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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5/12/23 17:08:00
Name   마르코폴로
Subject   유럽의 교육 - 로맹 가리



폴란드 육군 소위 트바르도브스키는 전쟁이 끝난 후, 자신이 빨치산 활동을 하던 숲 앞에 다시 서게 됩니다. 한달 후면 그는 군 복무를 마치고 그가 원하던 것처럼 바르샤바의 음악 아카데미에서 공부를 시작할 것입니다. 적의 발자취가 사라진 길 위를 걸으며, 그는 익숙한 숲을 둘러봅니다. 어렸던 나무들은 자신처럼 성장했습니다. 그는 나무 하나하나 덤불 하나하나를 모두 알아봅니다. 그와 함께 성장한 이 숲에서 그를 포함한 몇몇 동료들은 살아남았고, 대다수의 동료는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얀 트바르도브스키 소위는 자신이 머물던 옛 은신처를 둘러보며 지금은 자신의 아내이자, 한 아이의 엄마가 된 조시아와 아버지를 생각합니다. 그리고 독일군 감시소가 있던 자리에서 해방의 첫 대포소리가 울리던 날에 독일군과의 전투에서 죽음을 맞게 된 도브란스키를 떠올립니다.    

‘대포가∙∙∙∙. 많구나∙∙∙∙ 대포뿐이야∙∙∙∙’
‘곧 다른 것도 생길 거예요.’
‘맞아. 음악과 책, 모두를 위한 빵, 형제애의 온기. 전쟁도 없고, 증오도 없고∙∙∙∙’
(중략)
‘나는 믿어. 이번엔 다를 거야. 이제는 되풀이하지 않을 거야. 우리는 빛을 향해 가고 있어.’
(중략)
‘야네크∙∙∙∙’
‘나 여기 있어요. 당신 곁을 떠나지 않았어요’
‘책을 끝낼 시간이 없었어.’
‘끝내게 될 거예요.’
‘아니야, 부탁해, 나 대신 그걸 끝내줘.’
‘당신이 직접 하게 될거예요.’
‘약속해줘∙∙∙∙’
‘약속해요.’
‘그들에게 굶주림과 무시무시한 추위, 희망과 사랑에 대해 얘기해줘.’
‘그들에게 그 얘기를 할게요.’

쓰고 있던 책을 미처 끝내지 못한 도브란스키는 죽음의 순간 얀 트바르도브스키에게 자신의 책을 완성해 줄 것을 부탁하고, 야네크는 그 부탁을 받아들입니다.


트바르도브스키의 아들 야네크는 열네 살 소년입니다.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자 야네크의 아버지 트바르도브스키는 아들을 위해 숲 속에 은신처를 마련합니다. 그로부터 얼마 후 독일군들은 산으로 숨어버린 빨치산을 소탕하기 위한 끔찍한 계획을 실행합니다. 폴란드 여성들을 저택에 구금하고 자신들의 노리개로 만들어버린 것이죠. 그 상황을 참지 못한 폴란드의 사내들이 여인들을 구출하기 위해 저택으로 쳐들어 오자, 저택 외곽에 기관총을 배치하고 기다리다 빨치산 사내들을 사살해 버립니다. 몇몇의 사내들이 저택을 공격하다 사살되고 며칠이 지난 뒤, 트바르도브스키는 저택에 의사면허증 등을 보여주고 들어갑니다. 구금되어 있는 자신의 아내를 구하기 위해서였죠. 저택에 들어간 그는 왕진 가방에서 총을 꺼내 독일군을 향해 발사합니다. 그리고 자신도 죽음을 맞이하게 되죠. 야네크는 아버지가 어머니를 구출하기 위해 저택으로 떠나며 당부했던 것처럼 빨치산 무리에 합류합니다.


