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23/07/27 23:20:47수정됨
Name   김비버
Subject   필리핀 정치 이야기(1) - 학생운동과 NPA
한국으로 치면 ‘수도권’에 해당하는 필리핀 지역을 ‘메트로 마닐라’라고 합니다. 마닐라 주변에 있는 거대한 도시 클러스터 지역을 지칭합니다. 그 중 ‘퀘존’(Quezon)이라는 도시가 있는데, 그곳에는 필리핀 국립대학 딜리만 캠퍼스(University of the Philippines, Diliman)가 있습니다.

필리핀 국립대학은 필리핀 전역에 걸쳐서 캠퍼스가 있고, 각 캠퍼스별로 특색이 있습니다. 가령 ‘필리핀 국립대학 의대’는 마닐라 캠퍼스(UP Manila)에 있습니다. 농대와 산림대학, 농경제학은 화산지대에 있는 로스바뇨스 캠퍼스(UP Los Baños)가 유력하고, 해양대는 제도 지역에 있는 비사야 캠퍼스(UP Visayas)가 유력합니다. 이처럼 ‘UP’는 각 캠퍼스가 병렬적인 관계이고, 한국의 일부 사립대처럼 본캠-분캠의 관계가 결코 아닙니다.

그럼에도 필리핀 로컬에서 자타공인 ‘최고’로 칭하고 가장 좁은 의미의 UP만을 얘기할 때에 지칭되는 캠퍼스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UP Diliman입니다. 그 이유는 UP Diliman에 필리핀 개혁적 기득권세력의 한 축을 담당하고, 중산층 기술관료 배출의 산실인 법대와 사회과학대학이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필리핀 학생운동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그 UP Diliman 법대생 수명이 두테르테 대통령 시절인 지난 2016년경 군부에 의해 납치되어 강간 및 고문, 가까스로 탈출 후 고문 사실을 폭로하였다는 말을 우리 회사 UP 출신 친구들에게 들었던 일이었습니다. 지금 와서 다시 조사해보니 그 사건의 진위에 대해서는 확신은 없습니다. 구글 검색등을 통하여 믿을만한 매체 내지는 다수 매체의 일관된 진술등을 통한 전문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위와 같이 전문되어 인정할 수 있는 몇 가지의 역사적 사실은, (1) 민주화 이후 아키노 대통령 시절인 1993년 UP Los Baños 학생 두 명이 경찰들에 의해 납치되어 강간, 고문 후 암매장 되었던 사건(https://en.wikipedia.org/wiki/Murders_of_Eileen_Sarmenta_and_Allan_Gomez) (2) 아로요 대통령 시절인 2006년에 UP Diliman 학생 두 명이 군부에 의해 납치, 강간 후 살해되었던 사건(https://manilatoday.net/9-years-justice-still-elusive-abduction-of-2-missing-up-students-commemorated/) (3) 베니그노 아키노(민주화 직후 아키노 대통령의 아들) 대통령 시절인 지난 2014년 UP Diliman 학생 두 명이 군부에 의해 납치된 후 감금, 고문 및 임의 조사를 거쳐 불법 무기 소지, 반란죄 등의 혐의로 군부가 유죄 선언을 하고, 이후 구속 상태에서 재판을 받던 중 자백하여 유죄 판결을 받았다는 점을 해당 대학 학생회 측에서 주장하는 사건(https://newsinfo.inquirer.net/641453/ridon-2-up-students-arrested-for-alleged-npa-links-tortured) (4) 두테르테 대통령 시절인 지난 2017년 UP Diliman 학생 한 명이 10일 간 실종된 후 시체로 발견되었으며, 해당 시체에서 고문의 흔적이 발견되었다고 담당 의사들이 증언했다는 점을 해당 대학 학생회 측에서 주장하는 사건(https://www.philstar.com/headlines/2017/09/04/1735729/what-we-know-so-far-killing-carl-arnaiz-19)입니다.

