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16/08/30 22:10:52
Name   SCV
Subject   [예전 뻘글] 마지막 오리온
- 안보여.. 후..... 안보이네.

  그녀의 한숨이 밤하늘을 물들였다. 물들어봤자 까만 밤이겠지만, 그녀 같은 부드러움이 느껴진다.

- 그럼 정말 우리 둘 뿐인 건가?
  
   질문의 의미를 전혀 담고 있지 않은 문장을 발화(發話)하는 것은 비생산적인 일이었지만 그녀가 여전히 희망적인지 절망적인지를 알아내는 데에는 쓸만했다. 하긴, 더이상 희망적일 수도, 절망적일 수도 없으니 이래저래 쓸모없는 질문임은 틀림없다. 내가 기다리는 것은 그녀의 해맑은 한마디였건만, 그녀는 아무런 말도 없었다. 소통의 효용이 없는 언어라니, 텔레파시라도 익혀야 하나.

- 결국은, 그렇게 된 거네? 인간은..

  그녀의 목소리가 다시 밤을 밝혔다. 서글프게 느껴진다. 쓸쓸한 울음 같고 웃음 같은 침묵을 느끼는 순간, 소통하는 언어가 아닌 나 자신의 말하기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봤다. 그러나 말할 사람도, 들을 사람도 둘밖에 없으니 이런 고민조차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 뭐, 그런 셈이지. 무려 10년 동안이나 인류의 전 자원을 다 써가며 도출해낸 지극히 간단한 결과라고나 할까. 뭐, 이젠 문제의 답이 명료해졌으니 당분간은 푹 쉬어도 되겠네.
- 하지만 어딘가에...
- 이제 그만해. 꼭 우리뿐만이 아니라 해도 이미 인간은 피라미드의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어. 겨우 식물 보다 나은 존재랄까. 평생을 다 바쳐서 확인하려 해도 시간낭비일 뿐이야. 난 내 종(種)의 멸종을 여유롭게 맞이하고 싶어.
- 그래.. 그렇구나.

  그녀가 슬픈 눈으로 되뇌었다. 나는 눈을 감았다. 재킷의 앞주머니를 더듬어보니 오리온 담배 한 개비가 남아있었다. 너는 나보다 더 외롭겠구나, 하며 나는 금연을 다짐했다. 언젠가, 피워야 할 때가 있으리라.

  갑자기 한기가 밀려왔다. 계절은 인류에게는 즐거운 변화였겠지만 이제 인간에게는 또 다른 적이다. 그녀가 옷깃을 여미며 캠프의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를 쫓던 내 눈은 오리온을 찾았다. 안녕. 별자리를 읽어줄 사람이 없다면 너희는 다시 아무 상관없는 멀디 먼 가스 구체로만 남겠지 하고 곱씹으며 그녀의 뒤를 따라 캠프로 들어갔다.

  캠프 안에 들어서니 그녀가 난로를 피우고 있었다. 얼마 남지 않은 화석연료였다. 인간들은 지구에 남은 수많은 자원을 낭비하며 살았지만 스스로의 존재가치를 부정하고 생태계를 위해 번식력을 약화시키며 슬기롭게, 그리고 조용히 스스로 멸종해갔다.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내 망상에 불과하다. 많은 인간은 알 수 없는 이유로 점차 생식력을 잃었다. 인간이 멸종시킨 수많은 종에 비하면 평화로운 멸종이었다. 그래서 인간은 멸종해가며 공룡처럼 연료가 되지 않고 식물의 일부로 되돌아갔을 뿐이다. 복에 겨운 죽음이다. 기운 없는 표정으로 이것저것을 뒤적이던 그녀가 나에게 다가왔다.

- 이젠 어떻게 해야 하지? 사람들을 만나면 공동체를 구성해서 살아갈 준비를 마음속으로 수도 없이 했는데,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남은 우리는.
- 같은 종의 성별이 다른 두 개체가 있으니 번식을 시도해 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 응큼해.
- 야. 우리 붙어다닌 10년동안 별일 없었거든? ..... 나도 굳이 그러고 싶진 않지만, 멸종을 막을 다른 방법이 없잖아.
- 하지만, 난 월경을 할 수조차 없는걸. 마지막으로 월경하던 여자는 우리 어머니 쯤에서 끊겼어.
- 하긴 그렇구나. 그래.... 그렇구나.
- 우린 아담과 이브가 아니니, 어쩔 수가 없나 봐.

