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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6/09/11 07:50:19
Name   기아트윈스
Subject   서원(書院)에서 한문 배운 썰
때는 학부생 끝물 시절, 전공 때문에 한문을 배워야 해서 한국고전번역원(구 민족문화추진회)에 다닌 적이 있어요. 08년 초부터 10년 말까지 3년간 주 5일 15시간 가량 배웠는데 그와 동시에 학부에서 21학점씩 듣느라 정말 몸이 녹아났던 기억이 나요.

당시 번역원에선 투 트랙으로 신입생을 선발했어요. 하나는 일반 신입생 (약 35 명), 다른 하나는 장학생 (약 15 명). 장학생은 입학시험 성적도 좋아야했고 면접도 더 빡세게 봤고 나이제한도 있었어요. 장학금 주고 열심히 굴려서 번역원 직원으로 양성하려는 거였죠. 장학금이 한 학기에 320만원이었나? 여튼 당시 문과생 한 학기 학비보다 더 많이 줬으니 서울시내 웬만한 한문 관련 학과 학생들은 이 코스에 들어가고 싶어했어요.

또 여름/겨울 방학이 오면 장학생들만 따로 모아서 2~3 분 선생님들과 함께 진짜 서원(書院)에 가서 3 주간 합숙 훈련도 실시했어요. 유교 경전이나 기타 레전설 명문(名文)을 배우고 외우고 외우고 외우고 외워서 시험도보고 하면서 스파르타조선식으로 훈련을 하고 나면 한문 실력도 쑥쑥 크고 장학생들 간에 유대감도 생기고 연애도 하고 가정이 무너지고 사회가 무너지고...

하지만 장학생으로 입학했다고 다 장학생으로 졸업할 수 있는 건 아니었어요. 15명으로 시작한 장학생 코스는, 잔인하게도, 매년 일부를 강등시켰어요. 생존경쟁이 있어야 공부를 더 열심히 한다고 생각해서 그랬나봐요. 첫 해에 5 명을 자르고 그 다음 해에 또 3~4 명을 잘라서 마지막엔 6~7 명 정도만 장학생으로 졸업시켜요. 이렇게 살아남은 장학생들은 선생님들과 함께 지낸 시간이 긴데다 대개 한문실력도 좋아서 관심과 애정을 독차지했지요.

저는, 에헴, 그러니까, 

...

일반 학생이었어요 -_-; 

나이제한 같은 건 문제가 없었는데 천성이 쫄보라 안전하게 일반 코스에 지원했거든요;; 한문 실력에 넘나 자신이 없었던 것.

여튼 일반 학생으로 한 1 년 하고 반 정도 다니다보니 은근히 장학생으로 지원하지 않은 게 아쉽더라구요. 배우다보니 제가 한문을 딱히 못하는 것 같지도 않았고, 꿀 같은 장학금도 부럽고, 서원학습 다녀온 친구들이 막 열라 친하게 지내는 것도 부럽고 그랬어요. 그러던 어느날,

"너, 장학생이 되어라."

선생님 한 분이 수업 끝나고 절 따로 부르시더니 그러는 거예요. 이유인즉슨 [피치 못할 사정]이 생겨서 한 자리가 비게 되었대요. 그래서 예산도 남았는데 그냥 썩힐 순 없고 해서 일반학생 중 하나를 승격시켜 넣으려고 하는데 제가 하고싶다면 넣어주겠대요. 물론 겨울방학 서원학습에서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하면 컷오프 될 테지만 그래도 해보겠냐는 거예요. 

뭐랏!? 이런 기회를 놓칠 순 없지요. 설령 떨어진대도 한 학기 어치 장학금은 받는 거구, 서원학습도 따라가보는 거구, 손해볼 게 없잖아요? 아이구 감사합니다 제발 넣어주세요 깨갱 깽 깽 핥 핥.

