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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16/05/30 21:49:07 |
Name | Eneloop |
Subject | [단편] 시간을 정리하다 - Trauerarbeit |
5년 전, 스물 다섯 즈음에 쓴 글입니다. --------------------------------------------------------------------------------------- 시간을 정리하다 - Trauerarbeit 그간 이곳에 글을 남기지 않았던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 번째는, 이미 내가 내 컴퓨터 안에 기록할 곳을 만들어서 그곳에 기록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고, 두 번째로, 도무지 주변인들에게 보여줄 만한 몸과 마음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록은 줄곧 개인적인 글쓰기가 되어버렸다. 개인적인 글쓰기는 나름의 의미가 있지만 한계를 가진다. 감정적으로 교류가 없기에 계속 침잠할 수밖에 없고, 이론적으로도, 아무리 혼자 일기장에 글 많이 끼적여봐야 독단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신형철은 이병률의 시평에서 이런 문장으로 글을 시작한다. 기어이 사랑하며 살아보겠다 하는 마음과 이냥 헤어지고 죽어버리자 하는 마음이 번갈아 밀려왔다 밀려가며 파도를 만드는 것이다. 그 두 마음 중 어느 하나에 의지해 살 수도 있겠으나, 그 두 마음의 오고 감을 남 일처럼 들여다보며 살 수도 있는 것이다. 앞의 일보다는 뒤의 일이 더 아픈 일이다. 밀려오는 파도 말고 밀려나가는 파도가 힘이 세고 매듭 묶이는 일보다 매듭 풀리는 일이 더 유혹이라서, 모든 살아있는 것들은 때로 휘청거리곤 하는 것이다. 그만 저를 놓아버리고 싶을 때, 그러다 그대와 함께 무너지고 싶을 때가 있는 것이다. I 2010년 11월 2일 이후의 일들이다. 쓰레기라는 말을 듣고, 여행가방을 끌고, 제주도에서 정말로 혼자 돌아오게 되었을 때, 가장 먼저 J 생각이 났다. J에게 전화를 하고서, 택시를 탔다. M역까지는 멀지 않았다. 택시기사한테, 담배를 피워도 되냐고 물어봤다. 택시기사는 나를 흘끗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담배를 두 대 피우기도 전에 M역에 도착한 나는 J와 술잔을 나누면서 많은 이야기를 했다. 그 날 나는 집에 들어가지 않았다. 발길은 집 근처 모텔에 가 닿아, 바로 쓰러져 누웠다. 이상한 꿈을 꾸었다. 지금 상황과 전혀 관계가 없는 그러한 꿈을. 예전에 유학 갔던 미국으로 여행가는 꿈. 모두들 날 반갑게 맞이해줬고, 재미있게 놀았다. 하지만 여행은 길지 않았고, 곧이어, 역시나 상황에 알맞는 꿈을 꾸게 되었다. 그녀가 나에게 전화를 하는 꿈. “하, 자고 있지는 않았구만?” 그녀는 말했다. 어떠한 이야기가 오갔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내게, 다시 자신이 기다리고 있는 그쪽, 그녀가 있는 쪽으로 오라고 하는 내용이었다. 어쩌면 용서해줄 수도 있다는 것일까. 깨어나서 휴대폰을 확인해봤지만, 메시지 함에도, 전화 함에도 그녀의 이름은 적혀있지 않았다. 그 대신 삼성전자에서 전화가 왔다. 모니터 관련해서 오늘 방문을 드리겠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출장수리를 부탁했었다. 저녁 5시쯤 온다고 하기에 그러라고 했다. 다시 눈을 감았다. 잠을 잘 수밖에 없었다. 잠을 잘 수 있을 때까지 잠을 잘 수밖에 없었다. 잠에서 깨어나면 몇 초간 아주 평온하다. 그리고 이어서 기억들이 코끼리처럼 육중한 무게로 심장을 짓밟는다. 오후 1시 이후로는 더 이상 잘 수가 없어, 일어났다. 옷을 벗고 화장실로 갔다. 바닥이 차갑다. 뜨거운 물을 틀고서 몸을 씻어냈다. 다시 옷을 입고 가방을 끌고 모텔을 나와서 집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순간 “딸각”하는 소리가 났다. 길바닥을 살펴보니 방금 내 캐리어에서 떨어진 것인지, 아니면 원래 거기에 존재했던 것인지 모를 플라스틱 조각 하나가 있었다. 내가 발로 걷어차서 소리가 난 것일 수도 있다. 별로 중요해보이지 않았다. 계속 길을 걸어갔다. 50m쯤 앞으로 가다가, 저 플라스틱 조각이 왠지 몹시 중요한 것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각을 버리는 것은 나 자신을 버리는 것과 동일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 그러니까, 나는 어떤 것이든지 꽉 쥐고 있고 싶었다. 아주 실낱같은 것이라도, 희망의 조각일 수만 있다면. 집에 돌아와서 멍하니 앉아있다가, 문득, 소변이 자주 마려운 것 때문에 비뇨기과에 갔었던 것이 생각이 나서 비뇨기과에 전화를 걸었다. 균이 검출되었다고 한다. 이틀에 한 번씩 항생제 주사를 맞아야 하고, 총 10일간 약을 먹어야 한다고 한다.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순간 할 일이 더 생각났다. 네이트온으로 한 사람과의 관계를 완전히 끝내는 것이다. 그녀를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그녀와 헤어지는 이유가 된 한 사람. 그녀와 헤어지게 된 것은 아주 간단한 이유였다. 다른 여성과 문자로 대화를 주고받는 것을 목격 당했다는 것. 관계를 바로 깰 만큼 부적절한 말은 없었지만, 직관이 강했던 그녀는 무엇인가를 느꼈다. 쉽게 말해서 내가 하던 일이 ‘보험’이라는 용어로 치환될 수 있다는 것을 그녀는 느꼈던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상처받았고, 그 상처를 나에게 몇 배로 돌려주었다. 자신이 저주스러웠다. 그녀가 내게 말했듯이 내 자신은 아주 “쓰레기”였고, 누군가에게 상처를 준 사람이고, 그 상처를 몇 배로 되갚음 받아도 싼 놈이었다. 누군가를 보는 것이 두려웠다. 담배를 피워도 안정이 되질 않았다. 내가 이런 상태에서도 살아가야 하는지 의문이 들었다. 순간, 고등학교 졸업할 때 선물로 받았던 칼이 눈에 들어왔다. 칼을 가슴팍에 대 보았다. 잘 들어가지 않을 것 같다. 칼을 좀 갈아야겠다 싶어 베란다로 나와서 숫돌에 칼을 갈았다. 숫돌에 칼을 가는 행위는 굉장히 반복적인 행위이다. 마치 음악에서 반복적인 프레이즈를 사용해서 청자를 고조시키듯이, 칼을 일정한 각도로 쓸어올리고, 쓸어내리는 동작을 반복하면서 나는 무엇인가 치밀어오르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이내 울었다. 6년만의 눈물이었다. 