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23/07/24 01:44:02
Name   골든햄스
File #1   6fb9f7c48cc901c5bec0f9b21c1462c0fba701c8_2000x2000.png (27.3 KB), Download : 2
Subject   벗어나다, 또는 벗어남에 대하여




오늘 하루는 단 한 번도 아버지 생각을 하지 않고 보냈습니다. 이번에 새로 간 교회에서, 저와 남자친구는 부부로 오해를 받았습니다. -일전에 썼지만 저는 유종교주의자입니다. 종교시설은 가리지 않습니다-

부부일 경우 청년부(요즘 교회는 많이 노화되어 꽤 나이가 되어도 청년부로 갈 수 있습니다)뿐 아니라 성인부도 갈 수 있다 합니다. 민법의 성년의제도 아니고, 결혼을 하면 성인이란 느낌이 새삼 새롭게 느껴졌습니다. 실제로 내년에 남자친구와 신고 내지는 식을 올리는 걸 목표로 하고 있기는 합니다.

그간 남자친구의 이야기를 티타임에 올리지 않은 데는, 물론, 쑥스러우니까!! 라는 이유도 있지만 남자친구를 만나며 제가 겪은 수많은 내·외적 갈등을 설득력 있게 묘사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두 개의 세계가 중첩된 한가운데 있었고, 그렇기에 무언가 하나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불가능했습니다. 이제 저는 남자친구의 세계로 들어서는 것 같습니다. 그렇기에 제 이전의 세계는 이전의 것으로 분류하고, 지금의 세계는 지금으로 확연히 나눌 수 있는 기준이 생긴 것이므로 이 글을 쓰는 것도 가능할 것 같습니다.

처음 남자친구와 연애를 시작했을 때 남자친구는 왜 이리 제가 가난에 예민하게 반응하는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고액과외 논란으로 학교에서 파란만장하게 욕을 먹을 때도, 드라마 주인공처럼 웃으면서 극복할 수도 있는 거 아니냐고 했습니다. 저는 제가 겪는 어려움을 제 문제와 분리시키지 못하고 계속해서 억울함을 느꼈습니다.

또, 저는 남자친구가 만나는 사람들의 이력과 학력, 배경을 자연스럽게 파악하는 것이 자못 불쾌했습니다. 저 기준에 따르자면 나와 내 흙수저 친구들은 평생 이 바운더리에 낄 수도 없는데 나는 운 좋게 여기에 한 발 걸치고 있는 거 같아서, 길로틴의 날이 목 옆에서 달랑거리는 거처럼 무서웠습니다. 억지로 친구들에게 빚 돌려막기로 생활비를 대출하며 지내고 있는 생활이 안 그래도 불안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저의 세상에 대한 억하심정에 남자친구는 한참을 괴로워해야 했습니다. 저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위선자일 거라고 반응했고, 법에 분노했으며, 치안을 믿지 못하였고, 당장의 생존을 위해서라면 칼을 들고 자해소동이라도 벌일 수 있노라고 당당하게 말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저 자신에게 느끼는 감정은 순전히 자긍심, 프라이드였습니다.

"나는 이만큼이나 선을 넘을 수 있어. 너는 어떻지?" 흔히 사회적 자본이 낮은 계층끼리 싸울 때 보이는 치킨게임(*누가 더 겁쟁이인지 승부하는 게임)의 양상. "나는 내가 가족 도움 없이 로스쿨을 졸업하기 위해서는 뭐라도 할 거야. 나는 내 존엄성을 위해 싸울 거야. 나는 가난한데 노력도 안 한 사람이니 당연히 너는 영원히 사회의 심연 속에 있으라는 사람들의 말에 승복하지 않을 거야. 나는 아버지의 학대로 내 인생을 결정짓고 싶지 않아!" 당연히 남자친구는 겁에 질렸습니다. 그럴 만도 합니다.

지금 쓰다 보니 매우 미안합니다.

남자친구는 정해진 교실 안에서 일련의 활동들을 하며, 반장을 맡고, 더욱 좋은 성적을 위해 정진해 약속한 보상을 아버지께 받아내며 확실히 한 단계 한 단계 성장해나가는 삶을 살았습니다. 간단한 심리검사를 해본 결과 남자친구가 남에게 갖는 신뢰는 100점 만점에 90점 이상이었습니다. 남자친구는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군대, 로스쿨 스쳐간 곳마다 인연이 남는 '오래 볼 수 있는 신뢰 가는 사람'입니다. 저는 물론 평균 미만의 신뢰도를 보이는데다, 사람들과도 엉망진창입니다. 어릴 때부터 어른들을 포함해 대체로 모든 사람들이 제게는 거짓말만 했거든요. 교과서조차도 거짓말 같아 들여다보지 않았을 정도였습니다.

