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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4/03/12 13:54:53수정됨
Name   meson
Subject   연개소문 최후의 전쟁, 최대의 승첩: 4. 침공군의 진격
이전 편: #1 #2 #3

원정군의 편성

661년, 당나라는 수륙 35도(道)의 대군을 동원하여 고구려를 대대적으로 침공했습니다.[4-1] 처음에는 당고종이 친정하려 하였지만, 측천무후 등이 만류하자 결국 포기하였지요.[4-2] 그래서 친정군을 제외한 35군만 여러 개의 행군으로 편성되어 고구려로 진격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이 전쟁은 대체로 ‘2차 고당전쟁’이라 불리고 있습니다.

[4-1] 『三國史記』 卷6, 新羅本紀6, 文武王 원년 여름 6월, “元年, 六月, 入唐宿衞仁問・儒敦等至, 告王, “皇帝已遣, 蘇定方領水陸三十五道兵, 伐髙句麗, 遂命王舉兵相應. 雖在服, 重違皇帝勑命.”
[4-2] 『資治通鑑』 卷200, 唐紀16, 高宗 龍朔 원년 4월 癸巳.


동원된 주요 행군은 다음과 같습니다.[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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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661년 5월 16일에 확정된 명단입니다. 물론 행군이 위의 7개뿐은 아니었으며, 다른 명칭의 행군도 존재하였습니다. (함자도, 압록도, 낙랑도 등.) 다만 독립적으로 움직인 행군은 위의 7개이고 나머지는 대부분 상위 행군 산하에 귀속되어 있었을 것입니다.[4-4] 예컨대 백제 멸망전 당시 소정방은 신구(神丘)・우이(嵎夷)・마한(馬韓)・웅진(熊津) 등 14개 도행군의 대총관으로서 여러 총관들을 휘하에 거느린 바 있습니다.[4-5]

[4-3] 이민수, 「661년 고구려-당 전쟁의 전황」, 『군사』 122, 2022, 209쪽.
[4-4] 김용만, 「2次 高句麗 - 唐 戰爭(661-662)의 進行 過程과 意義」, 『민족문화』 27, 2004, 178쪽; 이민수, 「660~661년 당의 고구려 공격군 편성과 水軍 운용 전략」, 『한국고대사탐구』 38, 2021, 138-140쪽.
[4-5] 「大唐平百濟國碑」, “使持節神丘嵎夷馬韓熊津等一十四道大總管左武衛大將軍上柱國邢國公蘇定方.”


그런데 위 총관들 중 소사업은 나중에 행군명만 바꾸어 그대로 철륵을 토벌하러 가며, 그때는 대총관이라 불리고 있습니다.[4-6] 따라서 출발할 때부터 실은 대총관이었으나 이를 총관이라 오기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4-7] (이를 근거로 정명진, 방효태 등도 대총관이었다고 주장할 수 있으나, 다른 대총관들이 대장군인 반면 이들은 장군이므로 반드시 대총관이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4-6] 『新唐書』 卷3, 高宗 龍朔 원년 10월, “鄭仁泰為鐵勒道行軍大總管蕭嗣業為仙㟧道行軍大總管, 左驍衞大將軍阿史那忠為長岑道行軍大總管, 以伐鐵勒.”
[4-7] 이민수, 「660~661년 당의 고구려 공격군 편성과 水軍 운용 전략」, 『한국고대사탐구』 38, 2021, 141쪽.


당군의 규모

한편, 이러한 당군의 규모에 대해서는 35군이었다는 것만 기록되어 있고 그 외에 구체적인 병력의 수효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또한 당나라 1군의 규모는 총관의 품계에 따라 달라지는데,[4-8] 과의도위가 총관이면 1천, 절충도위가 총관이면 5천, 장군이 총관이면 1만, 대총관이 총관이면 2만으로 규정되어 있습니다.[4-9] 게다가 이 기준은 당고종 당대가 아니라 당현종 때 기록된 기준이므로, 661년에도 반드시 적용되었다고는 할 수 없지요. 이 때문에 2차 고당전쟁 침공군의 규모는 현재까지도 정확히 추산하기가 상당히 어렵습니다.