비록 전쟁 중이긴 하나 사람들은 그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픈 몸을 이끌고 연인을 만나기 위해 도시로 향하다 연인(늘 연인의 소식을 전해주는 야네크에게 피아노를 연주해주던.)과 함께 교수대에 매달린 야블론스키가 있습니다. 자신을 위해 폭탄테러를 자원한 남편이 죽음을 맞이할 때, 독일군과 불륜에 빠진 변호사의 젊은 아내도 존재합니다. 감자 100킬로그램에 친구 쿠부스를 판 소플라가 있고, 독일에 협력하는 부유한 아버지를 경멸하며 빨치산에 가담해 결국, 결핵으로 죽음을 맞이하는 흐무라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폭탄, 학살, 포로 총살, 짐승처럼 구덩이 속에서 살아야만 하는 사람들이 유럽의 교육이라며 빈정대는 냉소적인 흐무라가 있고 자유, 존엄성, 인간으로서의 명예가 유럽의 교육이라 생각하는 낭만적인 도브란스키가 있습니다. 두 딸 모두 독일군에게 강간당한 스탄치크가 있고, 독일군에게 정보를 얻기 위해 몸을 파는 소녀, 조시아가 있습니다.  


야네크는 음악과 조시아를 사랑했고, 사랑하는 법을 알기에 인간으로 남을 수 있었습니다. 그는 조시아에게 음악을 들려주기 위해 언젠가 야블론스키의 연인이 살던 집으로 향하고, 점령군에게 처형된 그녀를 대신해 집을 차지한 독일 장교와 맞닥트립니다. 권총을 꺼내든 야네크는 그에게 피아노를 연주할 것을 명령하고, 늙고 선한 장교는 아름다운 연주를 들려줍니다. ‘마지막 독일인’을 자청하며 제 3제국의 구성원임을 거부하는 노인. 음악을 매개로 그들 둘은 친구가 됩니다. 야네크는 또한 무너진 공장에 숨어 지내는 아이들의 무리에서 노예처럼 당하고 살던 유대인 소년 ‘분더킨트’를 구하기도 합니다. 그가 연주하는 바이올린 소리에 맘을 빼앗긴 탓이었죠. 하지만 늙은 장교와 분더킨드는 결국 목숨을 잃습니다. 수송 임무를 맡았던 늙은 장교는 트럭을 습격한 빨치산들의 총에 맞아 세상을 떠납니다. 분더킨트는 숲의 겨울을 이기지 못한 채 손가락이 굳어가는 공포 속에서 눈을 감습니다. 야네크는 살아남아 그들의 죽음을 지켜봅니다.  


인간성의 극단까지 밀어 붙이는 이야기들, 살아있는 모두가  죽어나가는 현실. 이것이 야네크가 겪은 유럽의 교육입니다. 그리고 거듭되는 교육 속에서 야네크는 생각합니다. 인간 세상이란 어떤 거대한 자루에 불과하다고. 눈이 먼 채 꿈만 꾸는 감자들이 자루 속에서 무정형의 덩어리를 이루며 발버둥 치고 있다고. 그것이 바로 인간성이라고. 소년은 전쟁 속에서 겨우 나이 한 살을 더 먹는 동안 세상사에 통달해버리고 희망에 대해 회의하며 냉소를 키워갑니다. 야네크에게 유럽의 교육이란 곧 유럽 지성의 전통을 비웃게 하는 교육, 부조리하고 추악한 인간 현실을 인식하게 하는 냉혹한 생존방법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희망을 믿는 도브란스키의 죽음 앞에서 야네크는 그의 책 ‘유럽의 교육’을 완성할 것을 약속합니다. 그리고 훗날 완성된 책을 주머니 속에 넣은 채 그들이 전쟁 속에서 머물렀던 그 숲 앞에 서게 된 것이지요. 야네크와 도브란스키가 겪은 각자의 '유럽의 교육'이 평행선처럼 떨어져 있던 것은 아니었던 셈입니다.
        

로맹 가리는 이 두 인물이 만나는 지점에서 글을 쓰고 있습니다. 야네크의 비관과 도브란스키의 낙관이 만나는 그 지점 말이지요. 도브란스키는 인간의 존엄을 훼손하는 나치 치하의 절망적 현실에서도 인간에게는 희망이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로맹 가리는 도블란스키와 야네크의 아버지, 트바르도브스키의 입을 빌려 말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것도 사라지지 않는다.’ 이차대전을 겪는 동안 로맹 가리는 전쟁이 끝난 세계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품고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전쟁 후에도 달라지지 않는 현실을 보면서, 실존의 여부와 관계없이 희망이 될 수 있는 어떤 것이 필요했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인간성의 회복’이었고, 사라지지 않아야 할 중요한 것이었을 테지요.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저 문구는 로맹 가리 스스로가 붙잡고 있던 바람이자 다짐이 아니었겠느냐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마치 작품 속 불멸의 빨치산 ‘나데이다’ 가 그 이름만으로 희망의 상징이 된 것처럼 말이지요.