칼을 물로 씻었다. 마지막으로 운 것이 고등학교 때였나, 중학교 때였나, 나는 거의 울지 않았다. 남자들은 대개 잘 울지 않는다는 게 사회의 통념이지만, 주변을 둘러보면 의외로 눈물이 많은 남자들을 볼 수 있다. 그 사람들이 부러웠다. 언제나 뭔가가 가슴에 고여 있는 느낌이었고, 실컷 울고나면 그것들이 모조리 눈 바깥으로 빠져나와 상쾌한 기분을 만끽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슬픈 영화를 보고 나서도 울고 싶었고, 부조리한 현실에 눈물짓고 싶었다. 쉽게 우는 남자는 별로 여자들에게 인기가 없을 지도 모르지만, 가끔 눈물을 보이는 남자는 매력적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오랫동안 경험을 하지 못해서였을까, 운다는 행위는 생각과는 달랐다. 낭만이니 매력이니 느낄 새도 없었다. 칼을 갈고 들어와서 보니 메신저로 전 여자 친구가 제주도는 잘 갔다 왔냐고 말을 걸고 있었다. “나 죽을 거야”라는 말을 남기고 침대로 뛰어들었다. 전화가 왔다. 무슨 일이냐고 계속 묻는 그녀, Y에게, 나는 죽을 거라고 말을 했다. 논리적이지 않게, 지속적으로, 반복적으로 말을 했다. 감정은 언제나 논리와는 관련이 없다. 지속성과 반복성과 관련을 맺고 있다. 사람들은 다 쓰레기야. 알아. 나도 쓰레기고, 근데 사람들은 당당하기라도 하지. 그러니까, 그래서, 사람들은 살아갈 수가 있는거야. 근데 나는 당당하지 못해. 그래서 나는 살아갈 수가 없어. 나는 보험도 들었었고, 그걸 들키기까지 했는데, 거기에 대해서 당당하게 뻔뻔하게 나갈 수도 없어. 아니 내가 애초에 그게 보험을 든건지 아닌지도 모르겠어. 쓰레기라는 말을 들었어. 나보고 쓰레기래. 근데 뭐라고 대답해 줄 수가 없었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어. 나를 정말 경멸하는 눈으로 쳐다봤어. 거기다가, 난……. 하하. 왜 이렇게 계속 눈물이 나오는 거지? 너한테 괜히 미안하다. 너하고 헤어질 땐 울진 않았는데. 지금은 정말, 이상하게도 눈물이 그냥 계속 쏟아져. S는 정말로 네가 쓰레기라고 생각해서 그렇게 말한 게 아니야. / 그럼 뭐야? / 제주도에서 너무 행복했고, 너한테 버림받기 싫어서, 너한테 상처받기 싫어서 너를 먼저 걷어찬 거야. / 예전하고 같은 이야기잖아. 뭐야. 라깡이 그러디? / 아니, 내가 그런 타입 인간이라서, 좀 알고 있는 거야. Y는 이어서 “가줄까?”라고 말을 했다. 정말로 와줬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러면 S에게 용서받을 수 없다. 왠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말을 Y에게 하면 “내가 가서 뭘 하는데? 죽어가는 놈 살리는 게 그렇게 큰 죄야?”라고 말할 것이고, 이어서 “그런 생각이 드는 것 자체가 관계가 이상하다는 거야.”라고 말을 할 것이다. 이상한 관계인건 맞다. S와 나의 관계는 전혀 수평적이지 않았다. 수직적 그 자체였다. 나는 고압적인 그녀의 태도를 사랑했다. 나는 S가 내게 완벽한 여자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고, 내게서 커다란 부분을 차지했다. S는 학문적으로도 나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었으며, 빌어먹을 몰락의 에티카를 내게 권하기도 했다. 특수하다고 할 수 있는 성적인 부분도 완벽히 맞았고, 음악적으로도 마음이 맞았다. 그녀는 내가 듣는 음악들을 “인정”해줬으며, 나 역시 그녀가 듣는 음악들을 사랑스럽게 생각했다. 한번 사람이 좋아지고 나면, 그 사람이 무슨 음악을 듣느냐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그녀와 그녀의 부속의 관계가 주종관계를 다시 찾는 것이다. 처음에는 그녀의 부속을 통해서 그녀를 판단하게 되지만, 이윽고 윗 좌석을 내주게 된다. S는 종종 아무런 귀띔 없이 순간적으로 날 불러내곤 했고, 나는 그녀의 집이 1시간 거리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그녀의 부름에 기꺼이 응답했다. 나는 그저 그녀 곁에 있으면 행복했다. 아무것도 더 필요하지 않았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그녀로부터 나오고, 그녀에게로 귀결되었다. 그녀 옆에 있기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포기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도 했었다. 근데 중요한 것은 ‘이상한 관계’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지속될 수 있느냐의 문제였다. 나는 그녀 옆에 있으면 절대적으로 행복했지만, 이 이상한 사랑의 지속성에 관해서는 회의를 품고 있었다. S는 우울증 약을 먹고 있었는데-전 여자친구인 Y와 마찬가지로-그 정도가 Y보다 심했다. 그녀는 가끔 우울할 때면 내가 말하는 것들을 무시하고서, 아주 독단적으로 이상한 행동을 하곤 했다. 가령 목적지도 없이 버스에 타고, 종점으로 갔다가 다시 그 버스에 타고, 한 바퀴 돌아서 종점으로 돌아오곤 했다. 옆에서 같이 있어야 하는 내게는 답답한 시간들이었다. Y는 자신이 필요하다면 가주겠다는 이야기를 반복적으로 했다. 하지만 나는 완강하지 않게 거절했다. Y는 그래도 8시쯤 가겠다는 이야기를 하고 전화를 끊었다. 눈물이 그쳤다. 신기하게 혼자 멍하게 있을 때에는 눈물이 나오지 않는데, 칼을 갈 때라든지, 누군가가 말을 걸면 눈물이 나온다. 비록 그 말이 현재 상황과 아무런 상관이 없을지라도, 그냥 눈물이 나온다. 잠시, 기분이 나아졌다. Y에게 오지 말라고 문자를 보냈다. 오지 말라고 문자를 보낸 것은 제발 빨리 와달라는 뜻이라는 것을 인지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단순히 눈물을 흘림으로써 잠시 안정되었던 기분은 다시 묻혀버리고, 나는 또다시 칼을 쓰다듬기 시작했다. Y는 8시에 온다고 했다. 8시에 온다는 것은 8시에 출발한다는 뜻인가? 아니면 8시에 도착한다는 것인가? Y의 메신저는 아직 꺼지지 않고 있었다. 만약에, 8시까지도 꺼지지 않는다면, 나는. 죽는다는 것은 모든 책임에서 벗어난다는 것이다. 책을 읽어야 한다는 책임, 한자를 배워야 한다는 책임,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책임, 부모님 생신선물을 해야 하는 책임, S의 생일선물을 해야 하는 책임. 학교에 나가야 하는 책임, 토익 공부를 하고 스펙을 열심히 쌓아서 회사에 들어가야 하는 책임, 아이를 낳고 가장을 꾸려야 하는 책임, 교양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책임, 매일 잠에서 깨어나서 이 세상과 접촉을 해야 하는 책임, 사람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 나가야 하는 책임……. 