이렇게 뜬금 장학생이 된 저는 2학년 겨울방학 서원학습에 참가하게 됐어요. 경남 산청군 모 처의 서원에서, 창 밖에 하얗게 싸인 눈을 바라보며 고문진보 (古文真寶)를 외우고, 동네 강아지들과 놀고, 또래 친구들과 매일 밤 담소를 나누는 동화 같은 3주를 기대했으나.... 아휴 ㅋㅋㅋ 그때 그 [피치 못할 사정]이 뭐였는지 물어봤었어야 했는데 ㅋㅋㅋㅋ



(꼐속)



8
  • 다음화를 기다리며
  • 절단신공 너무하십니다
  • 다음화를 위한 추진력이 되어보아요.


님니리님님
그 땐 몰랐다...장학반은 회초리가 아니라 야구방맹이를 쓴다는 사실을...
기아트윈스
ㅎㅎㅎㅎ 때리진 않았어요. 다들 어른이니까;;
원문을 외워서 그걸 쓰고 이러나보네요
기아트윈스
쓰는 건 너무 오래걸려서 빈 칸 넣기 정도만 했어요. 대신 배운부분은 전부 외워야했지요;;
Ben사랑
서원이라니.. 사림의 성장 그리고 대원군 배울 때 빼곤 들은 적이 없는데.. 궁금합니다. 다믐 편도 부탁드려요.
기아트윈스
예. 다음 편도 거의 다 써놓긴 했는데 시간문제로 퇴고를 못해서... 오늘 일정이 끝나면 퇴고하고 올릴께요.
Beer Inside
피치 못할 사정이

'거세 이 정진?'
기아트윈스
앗... 제가 모르는 드립이에요. 해석 좀 ㅠ.ㅠ
Beer Inside
去勢以精進

중국에서 전해 내려 오는 '비급'중 하나인 '규화보전'은 한가지 단점이 있었으니 무공을 익힌 사람은 모두 후손을 생산하지 못했다는 것이였다.

그 이유는 그 비급의 마지막 줄에 쓰여진 이 말 때문이였는데. '去勢以精進'

하지만, 이것은 비급의 문장을 잘 못 이해한 후예들 때문이였다.

이 구절의 정확한 뜻은 'X빠지게 열심히 수련해라.'를 한문으로 옮기다 보니 발생한 실수였던것.....
기아트윈스
꺄아아
빨리 다음편 써주세요 현기증 난단 말이에요!
기아트윈스
GMT 17.00에서 18.00 정도 쯤 되면 하루 일이 끝나요. 한국시간 자정 정도? 그 때 퇴고해서 올릴께요;;
ama게시판,게임회사 이야기,타임라인..
의 뒤를 이를 홍차넷 킬러 콘텐츠의 냄새가 납니다.
기아트윈스
이런 부담이 ㅡㅡ;;; 쓰던거 다 지우고 다시 쓸까;;;
ㅎㅎ 아녜요 제가 조금 오버한 게 있어요.
열심히 공부하셨군요. 좋은 학생! 이 아니고 좋은 스파르탄일깜...
기아트윈스
돈을 준다는 데 뭐라도 해야죠 ㅎㅎ
Darwin4078
저도 중학생 때 서원에서 한문 배웠어요.

천자문부터 시작했었는데 무조건 전날 배운거 외워야 다음으로 넘어갔습니다. 그게 쌓여서 3분의1 지점에서 처음부터 외우고, 3분의2 지점에서 처음부터 외우고, 마지막에 하늘천따지 해서 온호이끼야, 해서 책을 뗐습니다. 그리고 사자소학으로 넘어갔는데 천자문 공부하던 대로 배웠습니다. 그 다음 동몽선습, 소학...순으로 올라갔습니다. 소학까지 하고 고등학교 진학해서 더 못배웠는데, 이후 정말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기아트윈스
완전 부러워요. 장학생들 중 꼭 어려서 글을 배운 친구들이 하나씩 있었는데 정말 수준이 달랐어요. 영어로치면 재미교포 하나 껴있는 느낌. 소학까지 하셨으면 단순 한자 수업이 아니라 현토 다 해서 '한문'을 익히셨겠어요. ㄷ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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