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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17/07/05 21:07:23 |
Name | 쩡 |
File #1 | FB_IMG_1499253252801.jpg (133.9 KB), Download : 8 |
Subject | 나의 20대, 그리고 맨체스터에서 산다는 것 |
맨체스터에 산다는 것. 1. 이곳에서 생활하게 된지 어느덧 3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물론 이곳 대부분의 유학생들이 그렇겠지만, 저는 한번도 이국의 낯선 도시에서 20대의 절반에 가까운 시간을 보내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지금까지의 중요한 기로에서 나름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 최선의 선택을 하려 노력했고, 어쩌다보니 여기까지 와 버렸다- 가 솔직한 심경입니다. 어쩜 살아간다는건 그런 것 일까요. 2. 대학생이라는 것은 실로 엄청난 특권임에 분명합니다. 우선 혹사당해도 별 불평 않는 젊고 건강한 육체가 있고, 딱히 이렇다 할 엄청난 책임을 짊어질 일도 거의 없습니다. 매일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배우고 토론하고 온 세상이 배울 것으로 넘쳐납니다. 주제 넘게 벌려 놓은 일들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지낸적도 있었습니다만, 대게 일상의 고민거리는 오늘 뭐 먹지, 정도의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날씨가 좋은 날에는 (물론 매우 드물지만) 시간을 내어 미술관 까페에 가거나, 공원에 누워 늘어지게 책을 읽고, 비행운을 그리는 비행기를 시야에서 사라질때까지 눈으로 쫓는다던지, 불어오는 바람 냄새를 맡는다던지 하는 일로 시간을 보내고는 합니다. 맞아요. 호시절이네요. 3. 조금 더 어렸을적엔, 하루 빨리 어른이 되어 잔소리꾼들이 다 사라져 버렸으면 하고 생각하곤 했습니다. 마침내 20대의 자유라는 백지수표가 덜렁 주어지고 그것이 내 책임이 되었을때, 어쩐지 이 뻔뻔한 녀석은 게으름을 피우는데 주저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불행하게도 누구 하나 이놈자식! 하며 꿀밤을 때려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학생 비자에 맞춰 만들어진 바클레이 카드의 만료일을 볼때면, 지금 안락한 생활의 계산서를 마주하게 될 날도 과연 머지 않음을 절감합니다. 흘려 보내는 날들에 점점 더 무거운 책임감을 느낍니다. 지금까지의 선택은 인생을 방향 짓는다기보단 한 목적지를 향하는 길 위에서의 차선 변경에 불과했다면, 앞으로는 좌회전이냐 우회전이냐 하는 삶의 갈림길을 더 자주 맞닥뜨리게 되겠죠. 4. 아무튼 그렇게 스물다섯번째 생일이 지났습니다. 이런 코흘리개 녀석, 하고 머리를 쓰다듬을 분들도 계시겠지만, 이 코흘리개의 시간도 점점 더 가속도가 붙어갑니다. 슈퍼우먼이었던 어머니의 머리에는 서리가 앉고, 울보 동생은 장교가 되었습니다. 한국에 있는 친구들의 취업과 결혼 소식, 부모님의 부고가 이제는 더 자주 들려옵니다. 그저 몇번의 계절을 흘려 보냈을 뿐인데 천둥벌거숭이 같던 녀석들은 훌쩍 자랐고, 정말 잃고 싶지 않았던 것들은 야속하게도 하나 둘 손아귀를 빠져 나갑니다. 맨체스터에서의 생활도 언젠가 인생의 한 챕터로 기억 되겠지요. 과연 인생은 찬란한 것이었다며 미소 지을 날도 오게 될까요? 지금은 잘 모르겠습니다. 더 많이 감사하고 사랑하며 하루하루를 쌓아 올릴 밖에요.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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