가족으로부터도, 사회로부터도 모든 책임을 면제받는다. 아주 어릴 때, 죽은 후의 세상이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면, 내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되어버리고 모든 것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면, 게임도 없고, 책도 없고, 음악도 없다. 희로애락도 없고, 시간도 없고, 캄캄한 어둠속, 어둠조차도 없는 그런 것이라면 얼마나 무서울까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현재 무엇인가를 경험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에 감사해했다. 죽음은 그런 경험의 단절을 의미하므로, 살아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지금 다시 한 번 죽음을 생각해보는데 예전만큼 무섭지는 않았다. 아주 조금은, 평화롭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 위선으로, 아까부터 계속 엘리엇 스미스처럼 심장을 찔러볼까 하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역시 가장 고전적인 손목 긋기가 내게는 가장 합당해 보인다. 바로 죽고 싶진 않다. 여기까지 글을 썼을 때, 삼성 서비스센터에서 전화가 왔다. 고객님. 지금 방문 드려도 괜찮을까요? 삼성 서비스센터에서 사람이 오기를 기다렸다. 만약에 이 사람이 오기 전에 내가 죽어버린다면 이 사람은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아, 내가 그 사람하고 마지막으로 통화했는데, 뭔가 이상해보이긴 했어. 내가 조금만 신경을 썼더라면 이 사람이 죽지는 않았을 텐데. 하는 생각을 할까, 아니면 금세 잊어버릴 기억이 될까. 아마도, 전혀 신경쓰지 않겠지. 그냥 이상한 하루의 기억으로 남을 뿐. 이윽고 초인종이 울렸고, 나는 문을 열어주었다. 삼성의 사람들은 참 친절하다. 언제나 웃고 있고, 상대방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노력한다. 평소라면 기계적이고 가식적이라 생각했겠지만, 지금의 내게는 정말로, 또 하나의 가족처럼 느껴진다. 네 고객님. 화면에 자꾸 보라색 줄이 생긴다고 말씀을 하셔서, 제가 판넬을 가져왔는데요. / 네. / 일단 한번 어떤 증상인지부터 확인해보겠습니다. / 아. 네. 여기 보시면, 흑백 화면을 띄울 때, 이렇게 중간 중간 보라색이 생기는데요. / 목소리가 자꾸 갈라진다. / 보시면 이게 / 지금 당장이라도 이 내 앞에 있는 모르는 남자의 목덜미를 부여잡고서 / 픽셀이 아니라 / 살려달라고 / 픽셀 사이에 줄이 생기는 / 살려달라고 / 거에요. / 살려달라고 / 아 그럼 일단 판넬을 / 살려달라고 / 한번 갈아보도록 할게요. / 당신은 나를 바라보고 있는건가요. 결국 판넬을 갈아도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아내고, 그 사람은 돌아갔다. 다음번에 다시 방문 드리겠다고 하고서. 다음번 방문에 나는 이 자리에 있을까. 8시가 되었다. Y는 과제로 바쁜 듯하다. 내가 기다리고 있는 건 사실 Y가 아니다. S이다. 욕조에 물을 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글을 이어 쓰기 시작했다. 미안해요. 미안해요. 미안해요. 난 당신을 정말 사랑했던 것 같아요. 내가 그 사람에게 당신과 사귄다고 이야기 하지 않은 이유는 그저 불필요하다고 생각해서였어요. 무의식적 차원에서는, 당신하고 헤어지고 나면 그 사람에게 가서 위로받으려는 생각이 있었을지도 모르겠어요. 네. 섹스 말이에요. 근데, 난 지금 생각해보면 그 사람하고 섹스하고 싶지 않아요. 당신이 내가 필요한 전부였어요. 그 사람은 전혀 날 두근거리게 만들지 않는걸요. 그러고 보면, 그 사람한테 이야기 하지 않은 건, 그 사람이 상처받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어요. 그 사람도 좋은 사람이거든요. 근데 예전에, Y랑 사귀기 전에는 같이 놀다가, Y가 생기자 연락 뚝 끊고, Y랑 헤어지자 다시 연락을 했었거든요. 이런 거 보면 저 쓰레기 맞긴 한 것 같네요. 근데 그 사람에게 또 연락 안하다가, 여자 친구가 생겼다고 말하면 조금 감정이 상할 것 같았어요. 저는 정말, 제 쾌락만을 위해서 그 사람에게 말을 하지 않은 것이 아니에요. 좀 횡설수설하고 있네요. 글이라는 게 원래 머릿속에서 나오는 대로 쓴다고 글이 되는 게 아닌데 말이에요. 근데 지금 이미 눈앞에서 지나가버린 문장을 다시 볼 힘이 없어요. Y가 말한 것처럼 당신이 제게 쓰레기라고 말한 게 진심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제가 아는 어떤 사람은 “화 내는건 말이지, 그게 완벽히 오해가 아닌 한, 화내게 만든 사람이 가치 판단할 문제가 아니라 화 난 사람이 결정할 문제야.”라고 말했거든요. 맞는 말 같아요. 당신은 제 마음 속에 있는 바닥을 봤다고 생각하겠지만, 저는 정말, 당신이 너무 좋아요. 지금도. 앞으로도 아마 계속 좋을 거에요. 솔직히 당신하고 사귀는 게 조금 불안정하긴 했지만, 당신은 그 모든 불안정을 뛰어넘는 매력을 가지고 있잖아요. 저한테 말했잖아요. “세상에는……. 남들이 모르는 자신만의 매력을 발견해주고 사랑해줄 수 있는 사람이 존재하는데, 그걸 우리는 연인이라고 부르지”. 난 당신의 연인이에요. 당신은 내 연인이에요. 당신처럼 아름다운 사람은 드물어요. 없어요. 못 봤어요. 당신이 처음이에요. 그런데, 당신 어머님에게 함부로 말하는 건 조금 고쳤으면 좋겠어요. 어머님은 정말 멋진 분이에요. 저희 어머니 급으로 존경해요. 그런 분한테 상처주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물이 다 받아졌어요. 9시 45분이에요. 2시 45분은 아니네요. 물로 들어갔다. 아이폰을 머리맡에 뒀다. 엘리엇 스미스의 Bye를 틀었다. 오른손에 칼을 쥐었다. 음악을 아주 작게 틀었다. 짧은 노래가 반복되어 재생되었다. 곡은 반짝거리는 글리스로 끝난다. 그 글리스를 놓치게 될 때, 손목을 그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규칙을 만든다는 것 자체가 죽을 자신이 별로 없다는 뜻이다. 바깥에서 노크소리가 들렸다. 어머니였다. 칼을 가지고 들어갔다 나온 것을 제외하면 평소 하던 목욕이 되어버렸다. 바깥으로 나와서 칼을 숨기고 몸의 물기를 닦아냈다. 방으로 들어갔다. S가 내 생일선물로 만들어준 인형, 파니를 끌어안았다. 