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16/02/08 16:35:42
Name   이젠늙었어
Subject   담배 <2>
금연의 시작은  갑작스러웠습니다. 추석 연휴의 시작일이었고 연휴가 끝나면 바로 또 주말이었기에 5일 연휴의 첫날이었죠. 여느날과 같이 머리맡의 담배갑과 라이터를 챙겨들고 화장실로 가려는 시점이었습니다. 바스락 거리는 담배갑의 비닐의 감촉이 손끝에 전해진 순간 갑자기 머리속에서, 에휴~ 그만 두자...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냥 안피기 시작했죠.

십수년간 매일 이어지던 습관을 버리고 약간 비현실적인 기분속에서 가족과 함께 추석준비를 했습니다. 아내의 심부름으로 장을 봐오고, 전을 부치고 등등...

모친도 흡연자였기에 집안 곳곳에 담배가 있었습니다. 이부자리의 머리맡에는 내가 피우던 것들이, 거실에는 모친의 담배가, 책상위에도 있었으며 책상서랍속에는 여러갑의 뜯지 않은 담배들이 저를 휴혹했습니다. 그들은 사방에 있었죠. 저는 그들을 외면했습니다...

... 만 점점 저항은 힘들어져만 가고 있었습니다.

금연이 제게 미치는 영향은 두 가지였습니다.

첫번째는 습관의 단절에 의한 어마어마한 상실감입니다. 기상 전후, 식사 직후, 화장실에서의 똥담배 등등 담배는 제 생활의 일부였죠. 이런 모든게 뜯겨버린 당시의 저는 도대체 뭘 해야 좋을지 모를 상황이었습니다. 식사후의 허전함, 담배 없는 커피 한잔의 공허함, 술자리에서의 좌불안석 등등 모든게 어색해진 생활이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집안 곳곳의 담배는 저를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니가 감히 나를 버리겠다고? 라면서요.

둘째는 니코틴 중독에 의한 금단증상이었습니다. 갑자기 손끝이 바르르 떨리고 저려지며 정서적인 불안정과 자면서 식은땀을 한바가지 쏟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불쾌하고 괴로운 증상은 언제나처럼 담배 한까치를 입에 물면 엄청난 쾌락과 함께 저하늘로 날아갈게 틀림 없겠죠.

하지만 저는 저 두 가지의 괴로움을 넘어서 결국 담배를 멀리하는데 성공했는데요, 그 비결은 너무 재밌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담배끊는 과정이 정말, 너무, 엄청나게 재밌었습니다.

어느 순간 습관의 단절과 체내 니코틴 결핍에 의한 미쳐버릴것 같은 제 자아가 분열되기 시작했습니다. 괴로와하는 A와 이를 관찰하는 또 다른 나 B 였죠. 저는 담배를 못피워 미쳐버릴것 같은 사람이면서, 동시에 그를 괴롭히며 조롱하는 또다른 인간이기도 했습니다.

괴로운 A는 다행히도 괴로운 속에서 점점 쾌락을 느끼게 되었어요. A는 메조키스트적 성향이 있는 사람이었는데 담배를 진심으로 섬기는 노예였죠. 근데 최근 어떤 연유에선지 주인이 바뀌게 되었죠. 노예는 예전 주인에게로 돌아가고자 했습니다만 새로운 주인이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새 주인에게 반발하고 대들었으나 돌아오는건 끔찍한 고통뿐이었습니다. 근데요, 그 고통이 점점 쾌락으로 변하는 거였습니다.(제가 쓰고있으면서도 뭐 이런 병신같은게 있나 싶네요.)

A의 새 주인인 B는 노예를 처음 가져본 사람이에요. 처음에 B는 A를 잘 대해줄려 했었습니다. 그런데 자꾸 말안듣고 옛 주인을 그리워하는 A가 점점 미워졌습니다. 그래서 학대하기 시작했습니다. 자기의 새 노예에게 옛 주인인 담배의 모습을 보여주고 냄새맡게 하고 끊임없이 상기시켜줬지만 절대 예전과 같이 불장난을 하게 하진 않았죠. 주인은 노예가 몸부림치며 괴로와 하는걸 보면서 점점 흥분을 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그는 새디스트였던거죠. 저는 결국 저 자신을 괴롭히고 괴롭힘을 당하면서 양쪽으로 즐기고 있는 이중 변태였습니다.

