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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7/07/05 17:38:58
Name   tannenbaum
Subject   군시절 2박 3일 제주도 여행기
복무하던 부대에 친하게 지내던 동기들이 몇 있었습니다. 해군이라 경상도 친구들이 제일 많았지만 그래도 전국에서 동기들이 모였죠. 대구에서 은행다니다 휴직하고 온 친구, 안양에서 권투하다 온 친구, 부모님과 제주도에서 식당하던 친구, 부산에서 학교다니다 온 친구... 이렇게 다섯명이 있었습니다. 근무하던 사무실은 달라도 동기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특별한 이유 없이 서로 친해졌었죠. 끗발 없을 땐 휴게실 자판기 앞에 모여서 고참들, 사무실 간부들 성토대회를 하던게 뭐가 그렇게 재미 있었던지요...

매일 부대끼며 살면서 자주 이야기 했습니다. 우리 언제 휴가 맞춰서 안양찍고, 대구 찍고, 부산 찍고, 광주 찍고, 제주까지 같이 여행하는 것도 재미지겠다구요. 하지만, 짬 없는 시절엔 휴가던, 외박이던... 고참들에 밀려 한번을 맞출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제대를 한달 정도 남긴 7월이었네요. 다들 말년휴가 날짜를 맞추자고 작당모의를 했죠. 그런데 각자 일하던 사무실 사정으로 휴가기간을 똑같이 맞출수는 없었습니다. 안양 친구는 사정 상 먼저 휴가를 썼고 나머지 친구들도 휴가기간이 겹치는 날자는 4일뿐이었습니다. 그래서 광주에서 모여 하룻밤 지내고 2박 3일은 제주 친구네 집에서 보내기로 했습니다.

첫째날 전 저녁 광주에 모인 우리들은 터미널 근처에 숙소를 잡고 죽어라 술을 펐습니다. 새벽까지 이어진 술자리에 늦잠을 잔 우리는 허둥지둥 터미널로 달려 겨우 목포행 버스에 몸을 실었습니다. 목포에 도착해서도 울렁거리는 속을 붙잡고 죽어라 달린덕에 다행히 제주행 페리를 제 시간에 탑승을 할 수 있었습니다. 협제에 있는 친구네 집에 도착하니 벌써 4시가 넘어가고 있더군요...

생각해보세요. 이제 스물두어살 울끈불끈한 총각들이.. 그것도 군인들이!!! 피서철 바닷가에 간다면 무엇을 제일 먼저 생각할까요? 대자연의 품에서 바다와 하나되는 재충전의 기회요? 에이~~ 아들 아시면서~~ 그날 해수욕장 모래사장에는 뭍에서 휴가온 아가씨들이 참 많았더랬죠. 부모님의 환대를 받으며 절을 드리고 식당을 지나 2층 살림집으로 올라가면서 다들 수영복 갈아 입고 바닷가로 달려갈 생각에 들떴습니다. (저 빼고.... 이쁜 아가씨들이 넘실댄들... 이게 무슨 의미가 있나...ㅜㅜ) 자칭 헌팅계의 신이라 자처하던 대구친구는 자기만 믿으라고 큰 소리를 뻥뻥쳐댔죠. 다들 옷을 갈아입고 식당으로 내려가 어머님이 차려주신 늦은 점심을 먹고 있을때 아버님이 조심스럽게 다가오셨습니다.

'자네들.... 피곤하겠지만... 일 좀 도와줄 수 있겠는가? 일하던 아주머니가 사정이 생겨 며칠 못나온다고 급작스레 연락이 와서.... 당장 사람을 구할수도 없고... 내 차비는 제대로 챙겨줄테니....'

말끝을 흐리는 아버님 말씀에 우리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습니다.

'아유 아버님. 당연하죠.', ' 아버님도 참. 그냥 일 좀 도와라 말씀만 하시면 되지요.', '사람이 밥을 먹었으면 밥값은 하는게 도리입니다. 아버님'....