어머니가 들어오셨다. 자냐고 나지막하게 나에게 물어볼 뿐인데, 현재 내 감정상태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문장일 텐데 왜 눈물이 나오는지 모르겠다.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애를 써봤지만, 어머니는 내 눈가를 만져보았다. 어머니 손이 시원했다. 울면 얼굴이 뜨거워진다. 별 말씀을 하진 않았다. 아무런 의미도 없는 말이었다. 어머니가 방으로 돌아가시고 나서, 계속 눈물을 쏟아냈다. 마치 물이 받아지고 있는 욕조처럼 계속 물은 차오르고 물이 차면 넘친다. 그래서 한껏 쏟아내다 보면 잠시 멈춘다. 하지만 물은 계속 틀어져 있다. 이내 잠에 빠져들었다. 이상한 꿈을 꿨다. 제주도 같은 곳이었다. 햇살이 밝았고, 열대지방 가로수가 늘어져 있었다. 아주 가슴 따뜻해지는 색감을 가진 그곳에서 어머니와 길을 걸어갔다. 어머니는 빨간색으로 칠해진 모든 집이 우리 친척들을 포함한 일가의 집이라고 말했다. 그 중 한 곳에 들어갔다. 우습게도, 군대 병사들을 모아놓고 불교 집회 중이었다. 군대 동기가 나보고 웬일이냐고 말을 건넸다. 어머니는 성큼성큼 불단 앞으로 나가셨다. 어머니는 그 불교 집회를 주관하는 사람이었다. Y는 가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문자를 보내지 않았다. 그녀에게도 연락은 없었다. 삼성 AS기사에게도 문자는 없었다. 눈을 다시 감았다. 잠이 오지 않았다. 더 자고 싶다. 내가 무언가를 떠올리기 시작하면 그것들이 돌아와 내 심장을 밟아올 것이다. 그 전에 어서 다시 잠을 자고 싶다. 잠은 오지 않는다. 12시 50분이었다. 다시 물을 받기 시작했다. 욕조 안으로 들어갔다. 파니도 욕조 위에 앉혔다. 넥타이로 왼팔을 묶었다. 정맥이 잘 보이도록.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내가 기다리고 있는 것은 S로부터의 연락이다. 계속 칼을 만지작거렸다. 내가 원하는 것은 S로부터의 연락이다. 내가 바라는 건 자기파멸이 아니다. 칼을 내려놓고 문자를 보냈다. “미안해요. 잘 있어요.”. 시간이 계속 흘러갔다. 답장은 없었다. 전화를 걸어봤다. 받지 않는다. S의 어머님에게 전화를 걸어봤다. 아르바이트 하러 갔다고 한다. 아아. 이 사람은 아무렇지도 않구나. 순간 예전에 S와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그러니까, 제가 죽으면 되는 거에요? 어느 맥락에서 그 말이 튀어나왔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나는 그녀에게 내가 그녀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보여줘야 했던 것 같다. 죽는 것보다 더 깨끗하고 곧게 그것을 보여주는 것은 없다. 하지만 그녀는 어디까지나 말들의 파편으로 끝나버릴 수도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런 건 니가 말로 하는 게 아니라 니가 죽고 나서, 내 귀에 니가 죽었다고 들려와야 하는 거야. Y에게 전화를 걸었다. Y는 수업 중이었지만 날 걱정해줬다. 당장 칼 내려놓으라고 했다. 그리고 S의 전화번호를 달라고 했다. 더 이상 자신이 초라해질 수가 있을까. 전 여자 친구에게 전전 여자 친구가 전화를 한다. 이 자식 자살하려고 하니까 어떻게든 해달라고. 발작적으로 웃음이 나왔다. 시간은 계속 흘러갔다. 물이 미지근해진 만큼 손목 살은 흐물흐물해졌다. 문득, 칼을 손목에 찔러 넣었다. 붉은색 실타래가 풀어져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녹아서 없어진다. 아름다웠다. 눈을 감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이 상태로 내려 긋기만 하면 된다. 왜 난 이것을 하고 있지 못할까. Y 때문일까? Y가 이렇게까지 해주는 게 나는 정말 고맙긴 하다. 근데 Y가 보고 싶고, Y가 안아줬으면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것들은 내 깨져버린 자아에 물을 주기 위해서일 뿐 결정적으로 Y 때문에 죽지 않는다고 말할 순 없다. 웃긴 건 예전에 Y하고 사귀다가 깨지고 나서 침울해 있을 때 S가 위로해줬다는 사실이다. 그때 S는 나보고 나르시스트라고 말했다. 넌 나르시스트야. 자기애 쩔지. 니가 지금 슬퍼하고 있는 이유도, 니가 슬퍼하는 게 낭만적이라고 생각해서 그래. 사람은 누구나 주변 모든 것들을 감상적으로 받아들이지. 친지의 죽음도, 심지어 자신의 죽음도,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들이 있어. 장애인의 성욕이라든지, 성 불구라는 것, 혹은 못생겼다는 것. 그러니까, 혼자 낭만에 빠져서 허우적대지 말고 어서 나와. S에게 그 위로를 받고 나서, Y로 인해 생겼던 우울감은 싹 가시게 되었었다. 근데 다시 그 위로를 떠올려봐도 S로 인해 생기는 우울감이 가시진 않는다. 난 지금 분명히 혼자 낭만에 빠져서 허우적대고 있는 것일 텐데. 근데 왜 그 사실을 알아도 예전처럼 위로가 되질 않는 걸까. 결국 중요한건 S가 Y대신 내게 왔었다는 것이지 그 위로가 아니었던 것이다. 어머니 때문인가? 물론 어머니께 죄송스러운 일이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어진다. 기껏 키웠더니, 군대도 갔다 왔는데, 갑자기 덜컥 죽어버리는 자식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어머니는 지금 집에 계시지 않는다. 집에 계셨더라면 난 절대로 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어머니는, 지금 집에 계시지 않는다. 잠깐, 지금 나는 왜 내가 죽지 못하고 있는지 이유를 찾고 있는 건가? 죽지 못하고 있는지 이유를 찾기 시작했다는 건 분명히 죽을 가능성이 많이 없어 보인다는 것이다. 왼손목이 근질거렸다. 피가 멎어있었다. 한참 전부터 그랬던 것 같다. 어쩌면 S보다 더 좋은 여자가 내게 나타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아직 내게 주어진 시간은 남아있으니까. Y에게 문자가 왔다. “그딴 년 빨리 잊어버려”. 욕조 밖으로 나왔다. 하지만 아직도 내 일부는 이 날들에 몸을 걸치고 있다. II Y는 내게 문명이라는 게임을 권했고, 시간은 조금씩 흘러가기 시작했다. 매일같이 일어나자마자 게임을 하고, 누우면 바로 잘 수 있을 정도까지 게임을 하는 생활이 반복되었다. 그래도 무슨 정신이었는지, 밤을 새고서라도 2일마다 1번씩, 비뇨기과에는 오라는 대로 꼬박꼬박 갔다. 약도 꼬박꼬박 먹었다. 중심을 찾고 싶었다. 생활을 찾고 싶었다. 지금 하고 있는 이 행동들은 분명히 ‘일시적’인 것이라고 믿으려 노력했다. 