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16/10/05 18:13:05
Name   기아트윈스
Subject   분사난(忿思難)
학부 2학년 때 논어(論語)를 선독해주는 수업을 하나 들었어요. 선생님은 머리가 시원하게 벗겨진 선비 타입 아조씨로, 늘 벙글벙글 웃는 분이셨어요. 현대적인 해석 같은 거 없이 그저 주자(朱子)주에 맞춰서 구절구절의 뜻을 풀어주는 수업이었는데 인기강의는 아니었지만 전 재밌게 들었어요.

학기가 끝나갈 때 쯤 진도가 쭉쭉 나가서 계씨(季氏)편에 다다랐어요 (논어 20편 중에 16번째 편이에요). 그리고 거기에 공자가 구사(九思: 아홉가지 생각)를 소개하는 구절이 있는데 그 내용이 대강 이러해요.


君子有九思       군자에겐 아홉가지 생각이 있다.
視思明             볼 때는 분명하게 보고자 생각하고
聽思聰             들을 때는 뚜렷하게 알아듣고자 생각하고
色思溫             안색은 온화하게 하고자 생각하고
貌思恭             행동거지는 점잖게 하고자 생각하고
言思忠             말을 할 땐 충실하게 하고자 생각하고
事思敬             일을 할 땐 진지하게 하고자 생각하고
疑思問             의심이 들 땐 물어봐야지 생각하고
忿思難             화가 날 땐 그 결과 어려워질 걸 생각하고
見得思義          이득을 보면 그게 정당한 건지 생각해본다.


사실 평이직절한 구절이라 굳이 장황한 설명이 필요하지 않지요. 그런데 선생님께서 "화가 날 땐... (忿思難)" 부분에서 잠시 멈추고 숨을 고르시고, 얼굴에서 웃음기를 싹 거두시더니 이런 표정으로







 
"여기 남학생들... 훗날 와이프한테 화(忿)가 나거든.... 화내기 전에 열 번 스무 번 생각(思)하세요. 후에 무슨 재난(難)이 닥칠지. 그럼 화 안내고 잘 참을 수 있어요."

라는 거예요. 학생들은 이게 공처가 기믹이라고 생각하고 다들 유쾌하게 웃고 넘어갔어요. 이 선비 같은 선생님께서 어디서 이런 드립을 배워오셨나 했지요.

아아 선생님 그 땐 제가 어리석어 참교육을 몰라봤습니다.

어디 스무 번으로 족하겠습니까. 서른 번씩 생각해봅시다...



1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4199 일상/생각힙알못이지만, 이 노래는 참 좋더군요. list5 7 Darwin4078 16/11/20 7626 1
    4193 일상/생각평화집회를 바라보며 4 nickyo 16/11/19 4188 4
    4187 일상/생각[단상] 광장을 바라보며 1 Jasonmraz 16/11/18 4647 4
    4184 일상/생각SNS 이야기 5 nickyo 16/11/18 4044 6
    4180 일상/생각지인들에게 안부편지 10 까페레인 16/11/18 4116 2
    4169 일상/생각수능이 다가오니 드는 생각. 8 조홍 16/11/16 5088 0
    4156 일상/생각레퍼런스 하나 없는 나의 개똥철학들 16 Ben사랑 16/11/15 5268 0
    4155 일상/생각오빠 46 민달팽이 16/11/15 7377 7
    4153 일상/생각후대에게 2 nickyo 16/11/14 5076 2
    4149 일상/생각진정한 친구이자 동료가 있었던 사람 17 swear 16/11/13 6301 1
    4148 일상/생각낯선 이에게 호의를 베풀지 못하게 되었나봅니다. 39 똘빼 16/11/13 4896 2
    4146 일상/생각11월 12일 민중총궐기 집회 후기입니다. 15 nickyo 16/11/13 4761 12
    4144 일상/생각짝사랑 해보고 싶어요! 24 진준 16/11/12 5024 0
    4137 일상/생각초행길은 무서웡 9 성의준 16/11/11 4815 8
    4136 일상/생각꼰대가 싫다. 12 진준 16/11/11 4171 0
    4134 일상/생각영화 <색, 계> (와 아주 살짝 관련된 이야기) 16 black 16/11/11 5689 17
    4132 일상/생각군 시절 에피소드 -2 12 수박이두통에게보린 16/11/11 5126 0
    4128 일상/생각군 시절 에피소드 -1 12 수박이두통에게보린 16/11/10 4362 1
    4123 일상/생각인간의 본성, 나는 도덕적이야. 18 눈부심 16/11/10 5136 3
    4121 일상/생각퀴블러 로스의 '죽음의 5단계'와 사람들 바라보기. 8 Zel 16/11/10 6010 5
    4113 일상/생각피부과에 다녀왔습니다(입술) 8 진준 16/11/08 4363 0
    4110 일상/생각푸른 색이 슬프지 않기를 매일이수수께끼상자 16/11/08 5176 7
    4108 일상/생각. 6 설현 16/11/08 4081 2
    4103 일상/생각허리가 약해지나봐요(…) 12 진준 16/11/07 4413 0
    4099 일상/생각나의 LCHF 이야기 3 쉬군 16/11/06 5370 0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