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16/05/16 17:08:18
Name   묘해
Subject   [조각글 26주차] 두 사람이다
주제
두 명이서 어디론가 가는 이야기

조건
평소보다 조금 더 길게 써주시면 좋겠어요

합평 방식
분량은 자유고 합평방식은 자유롭게 댓글에 달아주시면 좋겠습니다.

맞춤법 검사기
http://speller.cs.pusan.ac.kr/PnuSpellerISAPI_201504/


합평 받고 싶은 부분
문장, 감정 묘사

하고싶은 말
배경음악을 들으면서 읽어주세요.  ☆클릭☆ -> https://youtu.be/saGohR1NEME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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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피>

524
뭍을 떠난 지 정확히 524일째 되는 날 다시 뭍에 올랐다. 신발 밑창으로 전해지는 흙의 촉감은 대지의 느낌이 아니다. 대기에 퍼진 축축하고 습한 느낌이 신발 안에도 가득 차서 발톱 틈에도 끼인 것 같다. 보급 운동화 발끝으로 땅을 톡톡 쳐봤다. 역시 예전의 땅이 아닌 것 같다. 땅에서 피어오르는 흙내음은 비릿하고 약간의 황 냄새가 섞여 있다.

사피. 서둘러야 한다. 해가 지기 전에 돌아와라.

식수와 식량을 보급하기 위해 함께 배에서 내린 가디언이 도심지가 있었던 방향으로 향하며 귓속말을 건넸다. 돌아간다니 어디로 말인가.

선발대는 장비를 점검하면서 부지런히 뛰어갔다. 말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그들도 곧 참극이 지나간 자리를 보게 되겠지. 선발대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나는 짐수레와 둘만 남겨졌다. 적막만 가득하니 오히려 안전한 느낌이다. 이게 언제까지 갈진 모르겠다.

짐수레를 끌고 아스팔트를 따라 걸었다. 비프가 쥐여준 지도에 의하면 이 길 끝에 공터가 있는 보트 관리사무실이 있다. 비프도 네아를 안다. 그러니깐 나와 네아를 배려해준 것이리라. 덜컹 철퍼덕

길 중간에 뭐가 있다. 왼손에 든 지도, 오른손으로 잡은 수레, 시선은 왼손 지도와 현장을 계속 비교하다 보니 바로 밑 장애물도 파악을 못 했다. 발을 걸었던 장애물은 이상하게도 지도를 움켜진 내 손과 비슷하게 생겼다. 손은 어깨까지만 있다. 그리고 누군가의 볼을 어루만졌었을 손의 주인은 길 옆 덤불 밑에 누워있다. 배를 타러 여기까지 이동했던 사람이 틀림없다. 덤불 옆에는 짐가방과 유모차가 있다. 하지만 비극은 무릇 만인에게 공평한 것이라, 가방의 주인도 유모차에 앉아 있던 아이도 이렇게 길옆에 누워 있다.

감상에 젖는 것도 잠시, 뒤돌아 보니 수레에 실어뒀던 우리도 역시 나동그라져 있다.

아.. 네아. 미안해. 널 잊은 건 아니야.

호주머니에서 비프가 넣어준 마스크와 장갑을 꺼내 썼다. 우리를 수레에 올리고 팔은 주인 옆에 놓아뒀다. 잠깐 묵념을 해줄까 했지만, 사치란 생각이 들었다. 지금 이 시대에는 어울리지 않는 인도적 행위.

수레를 끌고 8분쯤 더 걸어가니 관리 사무소가 나왔다. 비프는 술만 먹으면 만화가가 되고 싶었다고 부끄럽게 말하곤 했다. 지도에 창작열을 얼마나 쏟아부었는지 길치가 헤매지도 않았다. 이 또한 나와 네아를 생각해준 것이리라.

삐걱대는 문을 밀고 들어가니 바닥에 먼지와 쓰레기와 종이가 잔뜩 있다. 보급 운동화는 군화라서 이런 것쯤은 그냥 밟고 지나가도 된다. 예전의 나라면 이런 어지러운 상태를 못 참았을 것이다. 쓰레기를 치우고 흩어진 종이는 모두 주워다 데스크에 올려뒀을 것이다. 그러면 네아는 뒤에서 팔짱을 끼고 그런 날 못마땅하듯 바라봤을 것이다.

사피. 깔끔 좀 그만 떨어. 우린 갈 길이 멀다고. 팔짱 밑으로 쭉 뻗은 네아의 왼쪽 다리는 허둥지둥하는 나를 재촉하면서 바닥을 퉁퉁 쳐댔지. 그런데 지금은 퉁퉁 소리도 없다. 다 옛날일 뿐인.

