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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 | 25/10/22 15:47:15수정됨 |
| Name | uni |
| Subject | 누군가의 은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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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은중과 상연>의 스포가 포함된 글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는 일, love yourself라는 말은 언뜻 아름답게 들린다. '자신의 장점을 보다듬어라, 부족함과 결핍을 쓰다듬어라. 그러면 오롯한 나로 거듭나 자존할 수 있다.' 수천 년 전의 성인도, 현대의 지식인도 비슷한 이야기를 반복하는 걸 보면 아마도 그것이 행복으로 가는 검증된 길처럼 보인다. 다만 안타깝게도, 그 말은 과거에도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길을 헤매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들은 자신을 부정하고, 미워하며 심지어 증오한다. 드라마 <은중과 상연>에서 상연처럼 말이다. 상연은 모날 것 없이 완벽하다. 신도시 아파트에 거주하는 집안의 경제력, 전교 1등이자 명문대를 진학하는 지적능력을 갖추었다. 주변 인물들의 반응을 볼 때 외모적으로도 돋보인다. 그뿐인가. 사진을 찍으면 동아리 사람들이 모두 감탄하며, 사업을 벌이니 건물주가 될 정도로 성공한다. 제작사 대표로서 마침내 영화제에서 수상할 수준이니, 의심할 바 없다. 더불어 상연은 빠짐없이 불행하다. 사랑과 관심을 갈구한 이들이 자신을 돌아봐주지 않는다. 오빠가, 오맹달 김상학이, 그리고 엄마까지도. 그들의 모든 관심은 은중에게 있다. 상연의 삶이 모순에 빠진 이유다. 상연은 은중을 미워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은중은 마음의 쉼터이자, 삶을 덥히는 등불이었다. 오빠의 죽음을 자기 탓으로 돌릴 때도, 오맹달 ‘상학’에 대한 감정과 엄마의 죽음 앞에서 등을 돌릴 때도, 삐뚤어진 마음으로 은중의 작업을 빼앗으며 갈라설 때조차 상연은 은중의 볕과 그늘 아래 놓여있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자신을 사랑할 수 없다. 내 모습을 인정하는 순간 사랑받지 못한 현실을 인정해야 하니까. 실패한 사람이 될 수 없으니까. 내가 그들을 버렸지, 버림받은 것이 아니니까. “이런 너를 누가 받아줄 수 있겠니.” 은중의 말이 상연의 심부 깊숙이 박힌다. 이후 상연의 삶은 거짓된 증명으로 가득 채워진다. 삶의 마지막 순간, 상연은 은중을 찾는다. 죽음을 앞둔 짐승이 본능적으로 제자리를 향하듯이 그리로 갔다. 껍데기와 허울을 벗고 진솔한 얼굴을 드러냈다. 그런 것 같았다. 안락사 시술을 받는 날 아침, 그녀는 마지막으로 자신을 부정한다. “나 혼자 가는 게 좋겠어.” 흔들리는 믿음으로 예수를 부정한 베드로처럼, 상연은 다시 한번 자신의 믿음을 시험한다. 그리고 마치 말씀처럼, 은중이 있었다. “같이 가자고 말해. 같이 가고 싶지?” 상연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다. 살며시 흐린 미소가 번진다. 그것은 해방의 물결이었다. 동시에 그 물결을 이끌어낸 건 누군가의 손이기도 했다. love yourself 자신을 사랑하라는 말은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love yourself, together 상연이 마지막 순간 은중에게 기대듯, 우리는 누군가와 함께할 때 비로소 자신을 사랑할 수 있다. 의존이 아니라 공존, 자기연민이 아니라 상호연대의 이야기다. 우리 각자의 내면에는 상연이 있다. 그러니 오늘 하루 누군가의 ‘은중’이 되었으면 좋겠다. 언젠가 모습을 드러낼 마음속 ‘상연’을 위해서.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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