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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5/12/23 17:08:00
Name   마르코폴로
Subject   유럽의 교육 - 로맹 가리



폴란드 육군 소위 트바르도브스키는 전쟁이 끝난 후, 자신이 빨치산 활동을 하던 숲 앞에 다시 서게 됩니다. 한달 후면 그는 군 복무를 마치고 그가 원하던 것처럼 바르샤바의 음악 아카데미에서 공부를 시작할 것입니다. 적의 발자취가 사라진 길 위를 걸으며, 그는 익숙한 숲을 둘러봅니다. 어렸던 나무들은 자신처럼 성장했습니다. 그는 나무 하나하나 덤불 하나하나를 모두 알아봅니다. 그와 함께 성장한 이 숲에서 그를 포함한 몇몇 동료들은 살아남았고, 대다수의 동료는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얀 트바르도브스키 소위는 자신이 머물던 옛 은신처를 둘러보며 지금은 자신의 아내이자, 한 아이의 엄마가 된 조시아와 아버지를 생각합니다. 그리고 독일군 감시소가 있던 자리에서 해방의 첫 대포소리가 울리던 날에 독일군과의 전투에서 죽음을 맞게 된 도브란스키를 떠올립니다.    

‘대포가∙∙∙∙. 많구나∙∙∙∙ 대포뿐이야∙∙∙∙’
‘곧 다른 것도 생길 거예요.’
‘맞아. 음악과 책, 모두를 위한 빵, 형제애의 온기. 전쟁도 없고, 증오도 없고∙∙∙∙’
(중략)
‘나는 믿어. 이번엔 다를 거야. 이제는 되풀이하지 않을 거야. 우리는 빛을 향해 가고 있어.’
(중략)
‘야네크∙∙∙∙’
‘나 여기 있어요. 당신 곁을 떠나지 않았어요’
‘책을 끝낼 시간이 없었어.’
‘끝내게 될 거예요.’
‘아니야, 부탁해, 나 대신 그걸 끝내줘.’
‘당신이 직접 하게 될거예요.’
‘약속해줘∙∙∙∙’
‘약속해요.’
‘그들에게 굶주림과 무시무시한 추위, 희망과 사랑에 대해 얘기해줘.’
‘그들에게 그 얘기를 할게요.’

쓰고 있던 책을 미처 끝내지 못한 도브란스키는 죽음의 순간 얀 트바르도브스키에게 자신의 책을 완성해 줄 것을 부탁하고, 야네크는 그 부탁을 받아들입니다.


트바르도브스키의 아들 야네크는 열네 살 소년입니다.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자 야네크의 아버지 트바르도브스키는 아들을 위해 숲 속에 은신처를 마련합니다. 그로부터 얼마 후 독일군들은 산으로 숨어버린 빨치산을 소탕하기 위한 끔찍한 계획을 실행합니다. 폴란드 여성들을 저택에 구금하고 자신들의 노리개로 만들어버린 것이죠. 그 상황을 참지 못한 폴란드의 사내들이 여인들을 구출하기 위해 저택으로 쳐들어 오자, 저택 외곽에 기관총을 배치하고 기다리다 빨치산 사내들을 사살해 버립니다. 몇몇의 사내들이 저택을 공격하다 사살되고 며칠이 지난 뒤, 트바르도브스키는 저택에 의사면허증 등을 보여주고 들어갑니다. 구금되어 있는 자신의 아내를 구하기 위해서였죠. 저택에 들어간 그는 왕진 가방에서 총을 꺼내 독일군을 향해 발사합니다. 그리고 자신도 죽음을 맞이하게 되죠. 야네크는 아버지가 어머니를 구출하기 위해 저택으로 떠나며 당부했던 것처럼 빨치산 무리에 합류합니다.


비록 전쟁 중이긴 하나 사람들은 그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픈 몸을 이끌고 연인을 만나기 위해 도시로 향하다 연인(늘 연인의 소식을 전해주는 야네크에게 피아노를 연주해주던.)과 함께 교수대에 매달린 야블론스키가 있습니다. 자신을 위해 폭탄테러를 자원한 남편이 죽음을 맞이할 때, 독일군과 불륜에 빠진 변호사의 젊은 아내도 존재합니다. 감자 100킬로그램에 친구 쿠부스를 판 소플라가 있고, 독일에 협력하는 부유한 아버지를 경멸하며 빨치산에 가담해 결국, 결핵으로 죽음을 맞이하는 흐무라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폭탄, 학살, 포로 총살, 짐승처럼 구덩이 속에서 살아야만 하는 사람들이 유럽의 교육이라며 빈정대는 냉소적인 흐무라가 있고 자유, 존엄성, 인간으로서의 명예가 유럽의 교육이라 생각하는 낭만적인 도브란스키가 있습니다. 두 딸 모두 독일군에게 강간당한 스탄치크가 있고, 독일군에게 정보를 얻기 위해 몸을 파는 소녀, 조시아가 있습니다.  