보트 관리사무소 뒷문을 열고 나가니 비프 말대로 공터가 있다. 수리하려고 보트에서 뗀 부품이 한쪽에 쌓여 있다. 여기에 바지 호주머니에 있는 성냥으로 불을 붙일 수 있을 거다. 서두르면 해가 지기 전에 노을을 보며 걸을 수 있으리라. 524일 만에 뭍에서 노을을 보다니... 네아는 노을을 보며 산책하는 걸 참 좋아했는데.

생각을 털어내고 보트 부품을 공터 중앙에 모았다. 바지 주머니에서 꺼낸 성냥은 그새 내 땀에 축축해져서 불이 잘 안 붙는다. 사무실에 라이터가 있을까. 아니면 성냥을 조금 말릴까.

성냥 머리에 있는 붉은색은 붉은 인이야. 인은 푸른 색도 있어. 무덤 가에서 도깨비불 파란 거 알지? 그거 시신이 부패하면서 나는 인화수소가 자연 발화하면서 띄는 빛 색이야.

네아는 공대를 졸업했다. 무슨 쓰레기 처리시설에서 일했다. 몇 번을 설명해줬는데도 난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었는데 어쨌거나 그녀의 직업은 엔지니어였다. 그 덕에 우리가 배에 오를 수 있었지. 그리고 지금은... 우리 안에 있다.

성냥 한 알을 쥐고 허공에 흔들었다. 붉은 인. 푸른 인. 네아가 그때도 성냥갑에서 성냥을 꺼내 내 눈앞에서 흔들면서 이야길 해줬는데 기억이 안나. 네아의 목소리가 낮게 테이블을 타고 흘렀는데 난 온통 네아의 눈을 들여다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날 내 호주머니 안에는 반지가 굴러다니고 있었지.

성냥을 그었다. 노란 불꽃이 붙은 성냥을 나뭇더미 위에 던졌다. 날씨는 축축하고 대기는 습기를 머금었는데 이상하게 불이 잘 탄다. 보트 수리하던 사람이 윤활유라도 발라뒀던 건가.

공터엔 두명이 있는데 네아는 아직도 조용하다. 닥터후가 네아에게 준 약이 정말 독한가 보다. 닥터후는 자신을 돌팔이라고 불렀는데 네아와 몇 시간이고 벤조피렌이 어쨌니 벤조다이아제핀이 어쨌니 이야기를 했다. 난 그들의 대화를 조용히 듣곤 했는데 사실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른다. 나중에 네아가 설명해주면 그때도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바라보곤 했지.

배는 아주 컸는데 아무나 승선할 순 없었다. 정치인들, 군인들, 기술자들, 의료인들, 그리고 과학자와 공학자가 우선이었다. 아이들이 그다음. 가임기 여성이 그다음. 네아는 군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나도 승선시켜주지 않으면 배에 올라타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놨었다. 군인은 곤란해하더니 비프에게 권한을 넘겼다. 네아는 비프에게 이력을 설명했고 망망대해에서 고립된 배,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배출하는 것, 배에서 나올 쓰레기 같은 걸 설명하면서 왜 네아와 내가 함께 배에 타야 하는지 설명했다. 나름대로 이력을 쌓은 역사 선생님인데 이곳에선 쓸모가 없었다. 생존에 우선한 것은 로마나 나폴레옹이 아닌 기술이니깐. 아비규환이 항구 코앞까지 들이닥치고 있고 배는 한정된 공간이다. 꼭 필요한 사람이 아니라면 짐만 된다. 그러니까 이렇게 쉽게 한 인간의 가치를 바로 앞에서 뭉갤 수 있겠지. 인류가 쌓아올린 이데올로기와 인권헌장은 재난 앞에서는 성냥 한 알보다 무가치해지는 것이겠지.

불이 활활 타오르자 나는 우리의 자물쇠를 풀었다. 벌써 네아의 얼굴까지 검은 핏줄과 반점이 올라왔다. 땀으로 미끈거리는 장갑을 벗어 던졌다. 가슴에 귀를 대보니 아직 들썩인다. 숨을 쉬고 있어. 심장이 뛰고 있는데. 피가 흐르는 인간인데 왜 나는...




<네아>

520
드디어 육지에서 움직임이 사라졌다. 나는 사피와 육지를 떠나는 마지막 함선 그린티호를 탔다. 당시 과학자들은 30일이면 좀비가 남은 인류 하나까지 찾아낼 것이라 점쳤다. 그리고 또 50일 지나면 극심한 기아상태를 맞이해 동족포식과 살육이 일어나리라 예측했다. 좀비 내분이 길어야 100일이면 끝날 것이고 살아남은 좀비들 역시 기아와 환경에 적응하지 못해 100일이 지나면 모두 죽을 것이다. 군인은 40일 후 220일째 되는 날 상륙을 주장했다. 나는 여기에 300일을 더 주장했다. 사람의 시체와 좀비의 시체가 땅에서 썩어갈 시기에 굳이 그 지옥을 볼 필요는 없다. 그리고 300일이면 최후의 좀비 후에 자연이 청소할 수 시간이다. 뭍에 올랐을 때 시체와 폐허가 아니라 대지에서 수풀과 식물이 있을 것이다. 생태계가 적응하고 처리해나갈 시간을 충분히 준다. 자연의 자정작용이 진행 중일 때 인간이 땅을 밟아야 한다.

