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24/02/06 14:26:23수정됨
Name   기아트윈스
File #1   에이아이.jpg (48.6 KB), Download : 4
Subject   영화 A.I.(2001)


인공지능 테마로 나스닥이 광속질주하는 2024년, 인공지능 주식 하나 없이 손가락만 빨던 기아트윈스는 2001년 닷컴버블 시절에 개봉한 인공지능 영화를 한 편 때리며 마음을 달랬읍니다.

개봉한지 23년이나 지난 영화고 세간의 주목도 받을 만큼 받은 작품이니 만큼 저 같은 영알못이 뭐라 덧붙일 말이 마땅치 않습니다. 피노키오 이야기와 비교하는 것도, 피그말리온 이야기와 비교하는 것도 이미 누군가 다 해버렸음. 그런데, 사랑의 방향에 관한 이야기는 뜻밖에 많지 않군요.

피노키오나 피그말리온은 장인이 자신의 작품을 사랑하고, 그 사랑으로 인하여 작품이 생명을 얻는 이야기입니다. 반면에 [에이아이]는 작품이 주인을 사랑하여 생명을 얻는 이야기입니다. 구도가 뒤집혀있지요.

전자의 경우 크리스트교의 교리와 유사성이 있습니다. 신은 창조주요 우리는 피조물인데 창조주가 피조물을 사랑한 결과 피조물이 생명을 얻었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에이아이]는 이 구도를 뒤집었다는 점에서... 흠... 어떤 신학적 방향전환으로 해석될 여지를 품고 있습니다.

[에이아이]의 주인공은 남자아이(로봇)이며 그가 사랑하는 대상은 어른여성(인간)입니다. 남자아이는 그 설계에서부터 부모(특히 엄마)를 사랑하는 마음이 내재되어 있습니다. 엄마가 될 사람이 그 사랑을 받기 위해 해야 될 일이라고는 그 내재된 마음을 격발시키는 것 정도입니다. 트리거를 당기기 전에는 그냥 [너와 나]입니다만, 트리거를 당긴 뒤 부터는 [아이와 엄마]가 됩니다.

재밌는 건, 어른여자 입장에서 엄마가 되는 게 그다지 어렵지 않다는 점입니다. 아이 참 엄마 될까 말까 하 몰겠네 이걸 해 말아 하다가 그냥 뛰뜋뛱 정해진 트리거를 당기면 끝. 트리거를 당긴 뒤 두 사람의 관계를 만들고 가꾸고 이끌어 나가는 건 거의 다 아이의 마음 속에 내재된 그 사랑의 힘입니다. 아이가 기관차고 엄마가 객차입니다. 엄마는 그닥 할 게 없음.

할 게 없는 정도가 아니라, 아이를 향한 엄마의 마음이란 게 기실 그리 단단하지 않습니다. 갈팡질팡하기도 하고 빡치기도 하고 밉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고 아무튼 매우 복합적이며 출렁거리는 감정입니다. 반면에 엄마를 향한 아이의 마음은 한날 한시도 빠짐 없이 지구를 비추는 태양과 같습니다. 지구가 좀 갈팡질팡하고 여기로 숨어볼까 저기로 튀어볼까 고민해보지만 까짓거 그래봐야 태양계입니다. 태양은 변함없이 지구를 사랑합니다.

아이를 키워본 경험이 없는 분의 경우 영원히 주인만 바라보며 주인을 사랑하는 강아지를 떠올려보시면 대충 이 느낌이 어떤 건지 짐작할 수 있을 겁니다. 강아지의 맑은 두 눈망울이 영원히 타오르는 불꽃처럼 나를 비출 때 사실 그정도로까지 강아지를 맹렬히 사랑하는지 확신할 수 없는 내 영혼의 불안감은 어느새 강아지의 사랑 앞에 엎드려 항복해버립니다. 내가 이런 사랑을 받아 마땅한 놈인지 모르겠다만... 그래 맘껏 핥아라ㅠㅠ 핥아줘서 고맙다ㅠㅠ. 이런 경험을 해본 분이라면 엄마가 아이를 사랑하고 돌봐주는 힘이 아니라 아이가 엄마를 사랑하는 힘이야말로 엄마와 아이의 관계를 성립시키고 유지시키는 가장 중요한 동력일 수도 있다는 걸 이해하실 듯.

그렇습니다. 이제 이 이야기의 신학적 함축은 분명합니다. 피조물이 생명을 얻은 이유, 우리가 인형이 아니라 사람인 이유는 창조주가 피조물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피조물이 창조주를 사랑해서이다... 가 되는 거시죠. 우리는 하느님의 쏟아지는 사랑을 받아서 구원받는 게 아니라 하느님을 향해 사랑을 쏟아부음으로서 구원받는다... 가 되는 것입니다.

한 아이의 성장과정으로 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엄마가 아이에게 사랑을 들이부어서 아이가 사랑을 배우는 측면도 물론 있겠지마는, [에이아이]는 반대로 아이가 엄마에게 사랑을 들이부어가며 사람을 사랑하고 세계를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게 아니냐고 묻습니다. 사랑은 사랑받는다고 꼭 배울 수 있는 게 아니고, 외려 누군가를 사랑해 주면서 배워가는 거 아니냐는 거지요.