게임을 하는 건 시간을 흐르게 만들기는 하지만, 기억들이 짓눌러오는 것을 막아주지는 못했다. 조금씩 시간이 지나면서 머릿속이 얽힌 라면처럼 불어 오르기 시작했다. S가 아니라, 네이트온에서 관계를 끊어버린 그 사람, 내가 조금 더 성숙했더라면, 내 자신의 순수함을 위해서, 과거와의 단절을 위해서 그 사람에게 상처를 주면서 관계를 끊지는 않았겠지. 끊임없이 담배를 피웠다. 내 안에 있는 것들 중에 사랑받을 수 있을 법 한 게 보이질 않는다. 기타를 치기 시작했다. 게임을 하는 것보다는 나은 일 같아 보였다. 예전에 S에게 만들어줬던 노래들을, 한 곡 한 곡 다시 부르고, 녹음했다. 사랑노래이다.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노래들이다. 옆에는 내가 있다고, 무서운 꿈을 꾸더라도 아무 걱정 하지 말라고 말하는 노래들이다. 이제 이 노래들은 어디로 가게 되는 것일까? 이 노래들이 의미를 가지고 있었던 때가 있긴 했나? 3년 전, S는 초록색 옷을 입고, 전단을 돌리고 있었다. 나 역시 초록색 옷을 입고 그 옆에서 지나다니는 사람에게 끊임없이 인사를 했다. 같은 선거사무소에서 일하는 S의 모습이 계속 눈에 띄긴 했지만, 내 수줍은 성격 탓에 쉽게 말을 붙여보진 못했다. 그러다가 간신히 말을 붙여본 게 “담배 피워요?”였다. 그녀는 생긋 웃으면서 대답했다. 전 무알콜 무타르 무카페인 페스코 베지테리언이에요. 그 선거는 패배했지만, S를 알게 되었다. 상황이 급격하게 전개된 건 아니었다. Y와는 이미 헤어진 상태였지만, 뭔가가 남아있었고, 아직 새로운 사람을 알기에는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무엇보다, S에게는 연인이 있었다. 그저 평생 동안 잊히지 않을 데이트를 한번 했을 뿐이다. 근데, 데이트의 내용이 중요해서 못 잊을 데이트인 것은 아니다. 여름 날, S는 내게 예술의 전당에서 하는 매그넘 전시회에 가자고 이야기를 했다. 안 그래도 가려고 했던 전시회였기에 흔쾌히 승낙했다. 곰이 사진을 찍는 사진을 찍은 엘리어트 어윗의 사진이 기억에 남는다는 것 이외에 별다른 것이 없었다. 아직은 어색했고, 서로에 대해 많이 알고 있지 않았다. 문제는 다음날이었다. Y에게 문자가 왔다. “오늘 매그넘 전시회 가자”. 아무런 죄를 짓지도 않았는데 뭔가 죄책감을 들었다. Y하고 사귀는 것도 아닌데, S하고 사귀는 건 더더욱 아닌데. S와 걸어갔던 길을 Y와 똑같이 걸어갔다. 엘리어트 어윗의 사진은 그대로 그곳에 걸려있었다. 바깥으로 나오자, 어제와 똑같이 햇볕은 강하게 내리쬐었다. 그 해 겨울 나는 이등병이 되었다. D에게서 책을 가져오라는 문자가 왔다. D는 발목을 다쳐서 거동이 좋지 못하다. 몇 달 째 휠체어 위에서 살아가다가 이제야 목발로 진화했다. 가져오라고 말한 책을 주섬주섬 챙겨서 바깥으로 나왔다. 방구석에 있는 것 보다는 바깥에 조금이라도 더 나와 있는 게 내게 좋은 일인 듯 느껴졌다. 그런 기억을 가지고 있는 화장실과 방에 계속 쳐 박혀 있어봐야 건강이 나아질리 없지 않은가. 바깥은 이미 어둑어둑해져있었다. 실수로 내려야 하는 정류장에 못 미쳐서 내렸다. 바깥에 자주 나가지 않다 보니 이런 일이 생기는 것 같다. 항상 나는 ‘다음 정류장’을 ‘이번 정류장’으로 혼동하곤 한다. 한 정거장 정도 걷는 게 문제가 되진 않는다. 오히려 건강에 좋을 수도 있다. 앞에서 어떤 아저씨가 비틀거리면서 오토바이를 끌고가고 있다. 잠시 후 오토바이는 아저씨와 함께 같은 방향으로 누워버렸다. 서둘러 달려갔다. 다리 부분이 오토바이에 눌린 듯하여 오토바이를 들어 올리면서 다리를 빼라고 했다. 「괜찮으세요?」 「아… 좀 아프긴 한데… 괜찮을 거 같아요.」 괜찮아 보이지 않는다. 일단 술 냄새가 많이 난다. 초점도 흐릿하다. 같이 오토바이를 일으켜 세운 후에 오토바이를 옆쪽에 댔다. 「고마워요 학생.」 「술 많이 드신 거 같은데, 몰고 가시지 말고, 세워두고 다른 거 타고 가세요.」 「네. 고마워요 학생. 걱정하지 말고 갈 길 가요.」 손을 휘휘 내젓는다. 걱정이 되지만, 내가 뭔가 더 해줄 수 있는 건 없다. 그와 나는 타인이다. 나는 저 사람을 알지 못한다. 나는 저 사람을 알지 못한다. D는 늦게 오는 걸 싫어한다. 나는 앞으로 가야 한다. 저 사람이 길바닥에 앉아있다고 해도. 다시 저 오토바이를 몰고 갈 것 같아도. 뒤를 돌아봤다. 오토바이 손잡이에 손을 올리고 있다. 「아저씨! 이러시지 말고요!」 다가가면서 외쳤다. 아저씨는 손을 놓고서 차가운 길바닥에 주저앉는다. 「…끌고 걸어가려고 한 거야. 끌고 걸어가려고.」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시고, 키 주세요.」 아저씨가 키를 내 손에 놓는다. 아직도 이 사람은 타인인가? 「잠시만 기다려요.」 근처 가게로 들어가서 술 깨는 약을 찾아봤더니 한 종류도 없다. 빌어먹을. 꿀물이라도 손에 들고서 가게를 나왔다. 「이거라도 드세요.」 아저씨는 59세. 비행기 기술자였다고 한다. 「집에 들어가 봐야, 아들 딸내미들 보고 싶지도 않아.」 「왜요?」 「다 이제 그럴 나이니까.」 「…」 「나하고는 상관없이 살아갈 나이니까.」 아저씨 손이 차갑다. 어느새 난 이 아저씨하고 손을 잡고 있었다. 내 삐쩍 마른 손과는 참 대조적이다. 평생 일을 하고 살아온 손. 내 희끄무레한 손이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데, 이 사람은 타인 맞다. 「…근데 왜 계속 오토바이 타고 가려고 하시는 거에요?」 「집에 가서 자야 내일 새벽에 출근하지.」 「버스 타고 가시면 되잖아요?」 「4시엔 버스가 없어.」 내가 오토바이를 몰수는 있다. 하지만 이렇게 무거운 오토바이를 몰아본 지는 3년도 더 되었고, 사람 태우는 건 자신이 없다. 머릿속에서 어머니가 말씀하신다.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들은 세상에서 가장 쉬운 문제들이야. 정말 어려운 문제들은 돈하고는 관련이 없어. 주머니에서 돈을 꺼냈다. 택시를 세웠다. 오토바이 열쇠를 아저씨에게 넘기고, 아저씨를 태워 보냈다. 난 D에게 서둘러 가야하고, 저 사람은 타인이다. 이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저 사람은 타인이니까. 덩그러니 남은 오토바이가 어색해보였다. D가 날 부르지 않았다면, 내가 한 정거장 일찍 내리는 실수를 하지 않았으면, 저 사람은 분명히 죽었을 것이다. 하지만 타인이다. 잠겨 있는 문을 흔들고, 벨을 눌렀다. D가 투덜거리면서 나온다. 「넌 왜 남에 집에 오면서 벨부터 안 누르고 문부터 여는 거냐?」 「여기가 무슨 남의 집이야.」 무뚝뚝하게 대답하면서 성큼성큼 집 안으로 들어갔다. D의 침대에 가방을 던졌다. 「책 저 안에 있어.」 「왜이리 늦었어. 밥은 먹었냐?」 「안 먹었어.」 「라면 끓여줄까?」 「어.」 절뚝절뚝 라면 끓이러 가는 D 뒤에서 난 기타를 손에 쥐었다. D는 내가 기타 치는걸 좋아하지 않는다. 