닥터후와 비프는 내 편을 들어줬다. 난 이 배에서 유일한 환경공학자로 배 안의 수질처리시스템과 공기순환장치, 기타 오염처리시스템을 모두 책임지고 있다. 좀비의 끔찍함은 그것이 가진 경악할 전염력과 감염체 위험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좀비 시신에서 배출될 알 수 없는 오염물질에도 있다. 이 전쟁에서 인류가 최후 생존자가 되더라도 좀비가 부패하면서 나올 물질과 병균을 처리할 수 없다면 토양은 인류를 받아들일 수 없다. 땅에서 자라난 동식물도 위험할 수 있다. 과학기술과 진보이념이 커버하지 못한 그 틈새를 뚫고 나온 좀비균은 순식간에 대도시를 점령하고 시골과 반도를 공격했다.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인간도 원인을 알 수 없는 실체의 공격 앞에서는 순순한 동물로서의 본능만 표출했다. 어쩌면 좀비가 살육한 인간보다 인간 종 자체의 내분과 갈등에 의해 국가가 더 빨리 무너졌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520일째 되는 날 마침내 육지에서 마지막 대형종의 움직임이 사라졌다. 어쩌면 설치류와 바퀴벌레는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다. 바퀴벌레와 설치류, 곤충이 있다면 오히려 잘된 일이다. 그만큼 생태계가 회복 불가능한 것은 아니란 의미다. 전기가 끊겼으니 지구 궤도를 도는 위성은 무용지물이다. 오직 망원경과 배의 관측기구로만 육지의 움직임을 포착할 수 있다. 비프와 가디언은 4일 후 가까운 항구에 정박하기로 했다. 아마도 육지에서 통조림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는 숯과 필터를 찾아야 한다. 건전지도 가져와야지. 지금 배 후미에 있는 배출 파이프에 걸린 수초만 제거하고 나면 가방을 챙길 수 있을 것이다. 어떠면 육지에서 사피가 그렇게 노래 부르는 책을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요즘은 노자랑 장자 이야기를 자주 하는데, 아무리 들어도 동양철학이 서양철학이나 종교와 달리 동양국가의 정치, 사회제도, 문화를 구성한 그 해설을 이해할 수가 없다. 하지만 사피의 목소리를 듣는 것은 좋다. 사피는 내가 경청하는 것을 알아차리면 더 조근조근 설명해준다. 문장 속에 불필요한 단어도 수식어도 없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그 자체로 수학공식과 같이 깔끔하고 아름답다.

수초 더미를 끄집어 올리는데 너무 무겁다. 대체 무슨 놈의 수초가 이렇게 미친년 머리카락 마냥 엉켜 있나 모르겠네. 그렇게 작업팀과 끙끙대며 배출 파이프 입구에 걸린 것을 모두 끄집어 올렸다. 갑판에 끌어올렸던 뭉텅이를 바다로 밀어 넣는 순간, 수초 더미 끝에서 검은 입이 달려들었다. 입속에 빨간 목구멍이 보였다. 검은 입이 순식간에 내 왼손을 물어뜯었고,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사피가 가디언의 총을 뺏어 들어 입이 달린 머리를 쏴버렸다. 목 위에 있던 것은 검은 바다로 굴러떨어졌다. 작업팀에게 갑판을 정리와 후처리를 지시했다. 사피가 티셔츠를 찢어서 내 손에 감아줬다. 닥터후 진료실로 내려가면서 복도 불빛으로 사피의 얼굴을 흘끔 봤다. 화가 난 것 같아..

비프와 가디언은 임시총회를 수집했다. 520일이면 더는 좀비가 생존해있어선 안 된다. 그런데 왜 수초더미에서 좀비가 발견되었단 말인가. 식수와 의료품은 모두 바닥났다. 애초 예상보다 더 오랜 기간을 바다에서 머물렀고 더이상 지체했다간 이 배 자체가 망망대해에서 무덤선이 되고 만다. 위험을 부담하고서라도 뭍에 올라야 하지 않나. 시끌벅접한 토론이 진행되는데 닥터후가 들어왔다.

시드니 인근입니다. 온대 기후라고요. 바닷물이 따뜻해서 체온저하를 막아줬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수초에 걸려서 바닷속으로 가라앉지도 않고 부유했던 것 같네요. 이례적입니다. 예정대로 진행해도 됩니다.

총회는 나흘 뒤에 시드니 항에 정박하기로 했다. 그리고 나의 처분은 규칙대로 사피에게 넘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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