1


    전쟁을 경험한 사람과 경험하지 않은 사람이 보는 세상은 완전히 다른 세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됩니다.
    그래서 아직까지도 정치권에 색깔론이 유효한건지도 모르지요.
    눈부심
    제주 4.3사건을 나무위키에서 읽는데 많은 생각이 교차하면서 어르신들을 조금이나마 이해하는 계기가 됐어요. 감히 이해한다고 말하는 것도 적절치 않은 것 같아요.
    마르코폴로
    그러고 보면 제주도는 한국전쟁 중에는 크게 피해가 없었을 듯 한데 오히려 전쟁 후 국가의 폭력에 의해 희생이 큰 경우네요. 최근 한국도 파시즘의 경향이 조금씩 나타나는 것 같아서 걱정이 됩니다.
    마르코폴로
    제가 겪어본 봐로는 전쟁을 경험하신 분들도 사람에 따라 조금씩 다르더군요. 전쟁 자체에 대한 혐오는 공통적이지만 북한에 대한 적대감은 온도차가 있었습니다. 덮어두고 무조건 싫어하시는 분들도 있는 반면에, 정치권의 색깔론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계신분도 있더군요. 하지만 말씀하신대로 전쟁이란 것이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의 세상이라는 것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지금은 돌아가신 작은 할아버지가 한국전쟁 중에 인민군의 쏜 총에 맞아 왼쪽 다리 전체를 절단해야 했었는데요. 이분은 전쟁에 대한 언급 자체를 꺼리시더군요. 입에 올리기 싫을 정도로 힘든 기억이기 때문이겠죠.
    오... 저 사진 배경이 마르코폴로님 책장인가봐요? 도끼냥반 책 옆에 있는 빨간 표지는 니체전집 중 하나인가요?
    전집 번역됐을때 니체팬들 엄청 좋아했었죠. 다들 전집 나오기 전에 사두었던 책을 버려야하나 말아야하나 고민하면서 ㅋㅋㅋ
    저는 고민안했어요. 전집으로 때깔 맞추는 것보다 울퉁불퉁한 제 책장이 훨씬 좋거든요.
    맨날 책이 왔다갔다 자리를 바꾸기 때문에 어차피 때깔 맞춰도 소용없다능.
    겉으로 봐선 무질서하지만 제 머릿속에선 완벽한 순서죠.

    로맹가리는 제가 누군가에게 책선물할 때 1순위로 놓는 작가에요
    나이가 ... 더 보기
    오... 저 사진 배경이 마르코폴로님 책장인가봐요? 도끼냥반 책 옆에 있는 빨간 표지는 니체전집 중 하나인가요?
    전집 번역됐을때 니체팬들 엄청 좋아했었죠. 다들 전집 나오기 전에 사두었던 책을 버려야하나 말아야하나 고민하면서 ㅋㅋㅋ
    저는 고민안했어요. 전집으로 때깔 맞추는 것보다 울퉁불퉁한 제 책장이 훨씬 좋거든요.
    맨날 책이 왔다갔다 자리를 바꾸기 때문에 어차피 때깔 맞춰도 소용없다능.
    겉으로 봐선 무질서하지만 제 머릿속에선 완벽한 순서죠.

    로맹가리는 제가 누군가에게 책선물할 때 1순위로 놓는 작가에요
    나이가 좀 어린 사람에겐 [자기앞의 생], 그리고 인생을 좀 안다? 싶으면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를 선물하죠.

    전쟁 후에 만들어진 독일과 폴란드에 얽힌 서사라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게 [양철북]인데, 이건 읽어보셨을 테고...
    나중에 프리모 레비가 쓴 [주기율표] 한 번 읽어보세요. 아마 마르코폴로님껜 취향저격일 듯 합니다.