위와 같은 일련의 유사한 사건으로 인하여 UP 학생사회에서 트라우마틱한 알레르기 반응이 있었고, 그로 인하여 허위의 사실이 루머처럼 번졌을 수도 있지만, 적어도 제가 필리핀 사람들과 사업을 하던 2017~2020년 당시 2016년에 위와 같은 사건이 있었다는 것이 UP 학생사회에서 구전으로 공유되던 ‘상식’이었던 것은 분명히 기억합니다. 그리고 그 '사건' 내지 '상식'의 여파는 UP Los Baños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필리핀은 2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 큰 공산주의 폭동(혁명시도)이 있었던 이래 끈질긴 공산주의 무장세력이 잔존하고 있는데, 현대에 이르러서는 'NPA'(New People's Army)로 계승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UP Los Baños는 첩첩한 화산지대 가운데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NPA 게릴라들이 숨어들기 쉬운 환경이었고, 그렇게 숨어든 NPA 인원들이 UP Los Baños 학생들을 포섭하였습니다. 그러나 2019년 로스쿨 개학 직전 길게 필리핀에 방문했을 당시 UP Los Baños 학생회 임원이었던 우리 회사 기획자의 안내로 제가 만났던 NPA 학생 게릴라들은 공산주의 사상으로 무장했다기보다는 휴머니스트, 민족주의자 내지 혁명의 열정으로 들뜬 젊은이들이었습니다.

당시 그들이 제 출현을 반겼던 이유는 다름 아닌 한국의 근대화 역사 지식, 특히 박정희에 대한 지식에 목말라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발적으로 세미나를 개최하여 싱가포르의 리콴유, 한국의 박정희를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그 세미나를 이끌어 주기를 원했습니다. 필리핀은 1988년, 우리의 6월 혁명과 유사한 온건한 입헌주의적 시민 혁명(PPR; People Power Revolution)을 경험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PPR을 통해 영웅으로 떠오른 아키노 가문은 근본적으로 스페인 식민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는 대지주 가문이고, 실제로 코라손 아키노 혁명정부의 핵심 아젠다로서 의욕적으로 추진했던 '농지개혁'은 처참하게 실패하였으며, 그 이후 뚜렷한 정치적 리더십 없이 족벌들의 이합집산으로 지지부진하게 전개되는 필리핀 정치에 대부분의 민중과 엘리트 모두 염증을 느끼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이에 제가 목격했던 바, UP Los Baños 학생운동가들 사이에서도 자유주의적, 입헌주의적 방식으로는 개혁 아젠다를 리더십 있게 추진할 수 없다는 식의 느슨한 합의가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귀족들은 자신들의 생명이 문제될 때에는 자유주의를 이야기하면서, 민중의 생명이 문제될 때는 자본주의를 얘기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차라리 모든 인간을 동등한 효용 주체로 취급하는 공리주의적 방식이 우월하다는, 지난 인류 역사에서 반복적으로 관찰되어 온 혁명세력의 자연스러운 사고 흐름입니다.

어쨌든 위 세미나의 개최를 위해 필리핀 역사와 농지개혁 사례를 공부했던 기억이 납니다. 아쉽게도 회사를 떠나보내고 로스쿨 공부에 전념하기로 결정하여 더 이상 관여하는 것은 멈추었지만, 일련의 만남과 공부의 과정에서 개인적으로 느낀 것이 있습니다. '개혁은 호쾌한 정복이 아니라 지루한 싸움이다'는 것입니다. 이는 특히 필리핀 농지개혁의 실패 사례에서 배울 수 있었습니다. 거칠게 말하면 필리핀 농지개혁은 충분히 개혁적이지 못했다거나 반동세력의 저항이 있었기 때문에 실패한 것이 아니라, 지루한 싸움을 견뎌내지 못하여 자멸했습니다.

여기까지가 저의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의 이야기입니다.

