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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7/03/11 09:49:46
Name   사슴도치
Subject   참치를 참칭하다.

급할 때 찾을 수 있는 맛도 좋고 가격도 착한 참치 통조림에 사용되는 어류가 진짜 다랑어과의 어류인 참치가 아닌 가다랑어나, 회로 먹지 않는 날개다랑어라는 것은 얼마나 슬픈 일인가. 참치가 아닌 참치가 스스로를 참치라고 참람되게 칭하는(참칭僭稱) 안타까운 현실이다. 참치를 참칭하는 참치가 아닌 참치통조림의 비극인 것이다. (이제는 참치횟집에서도 기름치가 나 참치요 하고 참치ing하는 참칭참치집이 참 치를 떨게 많이 생기고 있다.)

이처럼 우리 주변에서는 자신을 '참칭'하는 사례가 번번히 일어나는데, 자신의 번듯한 지위와 이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이름을 칭하는, 사칭 혹은 참칭이라 일컫는 - 러시아어로 사모즈반스트보(Самозванство)-의 문제가 벌어지는 것이다.

온라인 상에서야, 자신의 이름과 신분을 감추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아이디라는 이름 뒤에서 자신의 이름을 감추고 활동할 수 밖에 없지만, 사실상 그 아이디라는 것도 현실 세계에서 사용하고자 한다면 꽤나 새그럽다.

"안녕하세요. 사슴도치입니다."

필요에 의한 아이디의 사용이 이러할진데, 애초에 현실에서 사용하기 위한 참칭명칭을 만드는 것은 더욱 새그럽다. 예컨대 모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고객인 나와 눈을 맞추기 위해 반무릎을 굽히고

"안녕하십니까? 담당 서버~ 마크입니다~ 주문 하실 사항 있으면 절 찾아주시구요~ 먼저 빵부터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라는데, 나는 단 한번도 마크를 마크라 부를 수가 없었다. 호마호크 할수 없는 슬픈 현실. 마크라는 명칭은 그의 진실된 명칭이 아니라 그가 참칭한 명칭이기 때문에 그런걸까.

한번은 타로 점을 보러 간 적이 있었다. 순서를 대기하다가 자리에 앉아서 타로를 보는데, 앞에 앉은 예쁘장한 이 언니가

"안녕하세요, 저는 마녀 레아입니다. 지금부터 궁금하신 걸 알려드릴께요~"

라는데, 순간 나도 모르게 '서버가 어디세요?'라고 물어볼 뻔 한 걸 간신히 참은 적이 있다. 애초에 재미로 보는 타로점이었지만, 그 마녀님의 태도가 너무 진지해서 도저히 웃으면서 새롱댈 수 없었던 기억이 난다. 이 사주, 타로카페에서는 여자는 마녀, 남자는 흑마법사의 컨셉을 잡아 참칭하는데 모두 자신의 직업에 너무 진지하게 임해서 "안녕하십니까? 저는 흑마법사 셰브입니다" 라고 다른 자리에서 소개를 하는 저 남자가 짠하게 느껴지면서도, 정말 진지한 눈을 하고 있어서

" 아 예, 저는 흑대학생 ㅇㅇㅇ입니다" (지금이라면 흑변호사?)

라고 해야 할 것만 같은 상황을 목도하고 있노라면, 뭐라 말할 수 없는 복잡한 기분을 느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굳이 초자연적 존재가 아니더라도, 참치 아닌 것이 참치를 참칭하면서 다양한 종류의 참치통조림이 있듯이, 다른 사람의 인격을 사칭하는 일들도 종종 일어나곤 하는 것을 보면, 바야흐로 대참치시대, 아니 대참칭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이 아닌가 싶다.