[4-8] 이민수, 「645년 唐의 高句麗 원정군 규모 推算」, 『한국상고사학보』 100, 2018, 144쪽.
[4-9] 이민수, 「660~661년 당의 고구려 공격군 편성과 水軍 운용 전략」, 『한국고대사탐구』 38, 2021, 141쪽.


다만 범위를 설정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우선 이 전쟁에는 소정방, 방효태, 유백영, 조계숙 등 660년에 백제를 멸망시킨 장수진이 다수 참여하였습니다.[4-10] 또한 이들이 소속된 평양도행군, 패강도행군, 옥저도행군은 요동이 아닌 평양에서 전투를 벌였습니다.[4-11] 이를 보면, 평양을 직공한 병력은 백제 멸망전 당시와 유사한 진용으로 편성되었다고 생각됩니다. 따라서 이 3개 도행군은 백제를 공격한 13만 명을 기준으로 일부 병력이 추가된 규모였을 것이라 추정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소정방·임아상·방효태를 제외하면 계필하력·아사나충·소사업·정명진이 남으며 이는 숫자상 3:4입니다. 따라서 계필하력·아사나충·소사업·정명진을 합하면 13만 명보다 더 많은 병력을 거느려야 자연스럽습니다.

[4-10] 김용만, 「2次 高句麗 - 唐 戰爭(661-662)의 進行 過程과 意義」, 『민족문화』 27, 2004, 177쪽.
[4-11] 이민수, 「660~661년 당의 고구려 공격군 편성과 水軍 운용 전략」, 『한국고대사탐구』 38, 2021, 144-145쪽.


이와 관련하여, 당태종은 648년에 다음과 같은 발언을 한 적이 있습니다.

황제(당태종)가 장손무기(長孫无忌)와 더불어 계획하였다. “고려(高麗)가 우리 군사의 침입[吾師之入]에 곤궁해져, 호구가 줄고, 수확이 없는데도, 개소문(蓋蘇文)은 성을 쌓고 울타리를 늘리기만 하며, 아랫사람[下]들은 굶주려서 구렁텅이[溝壑]에 쓰러져 죽으니, 피폐함을 이루 말할 수가 없다. 내년에 30만 병력을 동원하고, 공(公)을 대총관으로 삼으면, 일격에 멸할 수 있을 것이다.”
帝與長孫无忌計曰, “高麗困吾師之入, 戶亡耗, 田歲不收, 蓋蘇文築城增陴, 下飢臥死溝壑, 不勝敝矣. 明年以三十萬衆, 公爲大總管, 一擧可滅也.”
- 『신당서』 권220 동이 고려 -

위 사료에 따르자면 당나라는 일찍이 30만 대군을 동원한 침공을 계획했던 것입니다. 당고종은 기본적으로 당태종이 생전에 고안한 전략에 입각하여 2차 고당전쟁을 일으킨 것으로 평가되므로,[4-12] 위와 같은 침공 규모는 실제 군 편성 시에도 반영되었을 공산이 큽니다. 그리고 실제로 평양 공격군이 13만 명 이상 동원되었다고 하고, 나머지 부대가 그보다 33%가량 더 동원되었다고 하면, 총 302,900+a 명이 동원된 것으로서 30만과 유사하지요. 이상에서 착안하면 2차 고당전쟁의 당군은 평양 공격군이 약 13만 이상, 요동 공격군이 약 17만 3천 이상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4-12] 이민수, 「660~661년 당의 고구려 공격군 편성과 水軍 운용 전략」, 『한국고대사탐구』 38, 2021, 164쪽.


661-1
(이민수, 「660~661년 당의 고구려 공격군 편성과 水軍 운용 전략」, 『한국고대사탐구』 38, 2021, 162쪽. 참고용 지도입니다.)

진군로: 평양 공격군의 경우

이러한 당군 중 평양도행군(소정방), 패강도행군(임아상),[4-13] 옥저도행군(방효태)의 경우 래주에서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대동강 하구로 침공한 것이 알려져 있고,[4-14] 그 병종이나 진군로에 대한 이견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4-15] 이들은 우선 대령강과 청천강이 합쳐져 서해로 흘러드는 요충지인 위도(葦島)[4-16]에서 고구려 수군을 격파하고, 다시 남하하여 대동강[浿江]에서 고구려 수군을 재차 격파한 후 상륙해 마읍산(馬邑山)을 점령함으로써 평양을 공격할 수 있었습니다.[4-17] 이것은 당진에서 백제 수군을 격파한 후 남하하여 금강 하구로 진입했던 백제 멸망전의 경우와 유사합니다.