야네크는 음악과 조시아를 사랑했고, 사랑하는 법을 알기에 인간으로 남을 수 있었습니다. 그는 조시아에게 음악을 들려주기 위해 언젠가 야블론스키의 연인이 살던 집으로 향하고, 점령군에게 처형된 그녀를 대신해 집을 차지한 독일 장교와 맞닥트립니다. 권총을 꺼내든 야네크는 그에게 피아노를 연주할 것을 명령하고, 늙고 선한 장교는 아름다운 연주를 들려줍니다. ‘마지막 독일인’을 자청하며 제 3제국의 구성원임을 거부하는 노인. 음악을 매개로 그들 둘은 친구가 됩니다. 야네크는 또한 무너진 공장에 숨어 지내는 아이들의 무리에서 노예처럼 당하고 살던 유대인 소년 ‘분더킨트’를 구하기도 합니다. 그가 연주하는 바이올린 소리에 맘을 빼앗긴 탓이었죠. 하지만 늙은 장교와 분더킨드는 결국 목숨을 잃습니다. 수송 임무를 맡았던 늙은 장교는 트럭을 습격한 빨치산들의 총에 맞아 세상을 떠납니다. 분더킨트는 숲의 겨울을 이기지 못한 채 손가락이 굳어가는 공포 속에서 눈을 감습니다. 야네크는 살아남아 그들의 죽음을 지켜봅니다.  


인간성의 극단까지 밀어 붙이는 이야기들, 살아있는 모두가  죽어나가는 현실. 이것이 야네크가 겪은 유럽의 교육입니다. 그리고 거듭되는 교육 속에서 야네크는 생각합니다. 인간 세상이란 어떤 거대한 자루에 불과하다고. 눈이 먼 채 꿈만 꾸는 감자들이 자루 속에서 무정형의 덩어리를 이루며 발버둥 치고 있다고. 그것이 바로 인간성이라고. 소년은 전쟁 속에서 겨우 나이 한 살을 더 먹는 동안 세상사에 통달해버리고 희망에 대해 회의하며 냉소를 키워갑니다. 야네크에게 유럽의 교육이란 곧 유럽 지성의 전통을 비웃게 하는 교육, 부조리하고 추악한 인간 현실을 인식하게 하는 냉혹한 생존방법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희망을 믿는 도브란스키의 죽음 앞에서 야네크는 그의 책 ‘유럽의 교육’을 완성할 것을 약속합니다. 그리고 훗날 완성된 책을 주머니 속에 넣은 채 그들이 전쟁 속에서 머물렀던 그 숲 앞에 서게 된 것이지요. 야네크와 도브란스키가 겪은 각자의 '유럽의 교육'이 평행선처럼 떨어져 있던 것은 아니었던 셈입니다.
        

로맹 가리는 이 두 인물이 만나는 지점에서 글을 쓰고 있습니다. 야네크의 비관과 도브란스키의 낙관이 만나는 그 지점 말이지요. 도브란스키는 인간의 존엄을 훼손하는 나치 치하의 절망적 현실에서도 인간에게는 희망이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로맹 가리는 도블란스키와 야네크의 아버지, 트바르도브스키의 입을 빌려 말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것도 사라지지 않는다.’ 이차대전을 겪는 동안 로맹 가리는 전쟁이 끝난 세계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품고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전쟁 후에도 달라지지 않는 현실을 보면서, 실존의 여부와 관계없이 희망이 될 수 있는 어떤 것이 필요했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인간성의 회복’이었고, 사라지지 않아야 할 중요한 것이었을 테지요.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저 문구는 로맹 가리 스스로가 붙잡고 있던 바람이자 다짐이 아니었겠느냐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마치 작품 속 불멸의 빨치산 ‘나데이다’ 가 그 이름만으로 희망의 상징이 된 것처럼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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