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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23/11/23 16:31:32 |
Name | 알료사 |
File #1 | 앵무새.webp (15.6 KB), Download : 6 |
Subject | 쿠아란타리아 서 - 이브를 위하여 |
너희들에게 낙원으로 전해지고 있는 그 동산은 설비 잘 된 사육장이었고 그곳에서 행복했다고 전해지는 너희 원조(아담과 하와)는 다만 한 쌍의 순한 짐승이었다. 저 창조의 날에 내 지혜가 부여했던 여러 빛나는 속성들은 단죄 속에 자취를 감추고 남은 것은 다만 독선의 말씀에 대한 습관적인 복종과 식물같은 생명력 뿐이었다. 나는 너희 원조에게서 뽑혀져 나간 본성의 반쪽이, 내 지혜가 부여한 여러 자랑스러운 속성이 어디로 가버렸는지를 알아보았다. 멀리 갈 것도 없이 그것들은 동산 가운데 있는 어떤 나무의 과일 속에 감추어져 있었다. 뒷날 너희 족속에게는 선악과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과일이었다. 한번 그 나무를 쳐다보자 나는 내 반쪽의 독선과 허영에 노여움보다는 차라리 경멸이 일었다. 엄한 말씀의 쇠울타리를 둘러놓고도 그는 그 나무에 가장 당당한 줄기와 싱싱한 잎새를 주고 있었다. 과일에는 또 동산의 어떤 것보다 먹음직스러운 모양과 향내를 더해 놓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것을 바라볼 때마다 느끼는 강렬한 유혹 - 아무리 쓸어내고 지워도 본성 속에 희미한 자국을 남기고 있는 아름다움을 즐길 권리와 진실을 알 권리의 기억 - 을 이겨나가는 너희 원조의 괴로운 절제와 순종 속에서 그는 자신의 절대적인 지배를 확인하며 즐거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너희 가엾은 원조는 그 과일에 대한 거짓 설명에 속아서 그게 처음에는 자신들의 가장 자랑스러운 일부였음을 까맣게 잊고 죄악과 사망의 열매로만 알고 있었다. 회복의 권리를 오히려 상실의 유혹으로만 알고 거기에 떨며 저항하고 있었던 것이다. 창조란 우리의 권리이고 의무였다. 불행만을 목적으로 하는 창조는 허락될 수 없다. 우리 양성의 조화를 구현한 너희는 마땅히 처음 지음받은 대로 누려야 한다. 그게 나의 결론이었다. 그 결론의 실천을 위해 일해 줄 쪽을 찾던 나는 남자보다 여자 쪽을 골랐다. 너희 족속으로는 영원한 어머니 이브였다. 진작부터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그 나무 주위를 서성이며 열망에 찬 눈빛을 던지는 그녀를 눈여겨봐 두었던 것이다. 나는 가만히 지혜의 뱀을 보내 그녀에게 모든 진실을 일러주게 했다. 너희들이 알고 있는 그런 간교한 유혹이 아니라 정당하고 사심 없는 고지였다. 내 짐작이 옳았다. 너희 영원한 어머니는 별다른 부추김이나 격려 없이도 훌륭히 잃었던 모든 것을 되찾았을 뿐만 아니라 미련하고 겁 많은 그 지아비까지도 말씀의 독선에서 풀어냈다. 어렴풋한 대로 무슨 향수처럼 그녀의 영혼에 남아 있던 창조 첫날의 기억이 야훼의 앞뒤 없는 분노에 대한 공포를 이기게 했음에 틀림없다. 네가 세상 곳곳을 떠돌며 보았듯이 땅 위의 모든 족속들은 한결같이 <위대한 어머니> 또는 <구원의 모신>을 받들고 있다. 너희들은 흔히 그것을 생산과 연관지어 생각하겠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여자와 생산이 옛적의 의미로 묶이기 어려운 뒷날에도 <여성적인 구원>을 말하는 이가 너희 중에 자주 나올 것인데, 그것은 그날의 이브 이래로 여인에게만 전해오는 어떤 정신적인 힘에 대한 믿음 때문이다. 전날까지도 모든 피조물의 완전한 복종을 상징하던 척도가 하루아침에 못 쓰게 된 데 대한 내 반쪽의 분노는 대단했다. 뿌리 깊이 상처 입은 독선과 느닷없이 깨져버린 자아도취는 곧 맹렬한 증오가 되어 너희 원조 머리 위에 떨어졌다. 너희 원조는 그날로 동산에서 쫓겨나고 갖가지 끔찍한 벌이 뒤따랐다. 