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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7/04/09 16:51:06
Name   구밀복검
Subject   '다른 나라에서'의 한 장면


홍상수의 2012년 작 '다른 나라에서'. 이 영화는 3부로 구성되어 있어요. 각 파트가 작중 등장인물인 정유미가 쓴 각본이라는 설정. 해당 씬은 마지막 파트의 씬인데, 임신한 아내 문소리를 데리고 전북 모항으로 여행 온 권해효가 윤여정의 동행인인 이자벨 위페르에게 지분거리는 장면이죠. 전체 맥락을 알아야 훨씬 재미있게 볼 수 있지만 해당 씬 자체만으로도 단편으로 손색이 없죠. 무지하게 웃겨요.

- 지극히 한국적인 '면' 속에 외국인 이자벨 위페르라는 '점'.
- 이를 부각시키는 윤여정의 어색하고 우스꽝스러운 영어. 이자벨 위페르가 없다면 영어가 등장해야할 이유가 없죠(심지어 이자벨 위페르는 프랑스인이고 작중의 배역도 그렇지만 프랑스와 한국 사이엔 영어가 존재하지요.).
- 프레임 밖에서 들려오는 '여보' 소리로부터 파국이 시작되죠. 이것은 <북촌 방향>이나 <밤의 해변에서 혼자>에서도 드러나는 장치. 프레임 밖에서 '소리'으로만 존재하는 인물들이 프레임 안에 '시각적'으로 드러나 있는 인물들을 뒤덮으면서 긴장을 조성하죠.
- 문소리의 대사들은 그 자체로 보면 너무나도 흔한 관용 표현이라 3류 각본가가 썼을 법 하지만, 되려 그 범박성이 고유한 울림을 주죠. 여기엔 그 범박성을 극단으로 드러내는 문소리의 발성도 한 몫하고.
- 이 씬은 술자리는 아니지만 직전에 바로 술자리 씬이 있었고, 숙취어린 아침에 개가 된 이들을 그리는 것이니 술자리라고 해도 무방하죠. 그리고 홍상수의 술자리는 서로 이질적이고 용해되지 않는 요소들이 어색한 균열을 일으키면서도 되려 자연스럽게 공존하는 양상을 탁월하게 그려내곤하죠. 마치 르누아르적인 입체화들처럼.
- 그리고 그 '어색함'을 어떻게든 봉합하려는 권해효의 '어색한' 음성도 매력적이고요.
- 마치 각 배우의 발화가 문자 그대로 음악과도 같죠. 4인 혼성 중창이나 오페라 같은.

한국인인 김민희는 함부르크로 갔고 프랑스인인 이자벨 위페르는 전북로 왔지요. <해변의 여인>들.
곧 홍상수 연출/이자벨 위페르 주연의 <클레어의 카메라>가 공개됩니다.



3


    이건마치
    이렇게 씬 하나로 디테일을 볼 수 있는 글 좋아요. 노란 아내가 수평으로 화면을 빠져나가는 동선이 어쩐지 마음에 듭니다. 약간의 사선을 기대하고 있었는데.
    역시 재미있어요 ㅋㅋ 근데 홍상수는 위페르쯤 되는 배우를 너무 무성의하게 써먹는다는 느낌이에요. 굳이 그가 아니라 엑스트라급이라도 외국 배우면 아무나 괜찮을 텐데 배가 불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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