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25/08/26 23:55:49
Name   골든햄스
File #1   IMG_9644.webp (37.1 KB), Download : 26
Subject   학원 생활을 마무리하며


선생님 그만둬요? 돌아올 거예요? 이렇게 묻는 초등학생 3학년 여자아이에게 “선생님도 돌아오고 싶지” 하고 애매하게 답할 수밖에 없었다.

덤덤하게 받아들이는 애들도 있었다. 제일 귀여워하는 애에게는 내가 싸인(?)을 받아뒀다(???). 아쉬워하면서도 변호사시험을 보러 간다니 대단해! 라고 호들갑을 떨어준 중학생 친구도 있었다. 이제 친해지고 있었는데.

진짜 마지막 날인 금요일에는 제일 강의실 내 케미스트리가 좋았던 밝고 활발한 초등학생 친구들에게 작별을 고해야 한다.

아이들은 정말 사랑스러웠고, 그걸 느끼고 진심으로 일할 사람은 의외로 많았다. 다들 어디 작은 시인이거나 뮤지컬 작가거나 한 사람들. 돈을 좇기보다 가치를 좇거나, 언젠가의 대박을 꿈꾸며 자신의 순수성을 지킨 사람들. 그런 사람들은 시키는 대로 묵묵히 일했고 아이들에게도 정을 줬다. 20대 시인 강사는 늘 학부모님들께 빽빽한 메시지 피드백을 보냈다.

그런 사람들이 빙글빙글 의자놀이처럼 스쳐지나간다. 남에게 친절하고 싶은 사람은 의외로 많았다. 약간 빛바랜 얼굴의 서민들 중에 많았다. 그런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준다는 점에서는, 이 학원은 좋은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프린트 용지 값도 아까워하는 학원이라. 원장 선생님들은 곧 죽어도 내가 일을 많이 한다는 얘기를 안 하면서도 계속 교안을 더 만들어달라했다. 신입생이 늘어서 파일이 책꽂이에 꽉 찬다고 더 꽂을 데가 필요하다니까 오늘만 수업 들으러 온 세 명 때문인가보다 하고 본능적으로 다른 이야기를 했다. 아. 뭔가 ‘다 배웠다’는 생각이 들었다.

초조감에 항상 새로운 절차를 없앴다 만들었다, 문서를 만들었다 없애는 여자 원장 선생님도, 항상 허허 웃고 있던 남자 원장 선생님도 내게 많은 걸 가르쳐주신 것 같다.

뮤지컬 작가라는 다른 강사와 서로 잘되기를 기원해주며 엉망진창 인수인계를 마치고, 내가 제일 좋아하는 퉁명스럽고 솔직하고 속모를 아이랑 화요일 마지막 독서 지도 시간을 갖는다. 아이는 자고, 나도 이제는 그냥 학원이 변호사시험 보러 나간다는 사람을 잡고 최대한 일을 시키는 게 짜증나서 카톡이나 하고 있노라니 항상 첨삭을 완벽하게 하던 사람이 위의 세 권만 달랑 한 모습에 여자 원장 선생님이 미묘한 표정으로 되다 만 노트 더미들을 들고 나가는 게 보였다.

늘 침묵하는 타인들의 모습이 무서워 숙였지만. 이제쯤 되니 알 거 같았다. 말할 수 없어서 침묵하는 거라고. 말할 수 없는 속내들이라고. 다들 좋은 사람들일 거다. 내가 진심으로 아이를 위한단 게 드러나면 학부모들은 감동을 받곤 했다. 반성하는 내용의 글을 보낼 정도였으니까. 어쩌면 누군들 그렇게 살고 싶지 않으랴. 에너지의 문제인지 구조의 문제인지. 아무튼 다들 그리 서로 행복하게 위하며 살고 싶지 않단 걸 알았다. 다들 그렇게 서로를 사랑하지 못한단 걸.

선생이 선생이 못되고 부모가 부모가 못되는 일이 빈번한 사회에서, 조용히 알겠노라, 하고 걸어나온다. 아이고! 돈이나 벌어야지. 이제는 얼굴을 똑바로 보고 사회생활용 미소를 장착할 수 있게 됐다. 거짓말도 배운다.



17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15893 일상/생각 크롬 확장 프로그램이 승인이 났습니다. ㅎㅎ 16 큐리스 25/12/12 721 26
    15889 일상/생각[뻘글] 철학자 존 설의 중국어방 문제와 LLM 은 얼마나 다를까? 12 레이미드 25/12/11 589 1
    15886 일상/생각뭔가 도전하는 삶은 즐겁습니다. 4 큐리스 25/12/09 685 11
    15874 일상/생각큰일이네요 와이프랑 자꾸 정들어서 ㅋㅋㅋ 14 큐리스 25/12/02 1229 7
    15869 일상/생각상남자의 러닝 3 반대칭고양이 25/11/27 804 5
    15867 일상/생각사장이 보직해임(과 삐뚫어진 마음) 2 Picard 25/11/26 818 5
    15866 일상/생각기계가 모르는 순간 - 하루키 느낌으로 써봤어요 ㅋㅋㅋ(와이프 전전전전전 여친을 기억하며) 5 큐리스 25/11/25 749 0
    15863 일상/생각창조론 교과서는 허용될 수 있을까 12 구밀복검 25/11/25 1202 18
    15860 일상/생각식생활의 스트레스 3 이이일공이구 25/11/20 819 1
    15859 일상/생각누구나 원하는 것을 얻는다. moqq 25/11/20 750 7
    15844 일상/생각추위 속의 수요일 골든햄스 25/11/12 573 5
    15843 일상/생각내가 크던 때와, 내 아이가 크기 시작한 때의 이야기 9 Klopp 25/11/12 864 12
    15835 일상/생각집을 샀습니다. 8 절름발이이리 25/11/08 1096 13
    15829 일상/생각마음이 짠합니다. 4 큐리스 25/11/07 857 5
    15827 일상/생각짧은 이직 기간들에 대한 소회 27 kaestro 25/11/06 1160 5
    15816 일상/생각요즘 단상과 경주 APEC 4 김비버 25/10/30 1108 13
    15815 일상/생각3번째의 휴직 기간을 시작하며 2 kaestro 25/10/30 1016 6
    15810 일상/생각저는 바보 입니다... 4 이십일세기생명체 25/10/29 896 8
    15808 일상/생각회사 업무로 이혼할뻔 했습니다. ㅎㅎ 3 큐리스 25/10/28 1429 8
    15803 일상/생각생각보다 한국인들이 엄청 좋아하는 스포츠 6 hay 25/10/25 1403 0
    15798 일상/생각누군가의 은중 uni 25/10/22 974 6
    15794 일상/생각우리 회사 대표는 징역을 살까? 3 Picard 25/10/21 1397 10
    15793 일상/생각뉴미디어 시대, 중세랜드의 현대인 meson 25/10/21 760 0
    15790 일상/생각여러 치료를 마쳐가며 2 골든햄스 25/10/19 1180 23
    15789 일상/생각역사 커뮤니티들의 침체(?)에 대한 잡설 10 meson 25/10/19 1311 1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