사실 이 글을 쓰기까지 많이 주저했는데, 그 이유는 (1) 제가 본 것이 전부가 아니며 다소의 왜곡 내지 착각이 있을 확률은 거의 100%이고 (2) 제가 그들의 운동에 함께하여 인생을 걸었던 것도 아닌데 마치 재미난 경험 '썰' 풀듯이 소비하는 것이 꺼려졌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이 글을 적기로 한 이유는 제가 보고 배운 것이 지금의 한국 현실에 도움이 될 것 같다고 생각하였고, 현실적으로는 위의 이야기로 시작하는 것이 이목을 끌기에 좋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다음 글에서는 필리핀 농지개혁의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하고, 보다 중요하게는 '개혁'에 대해 우리가 견지해야 할 태도에 대한 저 나름의 생각을 적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2
  • 개혁. 그 지난한 타협의 도정.
  • 다음글이 기대되네요.
  • 농지개혁 글 기다립니다...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14581 정치MBC 여론M 최종 버전 14 당근매니아 24/04/07 2916 2
14569 정치선거공보 정독하기 1 당근매니아 24/04/01 1341 6
14553 정치지금 판세가 어떨까요 를 가늠할수 있는 지표 32 매뉴물있뉴 24/03/22 3059 0
14518 정치오늘자 공보 파견 이슈인데요 25 붉은 시루떡 24/03/08 2299 0
14506 정치보수 과표집의 실체에 대하여 12 매뉴물있뉴 24/03/05 2093 0
14500 정치정당정치의 실패와 이준석, 이낙연의 한계 6 알탈 24/03/03 2103 7
14499 정치이준석의 인기 쇠퇴를 보면서 - 반페미니즘 정치는 끝났는가? 21 카르스 24/03/03 2817 0
14332 정치[펌] 임성근 전 사단장 진술서에 대한 해병대 생존병사 입장문 10 레이미드 23/12/14 1788 1
14310 정치지방 소멸을 걱정하기에 앞서 지방이 필요한 이유를 성찰해야 한다. 39 Echo-Friendly 23/12/05 3517 17
14263 정치정치적으로 중립적인 커뮤니티는 존재하는가? 37 OneV 23/11/07 3098 3
14195 정치'대북송금·뇌물' 이화영 세번째 구속…변호인 "유례없는 일" 1 과학상자 23/10/14 2057 3
14139 정치'실무중심 법학'의 모순과 문제점 (1) 3 김비버 23/09/10 2148 11
14131 정치구척장신 호랑이 포수 장군의 일생 3 당근매니아 23/09/05 1854 14
14128 정치와 지친다... 16 매뉴물있뉴 23/08/31 2728 3
14071 정치필리핀 정치 이야기(1) - 학생운동과 NPA 4 김비버 23/07/27 2272 22
14055 정치그냥 오늘 커뮤보면서 했던 생각 37 매뉴물있뉴 23/07/21 4164 37
14008 정치전제주의 리트머스 시험지로 진단해본 윤석열 (+문재인-이재명과 비교) 4 카르스 23/06/28 2442 10
14004 정치정부의 노동조합 회계 공개요구와 ILO 기본협약 제87호 간 충돌 4 당근매니아 23/06/26 1876 9
13985 정치트럼프의 놀라운 범죄 ~ 잃어버린 문서를 찾아서 ~ 8 코리몬테아스 23/06/14 2492 9
13980 정치스탈린 방식의 '힘의 논리'는 어디까지 통할까요? 10 컴퓨터청년 23/06/13 2452 0
13954 정치민주당 그냥 생각나는대로 20 매뉴물있뉴 23/06/06 2795 1
13943 정치지록위마 2 닭장군 23/06/03 2053 0
13930 정치정치에 관심 끊고 살겠다고 다짐했는데..... 9 컴퓨터청년 23/05/31 2148 1
13874 정치편향된 여론조사를 알아보는 방법 6 매뉴물있뉴 23/05/18 2276 19
13848 정치최강욱 의원의 '짤짤이'는 '짤짤이'였습니다. 19 유미 23/05/13 3033 0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