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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5/03/13 17:02:32
Name   바닷가의 제로스
Subject   남의 인생 멋대로 판단하는 이야기
* 이 글은 몇년 전에 탐라에 썼던 글과 댓글을 이어놓은 것입니다.
보신 기억이 있으실 수 있습니다 :)

--

저는 일을 할 때 예단을 하면서 시작합니다. 예단. 미리 판단한다는 거죠.
사실 그걸 안하는게 이상한 건데..핵심은 예단은 최종판단이 아니므로 이후 나타나는 증거와 상황에 의해 바뀌어나가는 거죠.

아무튼 누군가의 사실혼관계존재확인을 구하는 일이 들어왔습니다.
제목이 '사실혼관계존재확인'이다. 누군가 죽은겁니다.
사실혼이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받고 싶다는 건데 사실혼배우자가 살아있으면 그걸 소로 구할 이유가 없거든요.
사실혼배우자가 날 내쫓으려고 하고 사실혼관계가 아니었다고 하면요?
그때는 사실혼관계파기에 따른 재산분할, 손해배상청구를 하게 됩니다.
그때 사실혼관계의 존재는 청구의 요건사실이 되지 별도로 확인을 구하진 않습니다.

자..그럼 누가 죽었나볼까요. 보통 연금이나 임대차관계, 보증금 상속문제 때문에
사실혼관계 존재확인을 구합니다. 60대 아저씨가 돌아가셨군요. 장애인이시네. 배우자는..30대..?? 너무 젊은데.

이거 진짜 사실혼배우자 맞나? 연고없는 장애인 얼마안되는 유산 가져가려는 거 아냐?
사망원인이 암이네.. 이거 말기 간병인이 내가 사실혼배우자였다 이렇게 나오는 케이스도 꽤 있는데.
환자도 동의하에 신고하는 경우도 있고. 봐라 이거 주민등록도 따로 되어있네.

몇 년이나 배우자 생활했다는 건지 볼까.. 응..?? 20년이 넘어...??? 고등학생 때부터 같이 살았다고???
뭐지 중간에 장애인이 된 건가..?(<=편견)

여자분이 고2때, 지나가다 만나 첫눈에 반했다고 휠체어탄 40대 아저씨가 1년 동안 쫓아다니면서 구애를 했네요.
거의 2,3일에 한번 씩 꽃들고 집이니 학교니 찾아왔다고.
첨엔 무서웠고 여자쪽 부모님한테 맞은 적도 있었는데.. 한결같은 끈기에 내가 언제 또 이런 사랑을 누구에게 받아보겠나 싶고
부모님도 네 생각은 어떠냐고 물어봐서 오케이 했다고.

아니 근데..그렇게 죽자 쫓아다녀서 여고생을 부모동의하에 집에 데리고 왔는데
왜 혼인신고는 안했어..??? 아니 ㅅㅂ 유부남이었잖아??(ㅋㅋㅋ 미침)

아저씨는 젊어서 결혼을 한 법률상배우자가 있었고 자식도 있었습니다.
근데 언젠가 사고로 장애인이 된 후 애 데리고 집을 나가서 연락이 끊어졌대요.
그 호적정리를 안해서 인생의 사랑인 여고생쨩과 혼인신고를 할 수 없었고,
나중에 이혼하긴 했는데 그때는 혼인신고하면 연금줄어들고 뭐 그런게 있어서 그냥 살았답니다.

근데 제반 상황이 좀 많이 특이하고 원래 일방적 진술은 그냥 믿을 수 없는거라
(내가 의심스러우면 판사도 의심하는 거임) 다른 증거들을 더 보는데.. 이건 사실혼관계가 맞더라고요.

우선 동거는 택배로 입증했습니다. 여자분이 본인물품 일상용품 택배로 남자 주소로 보낸 몇년치 내역.
남자 유족 형제자매진술서, 장례식장 영수증. 장례식에는 아저씨 자식(상속인)도 찾아왔던데
딱히 재산은 없고 그 임대아파트는 부인거라고 진술서도 써줬더라고요.

그런데 그것들보다 중요하고 놀랐던건 사진들이었어요.
보통 사실혼 존재확인을 구하면 사이좋은 사진같은 거 내달라고 합니다. 근데 사진이 참 많으시더라고요...

아주 행복해보이는 커플 셀카들이요.

만면에 '행복'이라고 써있는 두사람의 사진은 정말 많았습니다.
사시사철 두 분이서 좋은데 많이 다니셨더라고요.
꽃과 강과 예쁜 풍경과 건강한 웃음이 있는 두 사람의 사진들은 이 두 사람이 행복했다는 걸
분명하게 증명하고 있었습니다. 요새 기준으로도 닭살이 돋을 정도로.

침대에서 런닝입은 아저씨 팔베개하고 볼에 뽀뽀하면서 찍은 사진도 있고,
화장실에서 커플양치컵들고 같이 양치하면서 찍은 사진도 있고요.

장기간, 이성적 부부로서의 관계를 유지해왔음을 누가 봐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업무적으로는 증거로 충분한 사진들이었고
사진을 보기 전까지 '이거 부인이 좀 모자란 사람이었던거 가스라이팅한거 아냐?
아니 어케 부모도 고등학생딸을 장애인 아저씨한테 보내냐구. 그렇게 가서 오래 고생하거나 불행했던건 아닐까'
같이 '남의 인생 함부로 판단하고 있던' 저를 부끄럽게 만드는 사진들이었죠.

그제서야 제 눈에 가짜배우자 용의자가 아닌, 이용당한 피해자가 아닌, 행복한 결혼생활의 인생반려를 잃은 부인이 보인겁니다.
이렇게 좋은 남편을 잃으셔서 얼마나 상심이 크시겠습니까. 그런데 이 소송 안하면 집에서도 나가야한다니..

법정에서 실제로는 처음 뵌 사진 속의 그녀는 사진과는 다른 쓸쓸한 표정 속에서도 감사하다는 인사를 건네셨고,
저는 부군을 잃은 슬픔에 대한 애도를 표할 수 있었습니다.

"암이라는게 참 독해요. 한번은 살아났는데 결국 또 재발해서..
마지막에 그 사람 너무 고생해서 나도 너무 힘들었는데, 이젠 아프지 않겠죠. 저도 이젠 괜찮아요. 감사합니다."

두 사람은 서류상으로 볼 때는 행복할 구석이 없었어요.
기초생활수급자에, 스무살 넘는 나이차이에, 장애인에, 고졸에, 애 딸린 유부남상태의 사실혼관계에, 암투병x2회에.

그래도 두 사람이 행복한 20여년의 결혼생활을 했다는 사실을, 시건방진 예단을 내렸던 저는 납득했고, 판사도 납득시킬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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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번 본 기억이 있는데! 또 봐도 또 갬.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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