    제게 이 책에 관한 재밌는 일화가 있어요.
    어느날 제가 도서관 서가를 샅샅이 후비고 다니는데 이 책이 과학섹션에 모셔져 있는 거에요.
    도서관 십진분류 400번대 번호를 부여받았더군요.
    제가 책을 들고, 사서에게 \"저... 이 책은 분류가 잘못 되었습니다. 이 책은 800번대로 가야합니다.\" 그랬더니
    책을 쓰윽 보고 사서가 한다는 말이 \"과학 맞아요.\" 그러더군요.
    제가 얼척이 없어서 \"이 책 소설입니다. 800번대 맞아요. 저 이거 두번이나 읽었어요.\" 그랬더니 그제서야 황급히 어디론가 전화...

    제게 도서관에 얽힌 추억이 많습니다. 심지어 도서관에 얽힌 성적 판타지까지 있다능... ㅋㅋㅋㅋㅋ
    글 잘 읽고 갑니다.
    눈부심
    도서관에 얽힌 성적 판타지가 뭔지 여쭤봐도 될까용.
    이런건 덧글로 하긴 뭣하고 제가 날잡아 제대로 썰을 풀지요. ㅋㅋㅋㅋㅋ 아 초성체 조아!!!!!
    눈부심
    날잡아 썰..아 기대돼 기대돼. 용감하고 대담하고 관능적인 글 부탁해용. 대단히 감사합니다.
    마르코폴로
    저도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흐흐흐
    리니시아
    기대됩니다
    여러분... 왜 이러십니까... 아 괜히 말했어!!!!!
    파란아게하
    두근두근...
    마르코폴로
    \'우리가 숨쉬는 공기 속에는 이른바 비활성 기체라고 하는 것들이 있다. 이것들은 박식하게도 그리스어에서 따온 진기한 이름을 갖고 있는데, 각각 \'새로운 것\'(네온), \'숨겨진 것\'(크립톤), \'움직임 없는 것\'(아르곤), 그리고 \'낯선 것\'(제논)이라는 뜻을 지닌다.\'
    제가 읽은 소설 중 가장 매력적인 첫 문장을 꼽으라면 전 \'주기율표\'를 선택할 것 같아요. 문과 출신이라서 그런 걸까요?

    프리모 레비는 저도 좋아하는 작갑니다. \'이것이 인간인가\'도 좋아합니다. 스스로를 이탈리아 인으로 인식하고, ... 더 보기
    \'우리가 숨쉬는 공기 속에는 이른바 비활성 기체라고 하는 것들이 있다. 이것들은 박식하게도 그리스어에서 따온 진기한 이름을 갖고 있는데, 각각 \'새로운 것\'(네온), \'숨겨진 것\'(크립톤), \'움직임 없는 것\'(아르곤), 그리고 \'낯선 것\'(제논)이라는 뜻을 지닌다.\'
    제가 읽은 소설 중 가장 매력적인 첫 문장을 꼽으라면 전 \'주기율표\'를 선택할 것 같아요. 문과 출신이라서 그런 걸까요?

    프리모 레비는 저도 좋아하는 작갑니다. \'이것이 인간인가\'도 좋아합니다. 스스로를 이탈리아 인으로 인식하고, 그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던 피에몬테의 작은 시골 출신 프리모 레비가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 속에서 타인에 의해 강제로 \'유대인\'이라는 정체성을 부여받는 것이 안타까웠습니다. 그것은 유대인이라서가 아니라, 스스로의 정체성을 타인에 의해 강제당하는 현실의 부조리함 때문이겠죠. 실제 그의 작품에 보면 피에몬테 사람들의 대화 억양을 문자로 표현하기 어렵다고 양해를 구하는 부분이 나오죠. 그리고 아우슈비츠에서도 피에몬테 출신의 벽돌공이 그의 피에몬테 방언을 알아보고 프리모 레비를 구해내기도 하고요. 피에몬테 지역의 유대인들은 실질적으로 현지인들에 동화된지 오래라고 하더군요.