[4-13] 「仵欽墓誌銘」, “龍朔元年, 浿江道敬奉天規, 承威問罪, 君沉戈畫鷁, 瞻獨鶩於星樓, 水劍浮龍競先 鳴於月峽.”
[4-14] 이민수, 「661년 고구려-당 전쟁의 전황」, 『군사』 122, 2022, 225쪽.
[4-15] 장창은, 「660~662년 고구려와 신라 · 당의 전쟁」, 『신라사학보』 38, 2016, 85-86쪽.
[4-16] 장창은, 「660~662년 고구려와 신라 · 당의 전쟁」, 『신라사학보』 38, 2016, 87쪽.
[4-17] 김용만, 「2次 高句麗 - 唐 戰爭(661-662)의 進行 過程과 意義」, 『민족문화』 27, 2004, 181쪽; 이민수, 「661년 고구려-당 전쟁의 전황」, 『군사』 122, 2022, 227쪽; 이민수, 「662년 고구려의 평양성 전투와 임진강 전투 재구성」, 『한국고대사탐구』 41, 2022, 101쪽.


반면에 누방도행군(정명진), 부여도행군(소사업), 장잠도행군(아사나충), 요동도행군(계필하력) 등은 요동 일대를 침공한 것은 분명하나 기록이 소략하여 상대적으로 규명이 복잡합니다. 그러나 행군명 및 장수들의 과거 이력, 당시 참전한 인물들의 묘지명 등을 활용하면 전쟁의 양상을 일부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진군로: 누방도행군의 경우

우선 누방도행군의 경우, 총관 정명진이 과거 영주도독 겸 동이도호로서 신성 일대에서 고구려군과 싸운 적이 있으므로 이러한 경험을 살려 신성 방면으로 진군하였을 가능성이 있습니다.[4-18] 이와 관련하여 신성 근방의 성으로 추정되는 귀단성의 도사 고을덕이 661년 당군에 생포된 사실[4-19]이 주목됩니다. 정명진군의 참모였던 양사선의 묘지명에 뛰어난 계책으로 많은 곳에서 승리하였다는 서술이 있는 것으로 보아[4-20] 정명진군은 신성 일대에서 야전을 벌여 승리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신성 또는 귀단성을 함락하였다는 기록은 없으므로 (만일 함락하였다면 열전 또는 묘지명에 기록되었을 것이므로) 성을 함락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한 채 계속해서 전투를 벌인 것으로 생각됩니다.[4-21]

[4-18] 이민수, 「660~661년 당의 고구려 공격군 편성과 水軍 운용 전략」, 『한국고대사탐구』 38, 2021, 157쪽.
[4-19] 이민수, 「661년 고구려-당 전쟁의 전황」, 『군사』 122, 2022, 217-218쪽.
[4-20] 「楊師善墓誌」, “龍朔元年, 問罪遼東, 鏤方道總管程名振奏公充行軍兵曹. 軍謀戰策, 多所決勝.”
[4-21] 이민수, 「661년 고구려-당 전쟁의 전황」, 『군사』 122, 2022, 219쪽.


이와 관련하여 설인귀 역시 용삭(龍朔) 연간(661~663)에 장군으로서 요좌(遼左)에 갔다가 산에서 불상을 발견하고 이를 베껴 그렸다는 기록이 존재합니다.[4-22] 이때 설인귀는 '수나라 황제가 토벌했던 요동의 옛 땅[隋主討遼古地]'에 도달하였는데, 이러한 지역은 2차 고수전쟁 당시 수양제가 집중 공격하였던 요동성으로 추정할 수 있지요. 따라서 설인귀군은 요동성 방면으로 진군한 것으로 보입니다.[4-23] 설인귀는 행군총관으로 참전했다고 생각되는데,[4-24] 독립적인 행군이었는지의 여부는 아직 불확실합니다.