다들 어차피 오늘은 늦기도 했고 내일 본격적으로 (아가씨들이랑) 놀거니 이참에 손 넣어 드리는 것이 도리라는 계산이었습니다. 다시 2층으로 올라가 반바지 속의 수영복을 벗고 식당으로 내려왔습니다. 그러나.... 피서철 해수욕장 식당은... 전쟁터였습니다. 6시가 넘어서부터 몰려들기 시작한 손님은 우리가 상상하지 못할 수준이었습니다. 쉴새없이 여기저기서 부르는 손님들 틈에서 우리들은 어설픈 손놀림으로 음식을 나르고, 상을 치우고, 설거지를 하느라 입에 단내가 나도록 뛰어다녀야만 했습니다. 새벽이 다 되어서야 가게는 정리가 되었고 우리는 그대로 피곤에 쩔어 골아 떨어졌습니다.

대망의 제주 둘째날!!! 느즈막하게 일어난 우리는 어머님이 차려주신 진수성찬으로 늦은 아침을 먹었습니다. 어제 봤던 그 아가씨들 저쪽에 있다는 둥, 좀전에 내가 다른 팀 봤는데 거기가 더 이쁘다는 둥, 옆에 민박집에 묵고 있는 여대생들 내가 미리 작업해놨다는 둥.... 다들 신이 났습니다.(저만 빼고...) 옷을 갈아입고 바닷가로 나갈때쯤 점심이 되었습니다. 1층 식당으로 내려가 어머님께 인사를 드리고 가게 문을 나서니....... 관광버스 두대가 가게 앞에 멈춰섰습니다. 그리고 거의 100명정도 되는 관광객들이 식당으로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아버님은 그 앞에서 손님들에게 연신 인사를 하시다 바닷가로 나가려는 우리를 보셨습니다.

'밥은 맛있게 먹었는가? 어서 가서 놀아 [우리 신경 쓰지 말고].....'

잠시 잠깐이었지만 우리들 머리속에서 공명이 일어났습니다. [우리 신경 쓰지 말고], [우리 신경 쓰지 말고], [우리 신경 쓰지 말고]........................

어떻게 됐나고요? 별수 있나요... 다시 올라가서 옷 갈아 입고 내려와 일 도와드렸죠. 한사코 괜찮다고 말씀하시는 아버님이 살작 미소를 보이셨던 거 같기도 합니다. 피서철+토요일+해수욕장 앞 식당 콤보의 파괴력은 실로 대단했습니다. 이건 마치 12시간 연속 유격훈련을 하는 듯 했습니다. 매일 이렇게 손님을 치뤄내는 부모님들이 존경스러웠습니다. 그러나... 걸어서 2분이면 백사장인데.... 저기 앞에 비키니 아가씨들이 있는데... 바닷물에 발도 못 담가 봤는데...... 각자 속으로 중얼대며 어제처럼 뛰어다녀야만 했습니다. 그래도 하루 경험해서인지 첫날보다는 일이 손에 익더군요. 역시나 그날도 새벽이 되어서야 가게는 정리가 되었습니다. 아버님은 고생했다며 상다리가 뿌러지게 술상을 봐주셨고 동이 틀때까지 우리는 텅빈 밤 바닷가를 바라보며 술을 마셨습니다.

그렇게 제주에서 2박을 마친 우리는 다음날 각자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제주항까지 태워주신 아버님은 우리에게 차비하라시며 두둑하게 담긴 봉투 하나씩 내밀었습니다. 아버님에게 인사를 드리고 목포행 배를 타는데 왜그렇게 허전하고 아쉬웠을까요? 모를 일입니다. 휴가가 끝나고 부대에 복귀한 그 무리들은 그 제주친구를 쥐잡듯 잡았다 합니다. 일부러 노린거 아니냐구요.

이렇게 제 2박 3일간 제주여행기... 아니 제주노동기는 끝이 납니다.

뿅~~!!



3
  • 춫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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