우물우물 S에게 만들어줬던 곡들을 나지막하게 노래했다. 기타 소리가 잦아들 무렵 라면 끓이던 D는 말했다. 니가 한 써어티쯤 되면 지금 일 생각하고 손발이 오그라들거다. 이 인간이 하는 위로는 대개 다 이런 편인데, 이런 식의 위로는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런 일은 없을 거라고 말을 하게 되면 나는 유치한 어린아이로 전락하게 되는데, 그렇다고 그의 말을 긍정할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다. 그래도 질문은 계속 머릿속에 남았다. 그의 말이 옳은 것일까? 20대 중반을 유치한 감성에 빠져서 지냈다고 생각하면서 얼굴 붉히게 될까? 「라면 다 끓었다.」 「무슨 라면이냐?」 「채식주의 순라면.」 「이거 맛없다던데.」 「말도 안돼. 누가 그러냐.」 「전여친이 그러더라.」 「좌빨전여친? 아니면 에티카전여친?」 각각 Y와 S를 지칭하는 저 말들은 D의 작품이다. D는 이런 무례한 이름을 잘도 짓는다. 「에티카.」 「이게 얼마나 맛있는 라면인데.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고 해라.」 「아무리 맛있는 라면이라도 형이 끓이면 다 맛없을 거 같다.」 「닥치고 처먹어라. 내가 끓이면 다 맛있다.」 입 먹어봤다. 맛이 어떤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자동차에 연료 채우듯이 밥 먹는 일상이다. 「맛있지 않냐?」 「내가 원래 라면에 뭐 안 넣어서 먹는데 워낙 맛이 없어서 참치라도 넣어먹고 싶다.」 「참치하고 닭가슴살 있는데 넣으려면 넣어 먹어라.」 「닭가슴살은 좀 별로야.」 「왜?」 「난 페스코니까.」 「너 고기 먹잖아.」 「그건… 어쩔 수 없을 때 가끔.」 「그게 무슨 페스코냐.」 「가능한 한 페스코야.」 「그딴게 어디 있냐. 그리고 채식주의가 졸라 비논리적인거다. 사람은 원래 잡식성 동물인데 왜 채식을 하냐.」 「…」 난 원래 페스코가 아니었다. 고기를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고기를 먹지 않는다고 표방할 정도는 아니었는데, S는 그런 날 지속적으로 괴롭혔다. 삼겹살 집 앞을 지나가기라도 하면, 시체 타는 냄새라고 눈을 찌푸렸고, 내가 맛있겠다고 중얼거리기라도 하면 그 날은 내 정신이 초토화 되는 날이었다. 「봐봐. 소나 돼지나, 다 우리의 친구라고!」 「네.」 「안 먹으면 친구가 될 수 있어. 근데 먹으면 똥이 돼!」 「음음.」 「명백하잖아! 왜 먹는 거야!」 「…S씨도 생선은 먹잖아요.」 「…그건 아직 내가 내공이 부족해서 그런 거고. 10년쯤 지나면 생선도 안먹을거야.」 눈앞의 D에게 말했다. 「…안 먹으면 친구가 될 수 있고, 먹으면 똥이 되잖아!」 D는 기가 차서 말도 안 나오는 듯 손을 내저었다. 「그나저나, 니가 하도 몰락의 에티카 보라고 해서 찔끔 봤는데.」 「어때?」 「신형철 정말 글 무지 잘 쓰더라.」 「김현에 비견될 만 하다는 얘기는 어떻게 생각해?」 「에이 그건 좀 무리가 있지.」 「왜?」 「마치, “독일 현대사”를 쓴 사람하고 “독일 나치정권”을 쓴 사람하고 비교하는 격이다.」 「무슨 말이야.」 「그러니까, 사실상 더 큰 범위를 포괄하고 있는 사람이 일단은 상급이라고 봐야 한다고. 김현은 커다란 틀을 가지고 있었지만, 아직 신형철은 그렇지 못한 거 같다.」 「신형철이 내가 쓴 글에 평론 달아주면 좋겠다.」 「신형철은 착해서 “쓰레기 같다”고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고, “음… 다른 일을 해보시는 게 어떨까요?”라고 말할 거다.」 「라면 정말 더럽게 맛없군. 개한테 줘도 안 먹겠어.」 마침 라면도 다 먹은 참이었다. 국물을 개수대에 버리고, D의 침대 위에 있는 내 가방에서 책을 꺼낸 뒤에 다시 가방을 둘러멨다. 「근데 니가 지금 우울하다고 밍기적대는것도 다 귀족병인거 알지?」 참 단도직입적이다. 아까 본 아저씨 손이 머릿속을 지나갔다. 알아. 알고 있다고. TV를 보지 않고 살아도 지금 힘겹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건 잠시만 거리로 나와 봐도 알 수 있다. 추운 날씨에도 할머니들은 폐지를 모으고 있고, 아이들은 밤 2시 가까운 시간에 학원에서 나온다. 친구들만 해도 취업해야 한다고 도서관에서 열심히 토익 책을 보고 있다. 나 말고 모든 사람들이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같이 살아간다고 해서 그게 같은 세상일까. 아까 아저씨와 나는 손을 잡았던 것일까. D는 신발을 신고 있는 내게 스티로폼으로 된 조그만 박스를 줬다. 「이게 뭐냐?」 「우리 어머니가 너 주라신다. 집에 가자마자 잊지 말고 냉장고에 꼭 넣어라.」 「뭐냐니까?」 「안 넣으면 썩어서 전두환 튀어나온다.」 집에 돌아온 나는 잊지 않고 낙지상자를 냉장고에 넣었다. III S와 헤어진 이후로 계속 밤에는 파니를 껴안고 잔다. 가끔 집에 방문한 D에게 목격되기도 한다. 니가 무슨 여고생이냐고 어이없다는 투로 한마디 내뱉지만, 밤에 쓸쓸해지는 건 어쩔 수가 없다. 항상 느끼던 체온이 더 이상 그곳에 없다. 그런데도 파니를 끌어안고 자는 이유는 간단하다. 아직 향기가 남아있다. 더 이상 S의 목덜미를 맡을 수는 없겠지만, 파니에게는 S의 향이 남아있다. 하지만 아무리 파니를 끌어안고 자더라도 나는 조금씩 말라가고, 꿈속에서 또다시 꿈을 꾼다. 꿈속의 꿈조차 깨어나는 건 불쾌하다. 한 달 만에 노래를 하나 만들었다. 『꿈은 언제나 현실보다 행복해요』. 정말 내가 봐도 무기력한데다가 없어 보이기까지 하는 제목이지만, 내게는 적절했다. 요즘 들어서 음악을 들을 수가 없다. 아무리 우울한 음악을 듣더라도 너무 밝게 들려 불경스러웠다. 이 수렁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 J가 운동을 권해서 운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매일이면 집 근처에 수영장으로 가서 수돗물과, 남이 뱉은 침과 애들 오줌이 뒤섞여있는 물을 섭취하고 돌아왔다. 운동을 하는 건 우울한 기분을 달래는데 확실히 효과를 발휘하긴 하는데, 그 때 뿐이었다. 마치 나선으로 된 계단을 올라가는데, 실수로라도 S의 연상을 하게 되면 계단이 푹 꺼져버려 처음부터 다시 올라와야 하는 느낌. 결국 내가 S를 극복할 방법은 없고, 구멍을 남겨둔 상태로 잊어야 할 것 같았다. 나는 왜 죽을 수도 없다는 것을 알면서 끊임없이 침잠하게 되는걸까. 파니를 껴안고 의자에 앉아 J와의 대화창을 열었다. 「그 곰 인형은 뭐냐?」 「내 생일날 S가 준 인형이야. 이름은 파니다. 파니 핑크. 근데 남자애야.」 「……」 「나보고 이름을 지으라고 했었는데, 보다시피 얘 색깔이 핑크색에 가까운 주황색이라, 난 여자인줄 알고 이렇게 지어버렸지. 그런데 마음에 들어 하더라.」 