[4-22] 『集神州三寶感通錄』 中, “五十唐龍朔中. 有事遼左行軍將薛仁貴. 行至隋主討遼古地. 乃見山像空曠蕭條絕於行往. 討問古老云. 是先代所現. 便圖寫傳本京師云云.”
[4-23] 이민수, 「661년 고구려-당 전쟁의 전황」, 『군사』 122, 2022, 216쪽.
[4-24] 이민수, 「660~661년 당의 고구려 공격군 편성과 水軍 운용 전략」, 『한국고대사탐구』 38, 2021, 157쪽.


진군로: 부여도행군의 경우

한편 부여도행군의 경우, 총관 소사업이 외교 업무의 최고 담당자인 홍려경으로[4-25] 회흘 등 여러 부족[諸部]의 병력을 거느리고 출전하였습니다.[4-26] 소사업은 당시 연연부도호(燕然副都護)를 맡고 있기도 했으므로,[4-27] 북방의 회흘 지역에서 병력을 모집하여 출발하였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또한 행군명을 고려할 때 소사업은 고구려 부여성 방면으로 진격한 것으로 통상 여겨지는데,[4-28] 부여성은 고구려 북방의 중심지이자 유목 부족들과 연결되는 창구였기 때문에 이를 차단하고자 공격한 것으로 보입니다.[4-29]

[4-25] 이재성, 「아프라시아브 궁전지 벽화의 '조우관사절(鳥羽冠使節)'이 사마르칸트[康國]로 간 원인, 과정 및 시기에 대한 고찰」, 『동북아역사논총』 52, 2016, 147쪽.
[4-26] 『資治通鑑』 卷200 唐紀16 高宗 顯慶 6年(661) 正月 戊午 조.
[4-27] 이민수, 「660~661년 당의 고구려 공격군 편성과 水軍 운용 전략」, 『한국고대사탐구』 38, 2021, 156쪽.
[4-28] 김용만, 「2次 高句麗 - 唐 戰爭(661-662)의 進行 過程과 意義」, 『민족문화』 27, 2004, 187쪽; 김지영, 「7세기 중반 거란의 동향 변화와 고구려-660년 거란의 이반을 기점으로-」, 『만주연구』 12, 2011, 90-93쪽; 이재성, 「아프라시아브 궁전지 벽화의 '조우관사절(鳥羽冠使節)'이 사마르칸트[康國]로 간 원인, 과정 및 시기에 대한 고찰」, 『동북아역사논총』 52, 2016, 147쪽; 이민수, 「660~661년 당의 고구려 공격군 편성과 水軍 운용 전략」, 『한국고대사탐구』 38, 2021, 156쪽.
[4-29] 김용만, 「2次 高句麗 - 唐 戰爭(661-662)의 進行 過程과 意義」, 『민족문화』 27, 2004, 187쪽.


진군로: 장잠도행군의 경우

비슷하게 장잠도행군의 경우, 대총관 아사나충이 동돌궐 출신의 번장이므로 동돌궐병이 주로 배속되어 있었을 공산이 큽니다.[4-30] 그런데 당시 동돌궐 항호들은 막남의 운중도독부 및 정양도독부에 배치되어 있었으므로[4-31] 아사나충은 내몽골 일대에서 병력을 모은 후 영주를 거쳐 요동으로 진격한 것으로 추정됩니다.[4-32] 구체적인 공격 목표는 불분명하나, 이후 거란과 전투를 벌인 것을 고려하면[4-33] 시라무렌강 일대로 북상한 것으로 생각되고요. 따라서 소사업군과 합세하여 부여성 방면을 공격하려 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4-34]

[4-30] 이성제, 「7세기 東突厥系 蕃將과 蕃兵의 활동 : 麗唐戰爭 시기 활동을 중심으로」, 『동양사학연구』 125, 2013, 202쪽.
[4-31] 『唐會要』 卷73 安北都護府.
[4-32] 이민수, 「660~661년 당의 고구려 공격군 편성과 水軍 운용 전략」, 『한국고대사탐구』 38, 2021, 156쪽.
[4-33] 서영교, 「唐高宗 百濟撤兵 勅書의 背景」, 『동국사학』 57, 2014, 333쪽.
[4-34] 이민수, 「660~661년 당의 고구려 공격군 편성과 水軍 운용 전략」, 『한국고대사탐구』 38, 2021, 156쪽.


