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17/07/26 18:24:19
Name   OshiN
Subject   존경하는 친구
고등학교 국어선생님께서 광주 5.18은 엄연한 폭동이며 탱크로 폭도들을 즈려밟아 쥐포로 만들어야 했다고 역설하신 적이 있습니다. 관동별곡을 배울 때였는데 어떤 맥락으로 그런 얘기가 튀어나왔는지 이제와서 알 길이 없습니다. 아무튼, 전 이미 학교와 교사들에게 학을 뗀 상태라 쟤가 또 지랄병이 도졌구나 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지요. 그러나 수업끝을 알리는 종이 치자마자 어떤 아이가 튀어나가 교실문을 등진 체 선생님을 가로막고 해당발언에 대한 취소와 사과를 요구했습니다. 선생님은 교사로서 혹은 어른으로서의 자존심 때문에 완강히 거부했으나 십분이 넘는 실랑이 끝에 질려서 "아 그래그래 폭동 아니야. 됐지?"라고 내뱉은 뒤 도망치듯 교실을 빠져나갔습니다.


선생님으로부터 항복선언을 받아낸 그 아이는 바로 초등학교 입학 첫 날에 자리를 앞뒤로 앉은 것을 인연으로 지금까지 인생의 3/4을 함께해온 최고의 죽마고우입니다. 그때만 해도 대수롭지 않게 뺨을 후려갈기고 빠따를 치던 시절이라 그 뜻과 용기가 가상해서 한참 시간이 흐른 뒤에 물어봤지요. 어떻게 그리 대들 생각을 했냐고. 대답은 몹시 의외였습니다. 나는 광주에 아무런 연고도 없고 근현대사에 큰 관심이 없었으나 잘못된 역사에 비분강개하던 예전의 너로 말미암아 5.18을 처음 알게 됐고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어라, 내가 그랬나? 하긴 역사를 가르치는 사회교사이신 엄마와 광주가 고향인 덕분에 영혼을 불태우며 책을 읽은 적이 있긴 하지... 나로 인하여 변할 수 있었다는 친구의 고백을 듣고 쑥스러움과 함께, 내 분수에 맞지 않게 너무나 그릇이 큰 친구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듯한 부끄러움을 동시에 느꼈더랬지요. 나는 너에게 아무것도 해준 기억이 없는데. 오히려 나는 너에게 언제나 배우기만 하는데 너는 나에게 고맙다고 하는구나. 맙소사.


故노무현 전 대통령의 유명한 말씀인 "나는 문재인이를 친구로 둔 것을 정말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를 듣고 문득 떠올라서 적어봅니다. 저는 대통령감은 커녕 누군가에게 쓸모있는 사람도 결코 못 되지만 '네가 나의 친구라는 사실이 자랑이야 영광이야'라고 말해줄 수 있는 친구가 곁에 있는 행운을 가진 사람이란 건 분명합니다. 물론 쑥스러워서 절대 입밖으로 내지 못 하지만 말이죠 ㅋㅋ



27
  • 자랑스러운 친구가 되셨군요
  • 나는 대통령감이 됩니다!
  • 춫천


타임라인에 썼다가 500자를 훌쩍 넘겨서 티타임게시판에 옮겨 적습니다. 좋아요 눌러주신 분들께 죄송... 이밖에도 이 친구에 대한 멋진 일화가 잔뜩 있지만 그건 나중에 생각날 때 정리해야겠습니다.
호라타래
뭔가 간질간질하면서도 기분 좋으셨겠어요 :)
사실 당시엔 삶에 미련이 없어서(?) 현실감각을 애써 차단하느라 큰 감흥과 교훈을 느끼지 못 헀는데, 지나고보니 참으로 흔치않은 친구를 두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아버
헐퀴ㅋㅋㅋㄱㅋㄱ
사나남편
그런 생각 가진 선생들이 아직도 있다는게...안타까운 현실이지요.
그래서 저희집이 대대로 교사집안인데도 공교육에 대한 불신을 강하게 가지고들 있습니다.
고딩때면 그리 오래전일도 아닌데... 그때도 그런 선ㄴ생이 있었군요..
몇 년 안 됐으니 아직도 계실 겁니다.
파란아게하
좋은친구를 둔 좋은친구는 춫천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10275 오프모임종로)번개는 번갯불에 튀겨야 제맛!! 금일 13:30분 쌋뽀로 관훈점(구 어담) 40 Schweigen 20/02/09 6171 10
72 기타종로 번개 모임을 가져볼까요 44 Toby 15/05/30 11099 0
7041 일상/생각종교로서의 코인, 자산으로서의 코인, 기술로서의.. 4 hojai 18/02/03 4750 3
2573 철학/종교종교, 도덕적 결벽증의 저항 2 커피최고 16/04/08 6156 1
5073 꿀팁/강좌종각역 젊음의 거리(피아노거리) 주차공간 8 Toby 17/03/04 10353 8
12235 음악좀비 댄스 바나나코우 21/11/03 3556 3
5608 오프모임좀 있다 저녁 8시 50분 종각역 4번 출구-> 종로3가 2-1 피카디리 변경!! 52 tannenbaum 17/05/10 6024 2
835 음악좀 오래된 한국 노래들... 2 새의선물 15/08/24 4181 0
13906 일상/생각좀 슬픕니다. 8 큐리스 23/05/25 2873 3
13911 일상/생각좀 슬프시다는 글을 읽고 끄적여 보아요. 날이적당한어느날 23/05/25 2304 0
6387 일상/생각좀 많이 아팠습니다. 30 tannenbaum 17/10/08 5898 16
11342 일상/생각졸업앨범 따위 필요없어 22 Cascade 21/01/16 4333 13
2223 일상/생각졸업식과 입시 결과와 나 30 헤칼트 16/02/14 4828 1
469 기타존중입니다 취향해주시죠.?? 12 표절작곡가 15/06/29 8237 0
3292 스포츠존존스 적발된 약물 나왔는데.. 이거면 확실한건가요?? 67 omcdamcd 16/07/19 6380 0
8344 창작존재와 무국 7 quip 18/10/09 5242 13
6011 일상/생각존경하는 친구 11 OshiN 17/07/26 4478 27
3218 스포츠존 존스, 도핑 적발? UFC200 대진 제외 7 kpark 16/07/07 3760 0
14460 기타존 미어샤이머 인터뷰 2 은머리 24/02/15 2138 9
5759 영화존 말코비치 되기 보신분 있으신가요 13 Holden Caulfield 17/06/08 10656 0
11999 일상/생각족보 4 私律 21/08/20 4560 32
10686 의료/건강조혈모세포 기증 후기 5 아목 20/06/14 6158 29
2854 의료/건강조현병, 정신분열증, Schizophrenia 에 사용되는 약물 20 모모스 16/05/21 10290 2
10858 영화조커 재감상 후기 + 조커가 악평을 받았던 이유 52 ar15Lover 20/08/14 8637 4
6317 일상/생각조카사위 이야기. 46 tannenbaum 17/09/21 6322 22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