    프리모 레비는 화학자라는 특성 때문인지 문체가 간명하고 정확하죠. \'이것이 인간인가\'의 경우, 공장에서 사용하는 주간 생산보고서를 토대로 삼아 글을 썼다고 합니다. \'나는 내 설명이 객관적으로 보일수록, 감정적으로 지나쳐 보이지 않을수록, 그만큼 더 신뢰할 수 있는 설명이 되리라고 생각했다.\' 라고 말했다더군요. 살아남은 자의 역할을 심판이 아닌 증언으로 본 그는 더 냉정하고 침작하게 기록하기 위해 글을 쓴 것 같습니다. 적확한 기록과 증언을 위해 본인의 감정을 거세한 거죠. 그래서 감정적이고 격정적인 문장들보다 더 애달파 보입니다. 토니 주트가 쓴 \'재평가\'라는 책 중에 프리모 레비에 대한 부분이 나옵니다. 좋은 책이에요. 한번쯤은 읽어볼 만 합니다.
    덧글을 쓰고 보니 이미 보시지 않았을까 했는데, 역시나 군요. 작품의 완성도를 떠나서 볼 때마다 감정이 북받치는 작품이 있는데 [주기율표]가 그래요. 프리모 레비의 작품을 읽으면 어떤 기억도 관념으로 휘발하지 못하고, 살아남은 자들의 기억 속으로 불려가며, 결국은 기억의 주인공인 그는 순교자처럼 미래를 저당잡히고야 만다는 생각이 들어요. 책 날개의 초연한 듯 슬퍼보이는 프로필과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는 글귀가 항상 저를 울려요. 프리모 레비는 [주기율표]... 더 보기
    덧글을 쓰고 보니 이미 보시지 않았을까 했는데, 역시나 군요. 작품의 완성도를 떠나서 볼 때마다 감정이 북받치는 작품이 있는데 [주기율표]가 그래요. 프리모 레비의 작품을 읽으면 어떤 기억도 관념으로 휘발하지 못하고, 살아남은 자들의 기억 속으로 불려가며, 결국은 기억의 주인공인 그는 순교자처럼 미래를 저당잡히고야 만다는 생각이 들어요. 책 날개의 초연한 듯 슬퍼보이는 프로필과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는 글귀가 항상 저를 울려요. 프리모 레비는 [주기율표]보다 [이것이 인간인가]로 더 유명한 것 같더라고요. 예전에 제 블로그 이웃이었던 독서가 한 분이 소개해주시고 더불어 그의 작품 모두를 선물해주셔서 감사히 읽었죠. 제겐 그래서 더 특별한 책이기도 하구요. 제가 유뷰남인거 알고도 막 혼자 좋아했거든요. 아놔~ 이것이 바로 나의 몹쓸... 판타지의 일부분? ㅋㅋㅋㅋㅋ 아 크리스마스 이브에 왜 이래... ㅋㅋㅋㅋㅋ

    토니 주트는 역사학자군요. 아주 생소합니다. 프리모 레비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니 꼭 읽어봐야겠어요. 도서관 순례 좀 해야겠네요.
    마르코폴로
    얼마전 김대식 교수가 쓴 \'빅퀘스천\'이란 책을 읽었는데, 그 중에 프리모 레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마지막 문장에서 울컥하더군요. 관련된 부분만 발췌해서 옮겨 적어봅니다.


    장미는 자신이 장미인지 모르며 꽃을 피운다. 끝없는 해변을 힘들게 기어가는 거북이에게 \'왜?\'라는 질문은 무의미하다. 인간의 위대함이자 비극은 지구의 모든 존재 중 유일하게 \'왜\'라는 질문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왜 사는가?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어차피 죽을 것을 왜 버둥거리며 살아야 할까? 물론 질문이 있다고 항상 답이 있을 ... 더 보기
    얼마전 김대식 교수가 쓴 \'빅퀘스천\'이란 책을 읽었는데, 그 중에 프리모 레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마지막 문장에서 울컥하더군요. 관련된 부분만 발췌해서 옮겨 적어봅니다.