보통 얘한테 이런 말을 하지는 않는다. 이놈은 남자고, 나도 남자고, 남자끼리는 당연히 이런 대화 자주 하지 않는다. 참 웃긴 풍경이다. 스물네 살 남자가 군대 다녀와서 곰 인형을 껴안고 있다. 확실히 자연스러운 모습은 아니다. 이런 모양새가 될 줄 알았더라면 차라리 여자로 태어날걸 하는 생각이 든다. 「넌 곰 인형이 살아있는것과 동격이라는 거, 이해할 수 있냐?」 「아니 난 철저히 현실주의자라.」 「난 그게 안 돼.」 「나도 안 돼.」 「아니, 난 현실주의자가 되지 못한다는 이야기야.」 S는 뽀송이라는 곰 인형을 데리고 있었다. 근데 그것은 인형이 아니었다. 여행을 갈 때면 항상 데리고 갔고, 자신이 집에 없을 때에는, 누군가 뽀송이를 건드리는 것을 굉장히 싫어했다. 항상 정말로 아이처럼, 앉혀주든지,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덮어줬다. 뽀송이가 그 이외의 모습으로,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곰 인형처럼 헤프게 널브러져 있는 모습은 볼 수 없었다. 지금 심정으로는 뽀송이가 되고 싶다. 보는 사람이 어떤 시각을 가지고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보여지는 주체는 결정되는 것이다. 마치 색깔처럼, 실제로 우리가 보는 색들의 빛깔은 그것의 진정한 성질이 아니라, 단순히 반사하는 색일 뿐이다.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보다는, 사랑받는 인형이 더 좋은 삶이 아닐까. 삶이라고 할 수 있다면. 「가끔 뽀송이를 보다 보면 얘가 살아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어.」 「…좀 무서운 이야기이군.」 「애가 눈이 정말 그윽해. 무심하고. 어떻게 보면 굉장히 다정해보이기도 했어.」 좋아하는 사람과 평생 같이 있을 수 있는 확률이 가장 높은 건, 생물이 아니라 무생물이다. 생물은 반드시 변한다. 사이가 나빠질 수도 있고, 죽어버릴 수도 있다. 그러니까, 빌어먹을, 인형으로 태어나고 싶다. 난 인간으로 태어나면 안 되는 것 아니었을까. 「근데, 난 S가 뽀송이를 그렇게 대하는 게 참을 수 없이 매력적으로 보였어.」 「힘들진 않았고?」 「공항검색대에서, 직원이 “거기 곰 인형은 여기 바구니에 넣어주세요”라고 말해서, 계속 화내고 삐져있었어.」 「힘들었구만.」 「왜 뽀송이가 우리하고 같이 게이트로 들어가지 못하고, 바구니에 담겨져야 하냐고.」 S는 정말 경이로운 존재였다. 그런 유아성, 의존성, 비현실성과, 시인의 감성, 지식인의 감성, 심지어 DC인들의 감성조차도 모두 혼재한 상태로 존재하고 있었다. J는 날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나는 그런 그녀를 마음깊이 받아들였다. 내가 손가락이라도 뽀송이 눈 근처에 대기라도 하면 “하지 마! 뽀송이 첨단공포증 있단 말이야!”라고 S는 말했다. 식사하면서도 뽀송이는 테이블 위에 앉아서… 「근데 있잖아.」 「응.」 「남자는 강해야 해.」 「…」 「당연한 이야기라고 생각을 하겠지만, 말이야. 남자는 강하지 않으면 원하는걸 얻을 수가 없어.」 「여자도 마찬가지 아냐?」 「여자도 마찬가지이지만, 남자는 특히나 그렇지.」 「그러고 보니 S를 업고 삼청동 언덕을 오르락내리락 한 적이 있었지.」 「…육체적인 힘이 문제가 아니라.」 대충 무슨 말인지는 알긴 한다. 남자는 강해야 한다. 어릴 때부터 수백번이고 들은 클리쉐이지만, 분명히 뭔가가 있으니까 매번 사용되는거 아닐까? 「강하지 않으면 착해질 수도 없고, 뭔가 하고 싶어도 휘둘리게 되어있어.」 「응.」 「그러니까, 일단 중심을 잡으라는거야. 미안한데 나 먼저 자야겠다.」 시간을 보니 3시가 가까워오고 있었다. S와 있을 때면 항상 몸이 무거웠다. 몸이 무거우면 중심을 잡지 못하고 비틀거린다. 잠들기 전에 방을 뒤적이다 그녀에게 받았던 편지들을 다시 읽어보게 되었다. 10. 08. 06 금. 나비에게. 여전히 넌 내게 단꿈처럼 느껴져. 너랑 같이 있는 시간은 분명 행복하고 아늑한 흥취 속에서 흘러가. 하지만, 결여에 대응하는 충족은 아닐 거야. 넌 무언가 초현실적으로 느껴지거든. Gurb Song의 가사처럼 넌 어느 날 갑자기 부엌으로 날아든 한 마리 새처럼, 아니, 그보다 더 초현실적이야. 부엌으로 새가 날아든 꿈을 꾼 것처럼 느껴져. 달콤하고 짜릿해. 그치만 꿈에서 깬 뒤에 다시 같은 꿈을 꾸기 위해 수면을 고대하는 일이 드물 듯이 너 역시 내게 그래. 너에게 아무런 기대도 품고 있지 않아. 이 세계에 대한 깊은 포기를 무화시키는 무언가가 분명 꿈은 아닐 거야. 내가 사람들을 다감하게 대할 수 있는 이유는 인간에 대한 깊은 포기 때문이야. 모든 치졸함과 나약함과 관성에 젖은 채 죽어가는 사람들의 잔인함을 매 순간 순간 목도하면서도 인간을 아낄 수 있는 이유는, 그 시궁창 같은 악취를 묵인하며 살아갈 수 있는 이유는, 인간이 시궁창과 이음동의어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착각이 내겐 닿지 않기 때문이야. 난 항상 그 증거를 내 정동의 무늬들을 통해 확인해. 그래서 아찔한 매혹이 온다 해도 난 잊지 않을 수 있어. 너도 나처럼 별 볼일 없다는 걸. 가증스럽고, 한심하고, 비겁하고, 역겹고…… 지루하기까지 한 바닥 위에 네 귀여운 표정들이 생동한다는 걸. 내가 널 사랑하게 된다는 건 내가 너랑 껴안거나 키스하는 순간에 우리의 바닥을 괘념찮아 하게 된다는 거야. 종국엔 서로의 바닥에 절망하게 된다는 거야. 날 또다시 절망하게 만드는 타인을 선택해야 한다면 너로 하고 싶어. 내가 네가 내 것임의 것이 될 수 있을까? 난 너에게 절망할 여지를 내게 새기는 일에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있어. 오히려 강하게 염원하고 있어. 하지만, 내가 그렇게 되지 못 하고 있는 이유는 내가 너의 진가를 알아보지 못해서가 아니야. 난 오히려 이 세상의 누구보다 너의 진가에 몸서리치며 감탄하고 있으니까. 너가 얼마나 특별한지 난 누구보다 낱낱이 알고 있어. 그 앎 역시 누구보다 내게 절실하게 유효해. 그럼에도,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내가 사랑에 빠지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내가 지쳤기 때문일 거야. 난 사실 지쳤어. 네가 내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난 감사해. 네가 내 옆에 있던 순간이 있었던 것만으로 감사해. 더 이상 바라지 않아. 더는 바라고 싶지도 않아. 너가 행복해졌으면 좋겠어. 네가 나로 인해서 허탈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 술김에 하는 말인지 모르지만, 네가 나에게 연연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네 마음이 아프면 내 마음도 아파. 