진군로: 요동도행군의 경우

그리고 요동도행군의 경우, 행군명에서 알 수 있듯 요동을 공격한 것으로 생각되나 그 진군로에 대해서는 논쟁이 있습니다. 대총관 계필하력이 압록수에서 등장하는 것을 두고 요동을 육로로 통과하여 압록수에 도달한 것이라고 보기도 하고, 수로로 압록수에 도달하여 상륙한 것이라고 보기도 합니다.[4-35] 그런데 당시 고구려의 요동 방어선은 앞서 언급한 연개소문의 성책 증설 등으로 인하여 보강 및 회복된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러한 방어망을 아무런 전투도 없이 통과하여 압록수까지 도달하는 것은 어려우며, 만일 고구려군의 저지를 뚫고 도달하였다면 그러한 승리가 기록에 남았을 것입니다.[4-36] 실제로 정명진군은 고구려군과 전투를 벌인 사실이 전해지는 것에서 이를 알 수 있죠.

[4-35] 이민수, 「660~661년 당의 고구려 공격군 편성과 水軍 운용 전략」, 『한국고대사탐구』 38, 2021, 145-146쪽.
[4-36] 김용만, 「2次 高句麗 - 唐 戰爭(661-662)의 進行 過程과 意義」, 『민족문화』 27, 2004, 189-190쪽.


그렇기에 요동도행군은 해로를 이용하였을 공산이 큽니다.[4-37] 이와 관련하여 660년 압록도행군부총관에 제수된 설만비가 출정을 위해 산동반도의 래주에 간 것이 주목되는데요.[4-38] 앞서 평양도행군, 패강도행군, 옥저도행군 등도 래주에서 배를 타고 출발해 고구려를 공격한 바 있으므로, 압록도행군은 이들과 유사하게 수로로 고구려에 도달하였을 것입니다. 행군명을 볼 때 압록도행군은 계필하력이 등장하기 전에 이미 압록수에 당도해 있던 ‘여러 군사들’[4-39] 중 하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압록도행군은 계필하력 휘하의 여러 도행군 중 하나였으며, 수군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4-40]

[4-37] 우석훈, 「遼河 유역의 高句麗 千里長城」, 『군사』 92, 2014, 114쪽.
[4-38] 이민수, 「660~661년 당의 고구려 공격군 편성과 水軍 운용 전략」, 『한국고대사탐구』 38, 2021, 148쪽.
[4-39] 『資治通鑑』 卷200, 唐紀16, 高宗 龍朔 元年 9月, “高麗蓋蘇文遣其子男生以精兵數萬守鴨綠水, 諸軍不得渡.”
[4-40] 이민수, 「660~661년 당의 고구려 공격군 편성과 水軍 운용 전략」, 『한국고대사탐구』 38, 2021, 148쪽.


또한 계필하력이 직접 이끈 요동도행군 역시 선박을 보유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사료가 존재합니다.

용삭(龍朔) 원년(661), 조서를 내려 (계필하력을) 요동도행군대총관으로 삼고, 9월을 기해 수륙양군이 평양에서 크게 모이도록 하였다. (그런데) 병사들이 압록에 이르자, 파도가 넓고 커서, [舟]로는 건널 수가 없었다. 기한을 지키지 못할까 두려워, 하늘을 우러러 외치기를, 충성스러운 뜻을 갖추어 말하였다[申]. (그러자) 찬바람이 네 번 일어나, (강물의) 흐름이 다하고 멈추어 (얼어서) 합쳐졌다. 군사들이 겨우 건너자, 얼음이 그 뒤에 따라서 녹으니, 고려(高麗)가 신기하게 여겼다.
龍朔元年, 詔爲遼東道行軍大總管, 于時九月, 水陸兩軍, 大會平壤. 兵至鴨綠, 波濤浩瀚, 無舟可濟. 恐失王期, 仰天而囂, 具申忠志. 寒風四起, 流澌立合. 軍衆纔渡, 冰隨後銷, 高麗謂神.
- 「계필숭묘지명(契苾嵩墓誌銘)」 -

