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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7/03/21 01:12:25
Name   팟저
Subject   채식주의자 - 90년대 이후 국내 여성 문학 속 일련의 작품군에 대한 단상
예전 티타임게시판 어느 댓글란에서 은머리님께 한강의 소설 채식주의자와 관련한 질문을 받은 적 있습니다. 당시는 못 보고 넘어갔고 이제야 질문을 읽었는데 거기 답변을 달기엔 워낙 예전 글이기도 하거니와 다른 분들도 읽을만한 이야기다 싶어 올립니다. 가벼운 마음으로 썼기에 타임라인에 쓰려고 했는데 분량상 올라가지 않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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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ngcha.net/?b=3&n=4763&c=68574

"(한강의)채식주의자가 그렇게 똥이에요?"라고 질문하셨죠. 뭐, 질문자께서 궁금한 건 한강의 채식주의자가 좋은 소설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왜 좋은 소설이 아니냐일테니 대답은 여기에 맞춰보겠습니다.

관찰자인 남편의 시점에서 중심인물인 아내에 대해 평범한 여자고 내가 기대한 건 딱 그것이었을뿐 딱히 사랑과 같은 특별한 무언가 때문은 아니다... 운운하며 건조하게(보이려는 표현들로) 묘사하다가 특정 사건을 계기로 그녀에게 위화감을 느끼는 걸로 소설이 시작, 그녀와 남편 사이에 긴장이 조성되고 이 긴장 관계 사이에서 그녀가 예민한 감수성을 지닌 특별한 사람이었으며 알고 보면 정말 (여자를 억압하는 한국 사회의 자의식을 내면화하여)부인을 실질적으로 평범하고 문학적으로 평범치 않게 억압하던 건 남편이라는 걸 암시하여 이를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는 깨달아 나름의 파국을 맞이하는 결말.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요약한 거냐고요? 90년대 중반에 쓰여진 은희경 [아내의 상자]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2010년대 초반에 쓰여진 김숨의 [왼손잡이 여인] 이야기고요. 2000년대 중반 즈음 쓰여진 한강의 채식주의자 이야기기도 합니다. 그리고 저 셋뿐만 아니라 그외 은희경 아내의 상자 이후 이십여년 간 한국 문단내 여류작가들로부터 줄기차게 쓰여져온 특정한 작품군 유형이기도 합니다. 저 특정 사건이란 게 아내가 자기 자신을 담는 상자를 만들기 시작하면 [아내의 상자]고 남편 눈에는 멀쩡히 보이는 오른손이 잘렸다고 말하며 왼손만 써대는 건 [왼손잡이 여인]이고 육식을 거부하며 채식을 시작하면 [채식주의자]입니다. 어이가 없는데 어이없다고 말하기 민망할 정도로 자주 반복되어 이제는 저걸 하나의 장르라고 불러야할 정도로 정형화된 작품들이죠.

아니, 유사한 주제야 사실 문학에서 많고 많습니다. 유사한 주제를 다루며 유사한 소재를 채택하는 것도 드물지 않고요. 대표적으로 학교를 통해 정치와 민주주의를 말한 황석영의 [아우를 위하여], 전상국의 [우상의 눈물], 이문열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 그렇죠. 간혹 덜떨어진 인간들이 저걸 보고 표절이네 어쩌네하는데 말 그대로 쉰소리일 뿐이고요. 전개와 접근 방식, 그로 인해 도출되는 결말(과 이것이 암시하는 궁극적인 주제의식이) 모두 판이한데요. 헌데 저 모두와 더불어 인물 설정과 작중 구도까지 비슷하다면... 이건 사법적인 맥락에서 표절은 아니더라도 보는 이를 낯뜨겁게 만들죠. 사실 주제니 소재 채택은 의외로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움베르트 에코 [장미의 이름]과 이인화 [영원한 제국]이 주제가 같고 소재가 비슷하진 않거든요. 차라리 정반대에 가깝죠. 하지만 두 소설을 읽어본 사람들이라면 분명 비슷한 구도와 전개 방식으로 인해 그 영향관계를 의식하지 않을 수가 없고, 그래서 이인화가 패러디 운운한 거기도 하고요. 한편 주제와 소재 채택의 공통점은...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을 둘러싼 표절 논란과 같은 경우가 아닌 한에야 일반 독자 입장에선 잘 의식하기도 어렵고요.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 논란이 된 건 뭐 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단순히 이문열이 싫어서 나온 썰에 가깝습니다.

