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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23/05/12 17:58:54 |
Name | Iowa |
Subject | 건축에 대한 실망과 메타버스 진입기. intro |
건축학과를 갓 입학했을 때의 전경이 떠오른다. 단상에 선 교수님은 약간 긴 곱슬머리와 깊은 눈매로 예술가적 면모를 뽐내고 있었다. 그 양옆의 훤칠한 조교님들의 모습마저도 내가 떠나왔던 학부(학과명이 어쨌든 의전원 준비반이라 읽는다.)와 전혀 다른 생활을 예고하는 듯 했다. 학업은 고되었지만 우리 모두 이상향을 위해 몰두해 있었다. 밤을 새며 ‘작품'(학부때 만드는 건축 프로젝트는 건축이 아니다.)을 만들던 스튜디오에는 낭만이 맴돌고 있었고, 돈을 좇는 무지막지한 아파트, 상업 건축물을 뒤로 하고 부서져가는 낡은 뒷골목, 구 도심지의 매력과 도시의 맥락을 어떻게 하면 미개한 일반 대중들에게 일깨워 줄까를 토론했다. 강력한 도시계획 없이 주민들에 의해 자생적으로 만들어진 시가지는 몰개성한 계획 도시에 비해 독특함과 복잡성을 가진다. 쪽방촌의 주민들이 재개발로 인해 쫓겨나고, 도시의 맥락이 지워지는 것에 반대해 골목과 역사성에 부합하고 사업성 없는 도시재생 계획안들을 여럿 연구했다. 그렇게 5년의 세월을 보내고, 또다른 학교와도 같은 설계사무소에 진입했다. 이곳은 땅의 맥락을 읽고, 종교시설에 설계안을 기부하는 따뜻한 건축가의 사무실이다. 거장의 간판 아래에서 우리는 사업성이나 공사비를 신경쓰지 않고 도시의 맥락과 건축물의 신성함을 논하며 설계안을 만들어냈고, 쩨쩨하게 공사비 한두 푼에 목매는 가난한 건축주에게는 차갑게 시선을 돌리곤 했다. 훌륭한 건축적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직원들은 당연하게 야근이나 철야를 감수하며 일을 계속했고, 혹사된 육체에는 근육통이나 디스크가 발병하기 일쑤였다. 공간감을 탐구하기 위해서는 매주 커다란 스티로폼 덩어리를 깎아내 수십 개의 스터디용 모형을 만들고, 그것들은 아무 미련없이 버려졌다. 이렇게 고된 과정을 겪고 완성된 건축물은 문틀, 석재 패턴 하나하나까지 매섭게 감리하였기에 당연히 최근에 문제되는 철근 누락이나 시공사의 자의적인 변경은 허락되지 않는다. 고고하게 지어 올린 건축물은 유명한 회사의 사옥이 되거나 위대한 사장님들의 고즈넉한 저택이 되었다. ...쓰다보니 지치는군요. 메타버스 근처까지도 가지 못하겠습니다.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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