사랑이라면 엄마가 애를 사랑하는 것보다 애가 엄마를 사랑하는 게 더 크고 중요한 거라고? 어쩐지 익숙한 한자가 하나 떠오릅니다. 이거 효(孝) 아냐? ㅋㅋㅋㅋㅋ

그렇습니다. 효경(孝經)에 마침 적당한 구절이 하나 있네요. 공자왈 "어버이를 사랑하는 자는 감히 남을 미워하지 않고 어버이를 공경하는 자는 감히 남을 업신여기지 않는다." 집에서 엄마아빠를 원껏 사랑해본 아이는 밖에 나가도 역시 남을 사랑할 줄 아는 어른이 된다는 거지요.

그렇다면 이런 구도 속에서 어버이는 어떻게 처신하면 될까요? 제 생각엔 별로 어렵지 않을 것 같아요. 쏟아지는 아이의 사랑을 받아줄 최소한의 자격만 있으면 됩니다. [에이아이]의 등장인물 모니카(엄마)는 주인공인 데이비드(아들)를 유기합니다. 사실상 죽이려고 한 거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를 향한 데이비드의 사랑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마치 자신을 죽이려 했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흔들림 없이 아빠를 사랑한 순(舜)임금 같군요. 데이비드는 엄마를 향한 사랑의 일념으로 모든 어려움을 뚫고 결국 엄마를 만나 행복을 쟁취합니다. 마치 아빠를 향한 사랑의 일념으로 모든 어려움을 뚫어낸 순임금 같군요. 어차피 애가 주인공이고 애가 사랑하고 애가 하드캐리하는 구도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부모는 적당히 장단 맞춰주고 살살 받쳐주고 날아오는 거 접수해주고 그러면 되는 거죠.

아무튼, 내가 아이를 위해 무언가를 퍼부어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면 뭔가 엄청 힘든 일처럼 느껴지는데 아이가 나에게 퍼부어주는 걸 적당히 응수해주는 정도만 해도 된다고 생각하니 세 마리 짐승새끼들의 부모된 입장에서 한결 마음이 가벼워집니다. 네 이놈 새끼들아 잘 들어라. 영화 잘 봤지? 너희는 누군가를 사랑할 줄 아는 마음을 가지고 태어났느니. 피하지 않고 받아줄 테니 어디 한번 나를 힘껏 사랑해보거라. 그 결과가 너희들 생각에 썩 나쁘지 않거들랑 나아가 세상 여러 다른 것들 역시 한껏 사랑하도록 하여라.

사랑과 정의의 이름으로

아멘



21
  • 조읍니다.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공지 티타임 게시판 이용 규정 2 Toby 15/06/19 31949 7
15155 일상/생각청춘을 주제로 한 중고생들의 창작 안무 뮤비를 촬영했습니다. 2 메존일각 24/12/24 332 5
15154 문화/예술한국-민족-문화의 정체성에 대한 소고 meson 24/12/24 277 2
15152 정치이재명이 할 수 있을까요? 72 제그리드 24/12/23 1558 0
15151 도서/문학24년도 새로 본 만화책 모음 6 kaestro 24/12/23 350 5
15150 게임최근 해본 스팀 게임들 플레이 후기 1 손금불산입 24/12/23 278 5
15149 사회그래서 통상임금 판결이 대체 뭔데? 7 당근매니아 24/12/23 599 11
15148 정치윤석열이 극우 유튜버에 빠졌다? 8 토비 24/12/23 824 9
15147 정치전농에 트랙터 빌려줘본 썰푼다.txt 11 매뉴물있뉴 24/12/22 1068 3
15146 의료/건강일종의? 의료사기당해서 올려요 22 + 블리츠 24/12/21 971 0
15145 정치떡상중인 이재명 56 매뉴물있뉴 24/12/21 1846 15
15144 일상/생각떠나기전에 생각했던 것들-2 셀레네 24/12/19 575 9
15142 일상/생각플라이트 시뮬레이터로 열심히 걸어다니고 있습니다~~ 7 큐리스 24/12/19 507 2
15140 정치이재명은 최선도, 차선도 아니고 차악인듯한데 43 매뉴물있뉴 24/12/19 1849 7
15139 정치야생의 코모도 랩틸리언이 나타났다! 호미밭의파스꾼 24/12/19 383 4
15138 스포츠[MLB] 코디 벨린저 양키스행 김치찌개 24/12/19 135 0
15137 정치천공선생님 꿀팁 강좌 - AI로 자막 따옴 28 매뉴물있뉴 24/12/18 747 1
15135 일상/생각생존신고입니다. 9 The xian 24/12/18 613 31
15134 일상/생각산타 할아버지는 알고 계신데.. 5 Picard 24/12/18 440 7
15133 도서/문학소설 읽기의 체험 - 오르한 파묵의 <소설과 소설가>를 중심으로 1 yanaros 24/12/18 299 4
15132 정치역사는 반복되나 봅니다. 22 제그리드 24/12/18 759 2
15131 여행[2024 나의 이탈리아 여행기] 0. 준비 7 Omnic 24/12/17 368 7
15130 정치비논리적 일침 문화 7 명동의밤 24/12/16 878 7
15129 일상/생각마사지의 힘은 대단하네요 8 큐리스 24/12/16 791 7
15128 오프모임내란 수괴가 만든 오프모임(2) 50 삼유인생 24/12/14 1884 5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