싸우고, 울고의 반복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이었습니다.
저는 해리포터를 줄줄이 외울 정도의 해덕(해리포터 덕후)이고, 남자친구는 해리포터를 읽다 만 중도 하차자입니다.
관련해서 저는 "나는 우즈가 어떤 퀴디치 팀으로 갔는지까지 외우고 있어. 나는 책 내용을 거의 외웠어." 라면서 술술 내용들을 말했습니다. 실제로 책장이 떨어져 나갈 정도로 책을 자주 읽어 외우다시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남자친구가 눈물을 글썽입니다.

왜? 물어보니 답이 그렇습니다. 부모의 방치, 학대 하에 책만이 유일한 친구라 해리포터를 그렇게 줄줄이 외우도록 잡고 있었을 모습이 짠해서. 몇 번이고 그리 말했습니다. 저는 그간 응급실이며 경찰서며 피투성이 밤들이며 별의별 이야기를 다 했는데 '여기'서 공감 포인트가 터질 줄 몰라 어리벙벙했습니다. 그런데 남자친구는 그 점이 정말 마음이 아팠다고 합니다. 어쩌면 어린 아이가 고개를 숙이고 아직 다 자라지 않은 얼굴을 책에 처박고 몇 번이고 같은 구절을 읽는 모습 같은 것을 상상해낸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조금 다른 언어를 쓰는 둘이지만 맞춰나갔습니다. 때때로 서로 알 수 없는 데서 싸웠듯이, 때때로 서로 알 수 없는 데서 공감에 성공했습니다.

한 번은, 로스쿨을 걷는데 고개를 숙이고 걷는 네 모습이 짠해서 자는데 안고 위로하는 말을 속삭여줬었다고 했습니다.

또 한 번은, 제가 사람들에 대해 분노에 젖어 무슨 일이라도 벌이고 싶다고 하는데 꼭 안아줍니다. 무엇이든 같이 하겠다고. 난 네가 참 불쌍하다고.

저도 남자친구를 봅니다. 남자친구는 법과 경영에 참 진지합니다. 법에 대해 수없이 경우의 수를 나눠 분석하는 글을 블로그에 올리고 뿌듯해 하며, 강박증으로 고통까지 받습니다. 법조윤리 시험을 교수저로 통과한 사람도 이 사람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그만큼 교과서를 읽으며 차근차근 민법주해까지 참고하며 공부하는 걸 좋아합니다. 어느 순간이든 매 순간 최선을 다해서, 중학교 때는 수학자가 꿈이었어서 미친 사람처럼 수학 증명에 매달린 적도 있고 한때는 바이올린에 최선을 다했었습니다. 자기소개도 '경영을 사랑한다'고 할 정도의 사람입니다. 교과서대로 차근차근 공부해와서 세상을 곧바로 보고, 역사와 정치에 관심이 많아 아시아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이제는 옛날이었으면 불편했을 대화들을 다시 생각해봅니다. 남자친구와 남자친구를 둘러싼 한국 중산층들의 티피컬한 대화들입니다. -그 애 어느 지역 출신이지? 아버지가 뭐 하시지? 무슨 학교 나왔지? -외고가 아니고 일반고? 아 근데 지방이면 평준화 아니라서 ㅇㅇ고등학교면 좀 공부 잘하는 애들 학교지 -부동산 가격이 .... -이번에 건물을 ... -걔랑은 가까워지는 게 ....

이 대화들이 불편했던 건, 어릴 적 "햄스랑 놀지 마" 라고 자기 아이들을 지키던 엄마들의 모습이 아른거려서일 수도 있고, "다들 학원에서 선행은 했지?"라고 수학수업을 해주지 않아 저의 학업을 막았던 학창시절 선생에 대한 안 좋은 기억이나, 누구를 만나든 저러한 일련의 문답들 끝에 결국 '걸러지는' 쭉정이 쪽이었던 저의 피해의식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남자친구 입장에서는 전부 다, 성취를 사랑하고 뭔가를 이룩해내는 걸 좋아하는 입장에서의 당연한 이야기들이었습니다. (물론 남자친구가 그렇게 속물적이지는 않습니다.)

그렇다 해도 저는 항상 남자친구를 통해 다행히 남자친구의 세계와, 이대로 살았으면 평생 이해하지 못했을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이해하게 됩니다.

