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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6/12/28 19:44:14
Name   tannenbaum
Subject   옛날 이야기 - 1
엄밀히 따지고 보면 나도 친일파의 후손이다.

얼굴 한번도 못 뵌 외할아버지는 구한말 일제시대 경상도에서 잘나가던 친일파 지주였다. 환갑이 다 되어가던 외할아버지에게 우리 외할머니는 열 일곱 나이에 세번째 첩으로 들어 가셨다. 당시에 힘있는 남자들에게 첩이 많은 건 능력의 상징하는 훈장과도 같은 것이었단다. 지금도 이해는 안되지만 그때는 그랬다 하더라... 외할머니가 그 어린 나이에 당신의 할아버지보다 나이가 더 많은 외할아버지의 세번째 첩으로 가셨던 이유는 지금 생각해도 너무 안타깝고 또 안타깝다. 가난한 집 장녀로 태어나 하루하루 연명하기 힘든 동생들과 부모님에게 집 한채, 땅 몇 마지기 선물하고 자신의 인생을 포기하셨으니 말이다.

처음에는 어떻게든 외할아버지 댁에서 도망치려고 하셨었다. 밤마다 당신의 방에 들어오셔서 불을 끄는 외할아버지가 너무나 무섭고 열 일곱 소녀에게 그것은 너무나 너무나.... 아펐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되려나.... 외할아버지는 어린 외할머니를 많이 이뻐하셨다 한다. 마음 붙일 곳 없던 외할머니는 조금씩 외할아버지에게 마음을 열기 시작했고 그 무렵 내 큰 외삼촌이 태어 났다. 늦게 본 아들에 외할아버지는 큰 외삼촌을 더 없이 예뻐하셨고 본처와 첫째 둘째 첩의 극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호적에 올리셨다. 외할아버지가 외할머니와 외삼촌을 이뻐하면 이뻐할수록 본처와 나머지 첩들은 참 두 모자에게 참 모질게 굴었다 했다. 외할아버지가 집을 나가면 집안에 부리는 하인들보다 더 힘들게 일을 시키고 밥을 굶기고 매질을 했었다. 그러다 외할아버지가 돌아와 그 사실을 알게 되어 온 집안을 뒤집어 엎고 난리를 피웠지만 자리만 비우면 다시 괴롭히는 일이 반복되었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났을 때 해방이 되었다. 그러나 외할아버지에게는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친일파라 처단 받지도 재산을 환수당하지도 하다 못해 동네 사람들에게 손가락질도 받지 않았다. 미군정과 이승만정권에 줄을 잘 대 오히려 일제시대보다 더 잘 나갔다. 막말로 더 떵떵거리면서 잘 살았다 한다. 소작농들은 외할아버지에게 여전히 굽실거렸고 순사에서 경찰로, 일본인 마름에서 공무원으로 바뀐 인사들은 외할아버지 뒤를 봐주며 늘 두둑히 한 몫씩 챙겨갔었다 한다.

다시 몇년이 지나고 6.25가 터졌다. 하지만 외갓집인 부산은 평온하기만 했었다. 외할머니는 군인들과 미군이 길에 갑자기 넘쳐나는 것 빼고는 전쟁이 난 줄도 모르셨다 했다. 방어전선에서 수많은 군인들이 죽어가고 대문 밖에는 굶어 죽는 피난민들이 넘쳐 났지만 외할아버지는 매끼 갓지은 뜨거운 쌀밥에 고기반찬이 없으면 호통을 치셨다 한다. 하다 못해 굴비 한조각이라도 있어야 식사를 하셨다 하니.... 외할아버지가 외할머니를 그토록 예뻐하셨던 이유는 나이가 어리고 늦둥이 아들을 보게 해줘서도 였지만 그 많은 식구들 중에서도 음식을 제일 잘하셨다 한다. 전라도 담양에서 경상도로 이주해 온 연유로 어머니에게 어릴적부터 배운 음식솜씨는 외할아버지께 이쁨 받기에 충분하셨으리라. 이 나이먹도록 내가 기억하는 외할머니의 음식은 여태 먹어온 그 어떤 음식들보다 맛있었으니 말이다. 아무리 잘사는 집이라 하나 전쟁통에 매끼 고기며 생선을 구하기는 쉽지 않았었다 한다. 그렇게 고기반찬을 구하지 못할때면 외할아버지의 호통이 무서웠던 본처는 외할머니에게 식사수발을 대신 들게 하셨단다. 다른 식구들에게는 호랑이보다 무섭게 대했지만 외할머니에게만은 인자하셨다 하니...

전쟁도 끝나갈무렵 외할아버지는 어느날 갑자기 자리에 누우셨다. 그리고 손 써볼 틈도 없이 얼마지나기 않아 먼 길로 가셨다. 외할아버지 상이 끝나자 마자 외할아버지의 본처와 첩들은 눈엣가시처럼 여기던 외할머니와 외삼촌을 집에서 쫒아 냈다 한다. '넌 전라도 촌것이니 전라도로 돌아가서 살아라' 며 외삼촌을 호적에서 지우는 조건으로 전라도 어느 깊은 깡촌마을에 있는 백마지기 남짓한 땅을 떼어주고 집에서 쫒아 냈다. 다시는 부산에 발 들이지 말라는 말과 함께.....천지간에 식구하나 아는이 하나 없는 낮선 곳으로 쫒겨나는게 너무 무서웠던 외할머니는 본처 앞에 엎드리고 하루 반나절을 빌었다 한다. 그러나 너무나 무섭게 나가라 소리치는 본처를 보고 자기는 떠날 터이니 외삼촌만이라도 이 집 식구로 받아달라고 빌었지만.. 도리어 매질만 당했다 한다. 결국 포기하고 외삼촌을 데리고 전라도로 떠나던 그 때 아셨다 한다. 외할머니 뱃속에 내 어머니가 자라고 있었음을.....

그때 외할머니는 스물 여덟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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