너랑 정이 들수록 난 더 그렇게 될 거야. 난 그걸 견딜 자신이 없어. 내 비참한 외부 앞에 무력한 날 견디고 싶지 않아. 난 이미 살아있다는 이유로, 내가 누구의 아픔도 덜어줄 수 없음에 슬프도록 가담하며 살아가고 있어. 너가 많이 보고 싶지만, 보지 않아도 괜찮아. 난 이미 널 만난 적이 있으니까. 그걸로 충분해. PM 11:51 카페에서. 적어도 S는 나보다는 강했다. 그건 정말 누가 판단하더라도 마찬가지일거다. 문득, 사람이 얼마나 뻔뻔해질 수 있냐에 따라서 삶의 질이 결정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자기 자신이 믿는 바를 끝까지 믿고 사는 사람들이 위대해보였다. 차라리 종교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차라리 돈을 신봉하기라도 했으면 좋겠다. 나는 신뿐만 아니라 어느 것에도 믿음을 가질 수 없게 되어버린 듯하다.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IV 새해벽두부터 Y에게, 감기가 걸렸다는 문자가 왔다. 집에 담가놓은 모과차가 있기에 들고 찾아갔다. Y는 게슴츠레한 눈으로 문을 열어주더니, 터덜터덜 다시 방으로 들어가서 침대에 누웠다. 모과차는 냉장고에 넣어두고, 사온 감기약과 쌍화탕을 차려줬다. Y는 아무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약을 삼키고 다시 누워서 눈을 깜빡였다. 「더 잘래?」 「너무 자서 지금은 잠이 안오는거 같아.」 「그럼, 내가 지금 문득 궁금해진 게 있는데 물어봐도 되냐?」 「어.」 「S 얘기인데.」 「해봐.」 10월 초 S와 같이 홍대에서 강의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냥 같이 저녁이나 먹으려고 했었는데, 시간이 늦어서 밥은 물 건너갔고, S가 강의 듣는 곳에 따라 들어가게 되었다. 전혀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 갑자기 있게 되어 어리둥절했지만, S는 내 손을 잡아 끌어가, 같이 맨 뒷줄에 앉았다. 강사는 씨익 웃으며 S에게 말했다. 「오, 쟤가 남자친구?」 「네.」 「근데, 왜 자리가 거기야?」 「수업시간에 뽀뽀하려고요.」 S의 천연덕스러운 대답에 내 얼굴은 빨개졌고, 강사의 얼굴에는 약간의 미소가 번졌다. 어째서인지 수업 도중에 나를 포함한 몇 명의 학생들은 강사에게 질문을 받게 되었다. 「만약에, 만약에 지금 매력적인 이성이 나타난다면, 그리고 그 사람과 함께라면 새로운 세상을 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면, 지금 사귀고 있는 사람과 어떻게 하실 겁니까?」 S가 나를 보고 있지는 않았지만, S의 주의가 나를 향하고 있었다. 「아, 그런 일은 없을거에요. 지금 이미 새로운 세상을 보고 있는데요.」 「아니, 그런데 또 나타나서, 아, 이 사람과 함께한다면 정말 뭔가 내가 다른 사람이 될 수 있겠다. 싶다면요?」 「…그 사람하고 만난다고 해도, 또 새로운 사람이 안 나타날 보장 있나요. 전 그 사람한테 안 갈거에요.」 「…그거 어떻게 보면 옆에 있는 S한테 매우 실례인데, 만약에 S가 그저 그렇다고 해도 그대로 있겠다는 이야기 아니에요?」 당했다. 아무리 무의미한 것이더라도 처음 이야기를 반복했어야 한다. 식은땀이 흘렀다. 「S씨는 어떻게 할거에요?」 「환승해야죠.」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Y가 말했다. 「으이그 병신아.」 「니가 그렇게 말 안 해도 충분히 나도 내가 병신 같거든?」 「그럼 지금 생각해봐. 어떻게 말하는 게 100점이었을까?」 「그때 분위기가 좀 그래서 내가 “절대로 안 나타나요!”라고 반복적으로 말을 못했는데, 다시 저런 상황이 벌어진다면, 무조건 절대로 안 나타난다고 우겨야지.」 「땡, 그건 잘 줘봐야 98점.」 「100점은 뭔데?」 「그냥 가르쳐주긴 좀 그렇고, 3년 뒤에도 모르겠다면 알려주지. 계속 고민해봐.」 「젠장.」 늦게나마 내 얼굴에 조그만 미소가 지어졌다. 매일 산책 다니던 산에서 비밀장소를 발견했다. 몇 년 전에는 뚫려있던 길이 플레이트로 막혀있길래 훌쩍 뛰어 넘어갔더니 폐허가 하나 나왔다. 원래는 뭐가 있던 자리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모든 게 뒤섞여 있었다. 콘크리트 조각과 철근이 뒤섞여있는 건 이해하겠는데, 중간에 조그마한 텃밭이 있질 않나, 바가지, 수도꼭지, 돗자리에, 비닐 포대까지 널려있었다. 손과 귀를 녹여대면서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해가 질 때 까지 폐허를 돌아다녔다. 한 쪽 너머로는 한강이 보였고, 한 쪽으로는 산이, 한 쪽으로는 주택가가, 한 쪽으로는 공장이 보였다. 귀퉁이마다 사람들은 분주하게 오갔다. 이곳에 언제 무엇이 세워질지는 모르지만, 그 이전까지는 이곳의 이 기묘한 분위기를 즐겨보고 싶다. 봄이 오면 얼어있는 밭에 누군가가 농사를 시작할 지도 모르겠다. 귀에 이어폰을 꽂았다. 언니네 이발관 노래가 흘러나온다. 모든 게 사라져가는데, 아무것도 할 수 없었네. 잊을 수 없을 것만 같던 순간도 희미해져갔어. 노래를 따라 부르니 입에서 입김이 나온다. 공장 굴뚝 위로는 매연이 나오고, 사람들은 마스크를 쓰고 강가를 돌아다닌다. 「안녕.」 문득 말이 튀어나왔다. 생각은 뒤를 잇는다. 안녕. 당신은 누구였는지, 당신이 나를 사랑했는지, 같은 꿈을 꿨는지, 모두 다 희미해졌지만, 여기는 그런대로 아름다워요. 눈이 내리면 더 아름답겠죠. 여기에는 건물이 다시 세워질까요? 그랬으면 좋겠지만, 정말로, 그런대로 아름다워요. 당신과는 같이 존재할 수 없는 이곳. 풀이 나지 않더라도, 건물이 세워지지 않더라도, 누군가가 살지 않더라도, 당신이 없더라도. 바람이 세게 불었다.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안녕. -------------------------------------------------------------------------------------- 이 글은 제게 많은 도움을 줬습니다. 처음으로 끝까지 쓴 놈이라 나름 뿌듯하기도 했고, 감정을 베어 옮겨담은 기분이라 고통을 경감할 수도 있었고요. 이런 작업이 제 직업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지금 보면 물론 부끄러운 부분이 한두개가 아니지만) 저는 내일부터 글과는 전혀 상관없는 직종에 종사하게 되었습니다. 산다는 게 이런건가, 미묘한 기분이 들어 당시의 글을 올려봅니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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