  캠프 안이 난로의 열기로 훈훈해지자 나는 밖으로 나왔다. 앞주머니에서 남은 오리온 한 개비를 꺼내어 물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 금연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내가 바라보고 있는 오리온도, 내가 피우는 오리온도 곧 사라지겠지.
  무언가에 이름 붙이는 일을 제외하고는, '인간이 쓸모 있는 일'이란 이제 거의 남지 않았다. 인간이 사라지면서 무너진 것은 문명도, 생태계도 아닌 이름들 뿐이었다.
  이름이 사라진 세상은 고요했고, 나는 이 고요한 세상이 좋았다. 내가 인간이라는 것을 가끔 잊은 채 살아가서 때문인지는 몰라도.
  
  담배가 거의 다 타들어간다. 문득, 내일은 땔감을 좀 구해 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을 벌써 멸종시키기는 싫다. 산 근처 밭이라면 담배 잎이라도 좀 구할 수 있을까. 그러면 인류의 멸종도, 조금은 늦춰질 텐데.



0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1748 창작[어쩌면 조각글 7주차?] 벽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 3 매일이수수께끼상자 15/12/10 7224 0
    6676 IT/컴퓨터[어플 추천] 핀크(finnq) 이정도면 거의 재무관리 끝판왕 18 기쁨평안 17/11/29 6836 2
    1419 역사[언어] 가카의 기원 20 기아트윈스 15/11/01 10037 4
    8164 오프모임[업데이트] 광주광역시 9.8(토) 번개입니다.(3차 시도) 28 메존일각 18/09/03 5398 9
    8229 꿀팁/강좌[엑셀월드] #1. 체크리스트 만들기 12 Iwanna 18/09/14 16169 6
    8267 꿀팁/강좌[엑셀월드] #2. 커플공강표 만들기 18 Iwanna 18/09/23 9254 4
    8333 꿀팁/강좌[엑셀월드] #3. 함수만으로 데이터 추출하기 11 Iwanna 18/10/06 10229 7
    8371 꿀팁/강좌[엑셀월드] #4. 데이터를 요약보고하기(1) 6 Iwanna 18/10/14 6911 5
    8382 꿀팁/강좌[엑셀월드] #5. 공부 타이머 + 체크리스트(1) 10 Iwanna 18/10/16 9825 10
    9300 꿀팁/강좌[엑셀월드] #6. vlookup, countifs, sumifs 2 Iwanna 19/06/11 7157 4
    9145 영화[엔드 게임 강스포] 루소형제의 Q&A 10 빠독이 19/05/01 3870 3
    187 기타[엘가] 위풍당당 행진곡 - 오르간에 대해 아시나요? 24 표절작곡가 15/06/03 9102 0
    14185 오프모임[역벙개] 한끼줍쇼 ~칡의 적상산 여행~ 13(대전) & 17~19 39 23/10/11 2185 5
    5501 문화/예술[연극 후기] 쉬어매드니스 4 와이 17/04/23 4303 2
    9549 창작[엽편소설] 빚어서 날카로운 물방울 2 착각범 19/08/15 3937 1
    14803 문화/예술[영상]"만화주제가"의 사람들 - 1. "천연색" 시절의 전설들 4 허락해주세요 24/07/24 879 5
    13053 일상/생각[영양無] 양심이 무뎌지면... 7 Picard 22/08/04 3053 8
    7857 방송/연예[영업글] 처음 써보는 프로듀스 48 참가자 시타오 미우 연습생 홍보글입니다. 30 세인트 18/07/16 7766 3
    2588 영화[영화] 독립영화 Removed 입니다. 4 까페레인 16/04/10 4410 3
    314 기타[영화] 쥬라기월드 소감 (스포일러 주의) 3 존코너 15/06/12 8208 0
    10108 기타[영화리뷰] 도대체 무엇을 터트리고 싶은 것인가 <백두산> 3 왼쪽을빌려줘 19/12/23 4495 1
    12753 정치[옆동네 펌] 손석희 앵커와 문재인 대통령 대담 20 Groot 22/04/26 4245 0
    9395 영화[예고편] 정두홍 주연 영화라는 <난폭한 기록> 1 파오 19/07/04 5004 0
    9238 방송/연예[예능 톺아보기 시리즈] 1. <대탈출>은 왜 대중성 확보에 실패했을까? 11 한신 19/05/27 7497 12
    3610 창작[예전 뻘글] 마지막 오리온 4 SCV 16/08/30 3336 0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