이인화의 [영원한 제국]조차 패러디라는 말로 넘어가야 했는데 여기에 주제와 소재 채택까지 접점이 있다면? 네... 이건 거의 전근대에, 그리고 근대 이후로는 통속 문학과 대중예술에서 볼법한 아류작들의 향연이라고 할만하죠. 그저 유사한 주제의 작품이다, 혹은 같은 계열의 작품이다...라는 표현은 최윤의 [하나코는 없다][아내의 상자] 사이에서나 성립할 표현이고요. 아니, 하다 못해 김형경의 [담배 피우는 여자][아내의 상자]처럼 화자 정도는 달라야죠. 그런데 채식주의자를 쓴 한강과 [왼손잡이 여인]을 쓴 김숨은 어떤가요. 전동조의 [묵향]을 보고 [소드 엠퍼러]를 쓴 김정률이 저 작가들보다 부지런했던 거 같거든요. 무협 세계에서 판타지 세계로 차원이동하던 묵향과 달리 우리의 소드 엠퍼러는 외계인이 침략한 미래의 한국 사회->무협 시대->판타지 시대->다시 미래의 한국 사회로 좀 바뀌지 않습니까?

그나마 한강이 김훈처럼 밀도 높은 사장과 (비교적)치밀한 구성미에 방점을 둔 작가였다면 읽는 맛이라도 있을테고 이것만으로도 고유의 문학적 가치를 상정해볼 수 있겠죠(하긴 그런 구성이 가능하면 애초에 구도까지 유사하게 가져가진 않겠지만). 헌데 한강은 철저하게 작품 속 중심 이미지에 방점을 찍고 소설을 쓰는 작가거든요. 사장 이야기를 하면 말이 길어질테니 패스하고(다만 한마디쯤 하자면 몇개월 전 홍차넷에서 이런저런 이야기가 나왔던 작가 권여선의 [처녀치마]와 비교해서 읽어보면 진정 문학적인 사장이 무엇이며 한강이 여기에 장점이 있는 작가가 아닌지 알기 쉬울 겁니다) 구성의 측면에서도 채식주의자 연작은 아쉬움이 있는데요. 당장 몽고반점에서 처제와 성관계를 맺음으로써 자기 마음 속 그림을 완성하려 결심하고 '그림'에 요구되는 분장을 위해 전 애인을 찾은 남자에게 갑자기 붓칠하다 말고 성적으로 매료되어 찐한 키스를 나누는 남자의 전 여자...와 같은 장면은, 작품의 주제와 중심 이미지를 고려할 때 왜 넣었는지 이해는 가면서도 너무 노골적일 뿐더러 전체 흐름상 워낙 맥락이 없어서 눈을 감고 싶을 정돕니다. 저 전 애인이란 결국 무협지에 곧잘 등장하는, 깨달음을 얻어 강해진 주인공이 필생의 숙적을 만나러 가는 과정에서 전과 비교해 얼마나 고강한 무공을 갖게 되었는지 알려주는 중간 보스의 포지션인데요. 그런 중간 보스들도 몽고반점 속 화자와 전 애인이 입 맞추는 과정보단 그럴싸한 맥락 속에서 주인공과 싸웁니다.

네... 뭐 그렇습니다. 읽고 있으면 진짜 표절을 한 신경숙이 차라리 한국 작가 중에선 부지런한 축에 속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죠. [아내의 상자]가 집필될 즈음 평론가들이 일련의 여류 작가들이 집필하는 비슷한 주제의 작품들을 보며 정치적으로 진보적이지만 문학적으로 보수적인 경향을 지적했는데 어느새 그조차 옛날 이야기가 됐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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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렇군요.
  • 한강 선생님 디스는 춫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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