썩 유쾌한 이야기라 생각해서 제 친구가 학원에서 창문을 통해 도망쳤다는 소리를 하자마자 얼굴이 하얘져서 다신 절 보지 않던 전교 1등 아이, 설거지 후 그릇을 덮어서 물기를 빼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상하게 보던 아이, 너무 아픈 와중에 부모 빚까지 갚으며 앉아있던 저를 보고 위로랍시고 '여기 입학한 것 자체가 효녀야' 라는 말을 하시던 늙은 교수님. 로스쿨 입학식에서부터 시작된 "여러분도 부럽지만, 여러분의 부모가 제일 부럽습니다." 라는 말.

학교에서 잘 지내지 못한다는 말에 바로 연락이 끊기던 친구. 무료 상담이란 이유로 간 정부기관에서 당한 상담사의 비웃음과 약속 단절. 힘든 집안사정이 있다고 듣자마자 전화번호를 물어보고 따로 사적으로 보자고, 호흡법을 알려주겠다고 연신 제 몸을 훑어보던 의사. 절 붙잡고 내내 유독 저한테는 자기 마음을 쉽게 털어놓으며 정치에 대해 투덜거리던 정신과 의사들. 왜 여름휴가를 안 가냐고, 캐묻던 어른들. 해외여행을 안 가는 건 젊음의 낭비라고 혼내던 선배 … 그 모든 것들, 그 모든 것들을 다시 기억 속에서 잊고 재작성하고 다른 각도로 기억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저희 로스쿨 조 애들은 이야기가 잘 통하고 사이가 좋은 거로 유명합니다. 이상하게 취미도 비슷하고 성장시절도 비슷합니다. 가령 "어, 나도 스케이트 타봤어!" 하는 식입니다. 제가 무슨 이야기를 하면 분위기가 급속히 냉동되고 썰렁해집니다. 저는 본의 아니게 자꾸 사람들의 규칙을 어기고, 분위기를 깨트리는 환영받지 못하는 악귀가 된 기분이 듭니다.

하지만 남자친구를 통해, 남자친구의 부단한 학업생활과 성장기를 들으며, 제가 너무도 그들에게 피해의식이 많았던 것이라고 스스로 도닥입니다. 무언가를 위해 계속 함께 공부하고 있고, 집안은 커리어와 재테크 중심, 크면서는 당연하게 비슷한 취미와 자기계발과 여름, 겨울 휴가. 해외여행. 그러한 이야기를 나누는 건 그들에게 어린 시절의 추억을 나누는 것만큼이나, 제게 해리포터를 얘기하는 것만큼이나 당연했던 걸지도 모르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를 향해 달려가는 탑. 신의 탑이라는 네이버 웹툰 작가가 학생들과 인터뷰하며 인생에 대해 한국 학생들이 그려내는 도식이라고 느꼈던 그림. 그것을 저도 느끼고 있었고, 내심 증오하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로 인해 저는 그 탑에서 굴러떨어진 채로 평생을 살아와, 아득바득 탑을 외벽의 벽돌을 타고 기어오르고 있었으니까요. 저는 탑의 침입자. 그들은 탑의 주민. 발생하는 수많은 미스커뮤니케이션을 저는 그들의 저에 대한 혐오로 오해하기도 했습니다.

이제 저는 탑에서 절 향해 손을 뻗어준 남자친구와, 은사님, 많은 사람들 덕에 저라는 모자란 사람의 모습을 다시 확인합니다. 아무리 제가 탑 밖에 있었더라도 대단한 인격자에 재능이 있는 사람이면 진작에 탑 안에 모셔졌겠죠. 가령 저를 두고 왜 바디워시로 몸을 씻지 않고 비누로 씻냐고 몰려와 비웃는 아이들에게 한마디 대꾸 못한 건 밝지 못한 제 잘못이죠. 결국 결함 많고 마음에 미움 많은 한심한 사람입니다. 대단한 사람이었으면 진작에 이런 일은 없었겠죠. 아무리 아버지한테 맞더라도 끝끝내 밝았겠죠. 하지만 한 번 접힌 마음이라도 곱게 펴봅니다. 접혔던 자국은 있어도 종이는 아직 쓸만합니다.

그래도 끝끝내 따뜻한 연민을 받아, 천천히 탑 안에 진입합니다. 남자친구의 손을 잡고 여는 30대의 문은 이전보다는 팔팔한 느낌은 덜한 차분한 복도로 이어지지만, 그만큼 편안하고 따뜻한 성취와 대화의 순간들이 많이 있을 것 같습니다.

