌어안고 강제로 입을 맞추고 하는 종류의 인간입니다. 매일 사고를 치고나서 그는 습관처럼 부두 노동자가 되어 성실하게 돈을 벌겠다고 다짐합니다. 그의 애인은 이렇게 절규합니다. '그런 말 하고 싶다면 전당포에 저당잡힌 내 목걸이부터 찾아 놓고서 말해. 우리 아빠에게 받았던 금목걸이를 찾아 주고 나서 말하라고. 요시야마, 네가 전당포에 잡혔잖아? 마약 사겠다고 술에 취해서, 네가.' 결국 이런저런 사건 끝에 요시야마의 애인은 그를 떠나고, 그는 애인을 두드려패고 손목을 긋고 자살쇼를 벌입니다. 응급실로 실려 간 요시야마에게 의사는 친절하게 말합니다. '미친 척 자살극을 벌이는 게 아니고, 진짜 본격적으로 죽을 마음이라면 여기야, 여기. 귀 바로 아랫부분. 여기를 면도칼로 싹둑, 하면 끝장나. 그 땐 구급차를 숨 가쁘게 불러도 소용이 없어. 손을 쓸 수 없으니까.'

이 모든 미친 짓이 끝나고 요시야마는 이야기합니다. '정말 미안했어. 나, 돈 벌어서 인도로 떠날 거야. 항만에서 부두 노동으로 돈 벌어가지고. 이제 머리 아픈 일은 질색이야. 인도로 갈 꺼야.' 하지만 우리는 모두 알죠. 요시야마는 항만에서 부두 노동을 시작하지도 않을 것이며, 돈을 벌지도 못할 것이며, 인도로 떠나지도 못할 것이라는 것을. 그의 애인도, 그도 알고 있을 겁니다.

요시야마는 무라카미 류의 데뷔작,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에 등장하는 인물 중 하나입니다. 친구로는 절대 두고 싶지 않고, 옆집 사람으로 살지도 않았으면 싶은 사람이며, 딱히 감정을 이입하고 싶지도 않지만, 소설의 등장 인물로 가장 매력적인 인물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담배곽에 붙어 있는 사진과 고어 장르를 좋아하는 사람인지라. 하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역시 어떤 무기력하고 찌질하고 너저분하고 온갖 안 좋은 형용사가 붙은 혐오스런 실재를 실재처럼 리얼하게 묘사한 작품은, 역시 매력적일 겁니다. 그, 왜, 다자이 오사무의 '동경 팔경'이나 '인간 실격'에 나오는 친구들처럼 말이에요. 감정을 이입하고 싶지 않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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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그 녀석을 돌아오게 하는 방법'으로 TEENS’ MUSIC FESTIVAL에 우승하고, 후로 22년-메이저 데뷔 19년-연애노래 외길인생을 걸어오며 '여성의 연애 감정' 묘사에 탁월한 재능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되는 aiko의 곡들 중, 이 곡은 제법 특이한 곡입니다.

일단 화자가 남자라는 점에서.

동거하던 애인이 떠나가는 걸 가만히 지켜보며 횡설수설하는 남자의 감성을 다룬 이 곡은 다른 곡들과 가사의 톤이 많이 다릅니다. 안절부절 못하는 화자는 횡설수설합니다. 물론 안절부절 못하는 화자의 횡설수설은 수많은 곡들에 등장합니다만, 그런 곡들은 주로 상대를 향해 폭발하는 감정들을 기반으로 하는데, 이 곡은 그렇지 않습니다. 나. 주변. 나. 주변. 여기. 이곳. 나를 알아줘. 하필 연인을 '거울'이라 칭하는 것도 중요한 문제. 거울. 결국은 자기를 비추는, 자기애. 좁은 세계. 나. 오직 나. 저런 화자와 친구로 지내고 싶지는 않지만, 역시 굉장한 리얼리즘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내 친구들 중에서 저런 놈들 많을 거에요.

'여자의 연애 감정'을 20년 동안 노래할 수 있는 사람은 역시 남자의 연애 감정도 잘 아는 사람이겠죠. 그러니 저런 곡도 쓸 수 있는 것이고. 그래서 당대의 꽃미남 아이돌과도 사귀고 일본인 중 유투브 조회수 1위를 달성한 당대의 싱어송라이터와도 사귀고 어 근데 두번 다 결국 차이고. 그런 게 인생. 당대의 꽃미남은 그녀를 버리고 일반인 여성과 결혼하고, 당대의 싱어송라이터는 그녀를 버리고 갓 스물 넘은 어린 애랑 사귀게 되었다는 건 역시 <어른 천재> 애인을 받아들일 역량이 없었던 속 좁은 남자들일까나.