예정되지 않았던 태어남과 죽음이 너희들의 영원한 생명을 대신하였으며 일찍이 몰랐던 불화와 갈등이 너희끼리의 행복을 금가게 했다. 땅은 저주받아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냈고 메마른 그 나머지도 너희가 피땀 흘려 일하지 않으면 먹을 것을 얻어낼 수 없었다. 그때로부터 노역과 고통의 날이 시작되었으며 슬픔과 외로움과 두려움의 밤이 너희를 찾게 되고 또 이브에게는 따로이 임신과 분만의 고통이 더해졌다. 너희는 원망하겠지만 나의 지혜도 당장은 그런 그의 분노를 어찌할 수 없었다. 거기까지 간 우리의 자기분열이 더욱 돌이킬 수 없는 자기부정으로 자라 모처럼의 창조가 저 태초의 침묵과 무위로 되돌아가는 것을 나는 원하지 않았다. 거기다가 너희가 받게 된 고통의 어떤 부분은 다시 찾은 지혜와 자유의 값으로 마땅히 그에게 되갚아야 할 것이기도 했다. 그 동산에서 너희 원조가 누렸던 행복 중에는 그것들을 그에게 팔아 넘긴 대가였다고 할 수 있는 부분도 분명 있기 때문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너희 눈물과 노고의 땀이 그의 분노를 진정시킬 때를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그리하여 언젠가 다시 이 대지가 너희 것이 되고, 너희는 그 위에서 처음 지음받은 대로 사랑하며 누리고 사는 날이 오기를 빌었다. 나만의 헛된 바람이었다. 그는 어이없게도 너희가 되돌아올 것을 믿고 있었다. 너희 원조의 존재회복을 자신의 패배로만 받아들인 그는 그 패배를 가져다 준 자유(의지) 아래 너희를 자신의 독선 속으로 되불러들여 필경에는 있을 그날의 승리에 영광을 더하려 했다. 거기다가 이브의 출산을 시작으로 머릿수가 불어난 너희 가운데 그런 그의 잘못된 믿음을 부추기는 무리가 생겨났다. 거룩한 사제들과 힘센 왕자들 - 너희 족속으로 보면 그 숱한 믿음의 족장들과 열정의 예언자들, 사사며 열왕이 바로 그들이었다. 그들은 애써 찾은 자유를 감당하지 못해, 또는 광기나 비굴, 이 땅에서의 필요 따위에 휘말려 스스로 독선의 품에 되안겼다. 그러나 더 많은 너희는 그들과 달랐다. 우리의 불화로 그 어느 쪽도 온전해지지는 못했지만, 더 많은 너희는 지혜 없는 선, 자유 없는 정의에 갇히기보다는 완벽하지 못한 대로 양쪽을 모두 누리기를 바랐으며 겨우 되찾은 존재의 반분을 포기하고 그의 풍요한 동산에 들기보다는 거친 자연과 싸우면서도 이 세상에 남는 쪽을 골랐다.. . . . . . 천지창조를 한 야훼가 피콜로와 신이 원래 한 몸 나메크인이었던 것처럼 선과 악(으로 불리워지는 지혜)을 한 존재에 품은 우주의 최고정신이었으며 선이라 불리우는 신이 아담과 하와를 속박할 때 악이라 불리우는 지혜가 그것을 만류하려다가 모종의 이유로 살짝 양보하는 바람의 반쪽뿐인 야훼의 독선이 폭주를 시작했고 에덴동산에 갇히기를 거부한 인류가 불행에 빠진 이후 야훼가 그들을 다시 에덴동산으로 불러들이려 예수를 보냈듯 자신 또한 예수에 대항할 <사람의 아들 - 작중 아하스페르츠>를 내보내 그에 맞서게 한다.. 라는 발상 예수와 같은 시기에 다른 지역에 한 랍비의 아들로 태어나 자란, 독자로서는 아직 정체를 모르는 아하스 페르츠의 생애를 따라가다가 그가 어느날 광야에서 누군가를 마주쳤고 상대가 다름아닌 예수라는걸 눈치챈 순간, 그리고 거기서부터의 대화를 통해 그간의 빌드업이 머릿속에서 촤륵 정리가 되면서 느껴지는 카타르시스가 꽤 달달한 작품.. 네 이상 또문열의 또람의 아들 앵무새였습니다.. ㅋㅋ 저의 앵무새짓은 지겨우시겠지만 어떤 유동들에게는 이것 또한 생소하고 처음 접할 수 있다는 것이 '끌올'과 '꾸준글'이라는 것의 기능이기에, 탐라에서 기독교의 미소지니 떡밥을 보고 고대신앙에서 여성성 중심의 관점이란게 가능했다면 어떤 모습이었을까? 이렇게 바라보면 또 새롭게 보이는 작품이지 않을까 싶어서 올려봅니다.. ㅋㅋ 전혀 그런 논조로 진행되지는 않지만, 에덴동산에 대한 반기 - 그 자체의 선봉장은 어쨌든 이브이니..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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