이제 엄마와 아빠에 대해서는 한동안 잊고 살아도 될 거 같습니다. 20대 내내, 그들을 부양할 걱정만 했습니다. 그 걱정이 없어지니 갑자기 망망대해에서 자유를 얻은 듯 멍했습니다. 이제 교보문고로 가서, 그동안 '나는 이 사회의 시민이 아냐' 라는 피해의식에 눈에 들어오지 않던 교과서들을 사볼까 합니다. 5대륙 6대주부터 다시 외우기 시작하고, 정치와 법의 기본을 익히고, 한국의 역사에 짜릿해하거나 슬퍼하며, 저도 이 탑의 시민이 되어볼까 합니다.

물론 이야기가 아닌 삶이 그러하듯 또다시, 굴러떨어지는 변동이 있겠지만 시지프스처럼 힘있게 들어올리겠습니다.

그래서 용기 있게 선언하건대, 많이 벗어났습니다. 지켜봐주셔서 다들 감사했습니다.



26
  • 힘스님 햄내세요.
  • 굿
  • 깊고 잘쓴글 잘 읽었습니다 말씀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14075 게임화성남자 금성여자 in 스타교육 - 2 - 5 알료사 23/07/30 2356 12
14074 기타7월의 책 독서모임 줌미팅 - 취소 풀잎 23/07/29 2398 2
14072 음악[팝송] 톰 그래넌 새 앨범 "What Ifs & Maybes" 김치찌개 23/07/28 1598 1
14071 정치필리핀 정치 이야기(1) - 학생운동과 NPA 4 김비버 23/07/27 2243 22
14069 일상/생각림버스 컴퍼니 일러스트레이터 사건에 부쳐 55 당근매니아 23/07/26 3947 0
14068 IT/컴퓨터무선 마우스, 키보드 끊김 해결 4 깨어나기 23/07/26 2792 1
14066 경제재벌개혁 관련 법제의 문제점(1) – ‘일감몰아주기’ 증여의제 과세 3 다영이전화영어 23/07/26 2291 6
14065 창작어쩌다 보니 그림을 그리게 된 건에 대하여 60 퐁퐁파타퐁 23/07/25 3423 13
14064 오프모임[마감]28일 금요일 잠실새내 삼미리 식당에서 냉삼을... 38 소맥왕승키 23/07/25 2466 0
14063 일상/생각와이프에 대한 헌시입니다. 6 큐리스 23/07/24 1916 0
14061 일상/생각벗어나다, 또는 벗어남에 대하여 11 골든햄스 23/07/24 2262 26
14060 문화/예술우울증이란 무엇인가 - 를 가장 완벽히 보여준 영상 4 코튼캔디 23/07/23 2398 6
14058 의료/건강지루성 두피염에 샴푸도 아주 중요하군요... 15 희루 23/07/22 2352 0
14057 꿀팁/강좌[홍보] 자기계발 뉴스레터 & 커뮤니티 '더배러'를 런칭합니다! 6 사이시옷 23/07/21 2105 11
14056 기타구직 - 과외/ 일대일 영어 화상수업 14 풀잎 23/07/21 2917 9
14055 정치그냥 오늘 커뮤보면서 했던 생각 37 매뉴물있뉴 23/07/21 4073 37
14054 사회학생들 고소고발이 두려워서, 영국 교사들은 노조에 가입했다 3 카르스 23/07/21 2509 20
14053 오프모임8/4-6 펜타포트 함께 합시다 >< 16 나단 23/07/20 2234 0
14052 일상/생각회사 다닐 맛이 뚝.. 10 Picard 23/07/18 3004 8
14051 문화/예술이 목소리가 여자 성우라고? - "소년 본좌" 성우들 6 서포트벡터 23/07/18 3905 7
14050 음악[팝송] 제이슨 므라즈 새 앨범 "Mystical Magical Rhythmical Radical Ride" 김치찌개 23/07/17 1595 2
14049 일상/생각학교 담임이야기3? 5 moqq 23/07/16 2291 2
14048 방송/연예2023 걸그룹 3/6 5 헬리제의우울 23/07/16 2637 11
14047 일상/생각3년만의 찜질방 2 큐리스 23/07/15 1932 7
14046 일상/생각썬가드, 다간, 로봇수사대K캅스, 가오가이거가 같은 시리즈물?! 13 cummings 23/07/15 2208 0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