이런 와중에도 시간은 흘렀고 노예는 점점 옛 주인을 잊어갔습니다. 새 주인은 노예가 더이상 괴로워하지 않자 흥미를 잃고서 그를 버리고 떠나버렸어요. 결국 마지막엔 담배를 끊은 저만 남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저는 담배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참 재밌고 흥분과 쾌락속에 지내던 나날이었죠.

하지만, 이보다도 더욱 더, 무지막지하게, 비교도 안되게 더 큰 금연 과정의 재미는 말이죠... (3부에 계속)



0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7944 영화영화 인랑을 보고 5 저퀴 18/07/26 4427 1
    2188 일상/생각담배 <2> 3 이젠늙었어 16/02/08 4428 0
    2735 음악아직도 유효한 한 가수의 고백 - 금관의 예수 4 Terminus Vagus 16/05/02 4428 3
    6927 음악[번외] Kenny Burrell And Grant Green - Genius of Jazz Guitar Erzenico 18/01/11 4428 4
    756 일상/생각아이고 의미없다....(2) 2 바코드 15/08/09 4429 0
    4057 일상/생각실시간으로 의견받지 말입니다(...) "3g폰 들고 다니면 그리 보기 싫어요?" 46 진준 16/11/02 4429 0
    4301 스포츠[MLB] 카를로스 벨트란 휴스턴과 1년 1,600만 달러 계약합의 2 김치찌개 16/12/05 4429 0
    7834 음악고전명곡)Say yes-활(김명기) 놀보 18/07/12 4429 0
    4684 스포츠[오피셜]황재균, '총액 310만 달러' SF행...AGAIN '자이언츠맨' 4 김치찌개 17/01/24 4430 1
    11360 여행코로나다 보니까 여행가고싶네요 ㅠㅠ 22 물티슈 21/01/21 4430 1
    5741 게임락스팬의 어제자 롤챔스 경기 감상 2 하나마루 17/06/04 4431 0
    9751 음악[팝송] 리암 갤러거 새 앨범 "Why Me? Why Not." 2 김치찌개 19/10/02 4431 0
    12067 오프모임[조기종료] 머리 아픈 음(mm)벙 하나 개최해보고자 합니다. 11 거위너구리 21/09/11 4431 0
    12787 일상/생각용어의 재발견: 기갑, 장갑, 개갑 9 르혼 22/05/07 4431 5
    13048 IT/컴퓨터아이패드 액정보호용 강화유리를 갈아봅시다~~ 20 whenyouinRome... 22/08/04 4431 6
    13131 음악르 샤를리에의 법칙 6 바나나코우 22/09/03 4431 6
    13806 기타보드게임 할인 소식 53 토비 23/05/01 4431 2
    3008 일상/생각결혼과 사람과 나 7 레이드 16/06/12 4432 0
    3859 일상/생각울적한 밤, 커피 마시면서, 티타임 게시판에 끄적끄적 19 진준 16/10/10 4432 0
    5367 도서/문학나를 거부했던 세상이지만 너를 위해 용서한거야 2 알료사 17/04/04 4432 1
    4083 일상/생각(사진 포함)롤드컵 이벤트 경품 수령 후기 3 hunnyes 16/11/04 4433 2
    13613 경제사교육 군비경쟁은 분명 출산율을 낮춘다. 그런데... 10 카르스 23/03/02 4433 11
    892 음악Yann Tiersen - Esther 5 새의선물 15/09/02 4434 0
    3631 일상/생각운행보조기구 경험담#2 (성인용 킥보드, 전기자전거 etc) 3 기쁨평안 16/09/02 4434 1
    4510 방송/연예소사이어티 게임이 끝났습니다. 4 Leeka 17/01/01 4434 0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