"만일 당신이 사람들로부터 선한 사람, 겸손한 사람, 진실한 사람, 사려 깊은 사람, 올바른 마음을 지닌 사람, 고귀한 마음을 지닌 사람 등의 명칭을 얻었다면 그것을 더럽히지 않도록 노력하라. 그러나 혹 그러한 명칭을 회복하기에 노력하라. 서둘러 그 명칭을 회복하기에 노력하라. 당신은 이러한 명칭들을 얻으려고 애쓰지 말고 이러한 명칭들에 적합한 생활을 하라. 그러면 당신은 새 인간이 되고 새 삶을 영위할 것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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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Vinnydaddy
    아무래도 "안녕하세요, 저는 마녀 도봉순입니다"보다는 "레아입니다"가 분위기를 덜 깰거 같으니...ㅎㅎㅎ;;;
    이름 너머의 본질을 파악하기를 기다릴 수 없고 기다리지 않는 세상이 된 거 같기도 해요.
    "마크입니다" "아 그러세요" 하는 드라이한 세상 같기도 하고.
    사슴도치
    참치-참칭 오 이거 비슷한데? 하는 가벼운 생각으로 썼던 글인데 좋은 화두를 던져주셔서 저도 여러모로 생각해보게 되네요 ㅎㅎ
    일본의 대학생들은 영어이름을 지어 부르기가 유행이라고 하지요. 서구사회에서 이름이란 별 뜻 없이 성인의 이름을 따오는 경우가 많은데 일본인이 그런 이름을 스스로 지어 부르다니, 대학사회 전체가 시쳇말로 '컨셉질'을 한다는 생각에 재미있었어요. 옛날에 우리 조상들이 서로를 부를때 이름은 피하고 호를 불렀던 것은 고상한 컨셉질 이상의, 그것의 뜻처럼 살겠다는 다짐을 바깥으로 보여준다는 부분에서 멋있다고 여기거든요. 그러나 요즘에 '나 아무개는 이렇게 불러주시오.'하면 이인의 풍모가 풀풀 나겠지요? 아쉽아쉽…
    사슴도치
    ㅇㅇ의 자는 xx, 호는 ㅁㅁ였다고 기록에 남겠죠?ㅎㅎㅎ 컨셉질이든 뭐든 재밌는 현상입니다.
    빈둥빈둥
    아이디나 닉네임, 옛날 조상들이 자, 호를 지었던 걸 보면 은근히 재밌긴 하더라구요. 인디언 이름짓기 같은것도 비슷한 느낌도 들구요.
    '대나무숲에 빈둥거리는 팬더' 라든가...
    사슴도치
    중학교때 지은 아이디에는 흑역사가 가득....
    호라타래
    재미있는 글 잘 읽었습니다. 참칭을 하여 변할 수 있는 부분이 있고, 참칭하여도 안 되는 부분도 있네요 ㅎㅎ
    사슴도치
    재밌게 읽어주셨다면 감사합니다!
    안녕하세요.
    SCV 입니다.

    저는 참칭이 아니므니다. ㅠ
    사슴도치
    Good to go sir!
    Jobs Finish!!
    moneyghost
    '왕을 참칭하자 마라. 상왕은 왕이 아니니라' 라는 대사가 떠올랐어요.
    사슴도치
    뿌나 재밌게 봤습니다!ㅎㅎ
    지나가던선비
    이글보니까 아쉽게 생각이 드네요. 패밀리레스토랑에서 알바할 때 "안녕하세요 흑염룡입니다"라고 소개할 패기가 왜 없었을까요.
    사슴도치
    으잌 경험자셨군요!!! 하지만 영업장에선 어쩔 수 없을 때가 많죠ㅠㅡㅠ ㅎㅎ
    Dr.Pepper
    제 주변에 예전에 팸레가서
    저런 오글거리는 별명의 서버 이름을 큰 소리로 외치는 놈이 있었습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손을 흔들면서
    "마크님!, 마크님!, 저희 부시맨 브래드 좀 더 갖다주시면 안되나요?"

    그 마크님은 능욕으로 말미암아 발현된 증오로 가득한 얼굴로 빵을 가져다주곤 했었죠..
    사슴도치
    으악 진짜 흑역사 생성기네요ㅋㅋㅋ

    무슨 웹툰 에피소드같아요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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