따라서 요동도행군은 배를 타고 압록수 북안 부근에 상륙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때 배를 타고 이동하였음에도 압록수를 쉽게 건너지 못한 것은 연남생이 지휘하는 수만 명의 고구려군이 압록수 남안에서 이를 견제하였기 때문으로 보입니다.[4-41] 또한 3차 고당전쟁 당시 이세적과 계필하력이 압록수 하구의 대행성을 점령하여 병참항구로 사용한 것[4-42]을 고려하면, 요동도행군이 압록수로 진격한 이유는 평양 공격군 등의 보급선을 확보하고 요동의 고구려군이 평양과 연계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여겨집니다.[4-43]

[4-41] 장창은, 「660~662년 고구려와 신라 · 당의 전쟁」, 『신라사학보』 38, 2016, 88쪽.
[4-42] 서영교, 「당의 해양력과 고구려 - 당의 2차 침공(647년) 이후를 중심으로」, 『유라시아문화』 8, 2023, 316쪽.
[4-43] 이민수, 「660~661년 당의 고구려 공격군 편성과 水軍 운용 전략」, 『한국고대사탐구』 38, 2021, 151쪽.


압록수 돌파: 전쟁 초기 당군의 승세

압록수는 본래 조수간만의 영향으로 1일 2회 정도만 도하가 가능하였다고 추정되는데, 연남생군은 이러한 환경을 이용하여 방어전을 전개한 듯합니다.[4-44] 그런데 상술된 대로 계필하력이 도착하자 곧 압록수가 얼어붙으며 당군이 걸어서 도하하는 것이 가능해졌습니다. 압록강은 일반적으로 12월경 결빙된다는 기록[4-45]을 볼 때 이러한 예기치 못한 상황은 연남생군에게 악재로 작용했을 것입니다.

[4-44] 이민수, 「661년 고구려-당 전쟁의 전황」, 『군사』 122, 2022, 222쪽.
[4-45] 『奉天通志』 卷163, 交通3 船路下, “每年冬季十二月至翌年三月凡四月爲凍氷時期, 船舶不能通行.”


요동도행군은 이러한 호기를 이용하여 연남생군을 격파하고 수십 리를 추격하여 3만 급을 참수하였으며, 일부의 항복을 받았습니다.[4-46] 이때 계필하력군은 현재의 평안북도 철산군으로 비정되는 철산진(鐵山陣)까지 이르렀다고 합니다.[4-47] 요동도행군은 이러한 승리를 통해 해상 보급의 거점을 마련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평양 방면으로도 병력을 투사할 수 있게 되었지요.[4-48] 연남생은 겨우 죽음을 면하여 도망쳤는데, 이 때문에 압록수의 전투는 그의 군사적 권위에 상당한 타격을 입힌 오점으로 여겨집니다.[4-49]

[4-46] 『舊唐書』 卷109 契苾何力傳.
[4-47] 이민수, 「661년 고구려-당 전쟁의 전황」, 『군사』 122, 2022, 220쪽.
[4-48] 이민수, 「661년 고구려-당 전쟁의 전황」, 『군사』 122, 2022, 223쪽.
[4-49] 이강래, 「7세기 고구려 인식과 정통성의 문제」, 『역사학연구』 60, 2015, 31쪽.


따라서 이때까지의 전황을 보면, 당군은 고구려 수군을 압도하며 평양 상륙에 성공하였을 뿐 아니라 압록수에서도 의도하던 성과를 이루어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비록 요동 방어선에서는 성을 함락하는 등의 전공이 확인되지 않지만, 그럼에도 요동과 평양이 단절된 상황에서 13만 이상의 병력이 수도를 노린다는 전황은 고구려에게 위기감을 불러일으켰을 것입니다.[4-50] 불과 1년 전에 백제를 멸망시킨 것도 바로 이러한 수륙군의 협격이었죠. 사실 당나라 수뇌부는 이 시점에서 승리를 점치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4-50] 방용철, 「연개소문의 후계구도 정립과 사망(死亡)」, 『대구사학』 131, 2018, 126쪽.


물론, 이후에 실제로 벌어진 일은 그와는 꽤 다른 것이었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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