    장미는 자신이 장미인지 모르며 꽃을 피운다. 끝없는 해변을 힘들게 기어가는 거북이에게 \'왜?\'라는 질문은 무의미하다. 인간의 위대함이자 비극은 지구의 모든 존재 중 유일하게 \'왜\'라는 질문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왜 사는가?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어차피 죽을 것을 왜 버둥거리며 살아야 할까? 물론 질문이 있다고 항상 답이 있을 필요는 없다. \"73과 79사이의 소수는 0으로 나눌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는 \"그런 소수는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답하는 것이 최선이다. \"바늘 위에서는 몇 명의 천사가 춤을 출 수 있을까?\" \'천사\'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질문 자체가 무의미하다.

    비트겐슈타인은 그래서 \'삶의 의미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논리적으로 무의미하다고 이야기 했다. 조금 더 자세히 생각해보자. \"x의 의미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의 답은, 정해진 범위 y 안에서 x의 용도 또는 x가 y에게 줄 수 있는 결과들의 합집합이다. 예를 들어 \'벽과 못\'이라는 범위 안에서 \'망치\'의 의미는 무언가를 두들겨 벽에 박을 수 있다는 것이다. 무언가의 의미란 다른 무언가와의 관계를 나타낸다. 우리 인생에서 가장 큰 범위는 삶 그 자체이다. 그렇다면 “삶의 의미란 무엇인가?”라고 질문하는 순간 우리는 단지 ‘삶과 삶의 관계’라는 동의어를 반복하는 난센스에 빠지게 된다.

    인생에 절대적인 의미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그렇게도 반가운 것일까? 의미가 있다는 것은 내 삶에 정해진 목표와 용도가 있다는 말이다. 나에게 용도가 있다는 말이다. 나에게 용도가 있으면 나는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나의 인생은 다른 무언가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나는 망치이고, 망치이기에 벽에 못을 박아야 한다. 의미 있는 인생은 존재의 무거움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인생이다. 그렇다면 ‘나를 위한 인생’은 인생에서 절대 의미를 뺀 후부터 가능해진다. 삶의 의미를 포기하는 순간 우리의 존재는 가벼워진다는 말이다. 하지만 가벼운 인생은 쿤데라가 표현하듯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느끼게 한다. 결국 우리 앞에 놓인 문제는, 어차피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인생의 의미를 찾는 것이 아니라 의미 없는 인생에서 어떻게 살아가는가이다.