기본적으로 무기력하고 찌질하고 이기적인 멍청이가 떠나는 애인을 그냥 떠나게 두며 혼자만의 너절한 감상을 풀어내는 그런 감상의 곡. 아, 정말로 많이 본, 익숙한 장면과 정서입니다. 아니, 익숙했던, 으로 고치고 싶군요. 그러니까 아마 이 곡의 제목이....... <거울>이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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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준혁은 내게 세 가지로 기억됩니다. 첫째, 꾸준함. 이건 모두에게 마찬가지겠죠. 둘째, '세상에는 다양한 구질이 있지만, 타자에게 공이란 세 가지 뿐입니다. 빠른 공, 느린 공, 떨어지는 공.' 개인적으로 한국 야구사상 최고의 명언이며 세계 야구 명언집에도 순위에 올라야 할 명언이라고 생각합니다. 셋째, 은퇴식.

양준혁은 스스로 '언제나 1루를 향해 전력질주하는 선수'로 기억되고 싶다고 말해왔습니다. 그리고 은퇴를 앞둔 경기에서, '오늘은 안타 1개가 목표다. 기습번트를 대는 한이 있더라도'라고 말했습니다. 상대 투수인 김광현은 '삼진 3개를 잡겠다'고 말했지요. 은퇴식 날, 까맣게 어린 후배 김광현은 양준혁에게 후배의 예를 표하며, 최고의 공을 던집니다. 양준혁은 결국 한 번의 안타도 기록하지 못했지만, 그렇기에 그는 '언제나 1루를 향해 전력질주하는 선수'가 되었습니다. 경기가 끝나고, 비가 내리고, 양준혁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평생을 헌신한 야구장을 돌며 팬들에게 인사를 건냅니다. 빛이 쏟아지고, 비가 내리고. 빛이 내리고, 비가 쏟아집니다. 나는 그 날 야구에는 분명히 신이 존재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양준혁이 은퇴 경기에서 화려하게 홈런, 아니 수수하게 안타라도 쳤다면. 상대가 양준혁이 프로 데뷔 첫 홈럼을 때려냈던 김광현이 아니었더라면. 기습 번트라도 대었더라면, 그러면 조금 웃겼을 텐데. 결국 김광현은 세 개의 삼진을 잡고, 마지막 타석에서 땅볼을 친 양준혁은 1루로 전력질주합니다. 아웃. 그리고 비가, 빛이, 장엄하게. 신이 아니라면 이런 설계를 할 수 있을까요. 나는 내가 응원하던 선수가 은퇴하는 날에도 흘리지 않은 눈물을 펑펑 쏟아냈습니다.

비와 빛은 언제나 아름답지요. 사실 나는 이 곡을 아주 좋아하지는 않습니다만, 2015년의 저 라이브는 최고의 라이브가 아니었을까 합니다. 야구에도 신이 강림하는 것처럼, 음악에도 신이 강림하곤 하나봅니다. 해변의 무료 스탠딩 공연, 비, 빛. aiko.

--

올해 투어의 마지막 라이브에서, aiko는 두 번의 앵콜 리스트를 불렀습니다. 두 번째 앵콜의 마지막 곡, 그러니까 끝의 끝에 있는 곡이 이 곡이었습니다. 그래요. 이 노래는 물론 무기력하고 이기적이며 찌질한 남자가 떠나는 애인을 떠나가게 두는 그런 노래지만, 노래란 전체로 존재하며 동시에 또 구절로 존재하니까요. 마지막 공연에서, 아티스트가 팬에게 부르는 노래. 그리고 동시에 팬이 아티스트에게 부르는 노래로도 훌륭하죠. 조금은 짖궂은 것 같지만. 내년이 올 거니까. 그렇게 함께 소리를 지르며 노래를 듣고 노래를 부르고.


그래 너를 빤히 보고 있어
오늘은 방법이 없잖아.
네가 여기를 떠나니까
너를 이 눈에 새겨둘꺼야
최고의 입술에 매일 밤 나는 꿈을 꾸고 있었지
내일 이 곳은 숨을 멈추게 될 거야
가슴이 무너질 것 같네
문을 열고 나가면 이제 끝마저도 없네

--


鏡, aiko

그래 너를 빤히 보고 있어.
오늘은 방법이 없잖아.
네가 집을 나가니까.
이쁜이, 그대를 사랑해. 너는 내 거울이야.
문을 열고 나갈 때까지.

허세를 부려 산 엄청 비싼 라이더 자켓
기침이 멈추지 않는 밤에도 필사적으로 일했지
너를 이 눈에 새겨둘꺼야.

최고의 입술에 매일 밤 나는 꿈을 꾸고 있었지.
내일 이 방은 숨을 멈추게 될 거야.
그래, 네 하나의 질문에 대한 답은 많아.
알아줘, 이런저런 것들을.
이쁜이, 사랑하고 있어. 모든 걸 다 버려도 괜찮아
이런 나 좀 어떻게 되었나봐
너를 이 눈에 새겨둘꺼야.

그래 너를 빤히 보고 있어. 하얀 옆얼굴이 아름답네
가슴이 지금이라도 무너질 것 같아
이쁜이, 사랑하고 있어. 하지만 이제 끝마저도 없네.
네가 문을 열고 나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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