    알베르 카뮈는 그래서 의미 없는 인생을 살아야 하는 인간을 시시포스에 비유했다. 코린토스의 왕이었던 시시포스는 영원히 아래로 굴러 떨어지는 돌을 매번 다시 굴려 올려야 하는 벌을 받는다. 시시포스의 죄는 너무 영리한 나머지 올림포스의 신들을 속일 수 있었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인간이 시시포스와 같은 벌을 받는 이유는 장미나 거북이와 달리 우리는 자아와 지능을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이다. ‘왜’라는 질문을 할 수 있고, ‘왜’라고 삶의 의미를 추구하는 순간 우리는 질문을 짊어진 무거운 인생을 살게 되는 것이다. 명예와 부를 누리게 된 프리모 레비는 하지만 여전히 ‘왜’라는 질문을 멈추지 못한 것이 아닐까? 그 많은 젊은이들 중 왜 자신만 살아남았을까. 왜? 왜? 왜? 레비는 1987년 4월 11일에 죽은 것이 아니다. 그는 답이 있을 수 없는 ‘왜’라는 질문을 하기 시작한 40여 년 전 아우슈비츠에서 이미 죽기 시작한 것이다.
    세상의 모든 빈 곳, 그곳을 바라보고 그곳을 메우려는 무능의 발버둥과 급진! 메리크리스마스~
    마르코폴로
    아 그리고 저 사진은 제 책장이 아닙니다. 흐흐흐
    예전에 미국에서 훔쳐오고 싶은 작가 말씀하시면서 토마스 핀천을 언급하신 적이 있었죠.
    저는 프랑스에서 로맹 가리를 훔쳐오고 싶어요. 글을 너무 재밌게 씁니다. 볼 때마다 놀라워요.
    게시판에 한 번 풀까봐요. 어디서 뭘 훔쳐오고 싶은지 각자 하나씩 말하기... 오 이거 재밌겠다.
    제 성적 판타지를 읽는 것보다 이게 더 재밌지 않을까용?
    마르코폴로
    전 성적 판타지에 한표를.... 흐흐흐
    아 진짜 이분들 너무 하시네...
    19금을 통과하려면 꽤나 고심해야된다고요. 다들 받아들일 자신 있으신가요? ㅋㅋㅋㅋㅋ
    저 벌써 별이 두개거든요. 아놔~
    파란아게하
    아뇨 판타지 중 성적판타지에 비교할 수 있는 건 없습니다.
    마르코폴로
    이분 배우신 분.
    파란아게하
    !!! (비밀입니다....ㅎ)
    그쵸... 그건 인정...
    근데 그게 내꺼라면 저 이불킥을 몇년간 해야되냐고요...
    너무 하시네 ㅋㅋㅋㅋㅋ
    잘 읽었습니다. 읽다가 아들 트바르와 아버지 트바르가 헷갈려서 좀 헤맨 것 빼고 하하... 제가 오프라인에서도 길치라서.
    로맹 가리는 어렸을 때 \'하늘의 뿌리\'를 집에 굴러다니던 신구문화사 판으로 읽고 한때 무척 좋아했었는데요 (사실 신구문화사 세계문학 중에서 얼라가 독해 가능한 작품이 몇 안 되는 바람에)
    나중에 커서 케냐 가야지! 여행은 케냐! 동물은 코끼리 코끼리가 킹왕짱! 그러면서...
    분명히 그땐 코끼리 이자식이 유일무이한 대표작인 줄 알았는데, 로맹 이 양반은 무슨 고구마줄긴가 캐면 나오고 캐면 또 나오고...... 더 보기
    잘 읽었습니다. 읽다가 아들 트바르와 아버지 트바르가 헷갈려서 좀 헤맨 것 빼고 하하... 제가 오프라인에서도 길치라서.
    로맹 가리는 어렸을 때 \'하늘의 뿌리\'를 집에 굴러다니던 신구문화사 판으로 읽고 한때 무척 좋아했었는데요 (사실 신구문화사 세계문학 중에서 얼라가 독해 가능한 작품이 몇 안 되는 바람에)
    나중에 커서 케냐 가야지! 여행은 케냐! 동물은 코끼리 코끼리가 킹왕짱! 그러면서...
    분명히 그땐 코끼리 이자식이 유일무이한 대표작인 줄 알았는데, 로맹 이 양반은 무슨 고구마줄긴가 캐면 나오고 캐면 또 나오고... 항복.
    명확한 유럽 - 백인 - 지식인- 남성의 정체성과 \'이건 노벨상을 노렸군!\' 같은 느낌이 좀 지루하기도 한데, 그래도 여전히 감동을 주는 작가.. 잘 전달해 주셔서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언제 한번 주기율표도 써주시지 않을까 기대합니다. 웬만한 책 선물은 다 주기율표를 돌리고 있는데 실패한 적이 없었네요. 읽었는지 안 읽었는지는 모르겠는데 다들 너무 좋대요 글쎄.
    마르코폴로
    저도 쓰면서 헷갈렸습니다. 어찌나 \'스키\'들이 많은지.... 흐흐흐. 말씀하신 것처럼 로맹 가리의 소설이 동어반복의 느낌이 있긴합니다.
    전 그건 그것 나름대로 좋아합니다. 어쩌면 팬심일 수도 있겠지요.
    주기율표는 기억이 가물가물 합니다. 요즘 급격히 노화가 진행 중인지라.
    참 케냐는 다녀오셨나요?
    흑흑 케냐는 무슨... 따뜻한 남쪽나라 쪽은 발도 못 디뎌 봤습니다. 가도 꼭 저 어디 컴컴한 추운 데만...ㅠㅠ
    참 발자크와 중국소녀도 잘 읽었어요. 정말 잘 읽혀서 단숨에 읽었네요. 이 책을 마치 내가 읽은 것 같은 착각이 들기도 하고.
    홍차넷 들어올 때마다 기대됩니다. 오늘은 어떤 미지의 영역이 우왕... 두근두근. 공짜만 바라는 심보가 못됐죠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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