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22/08/07 02:30:10수정됨
Name   아침커피
Link #1   https://crmn.tistory.com/150
Link #2   https://youtu.be/PVvgPrHEqCA
Subject   캘리포니아 2022 - 9.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캘리포니아 2022 - 9.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https://youtu.be/PVvgPrHEqCA

대학생 때 한 달 넘게 일본 배낭여행을 간 적이 있었다. 하루에 한국 돈 약 4만원 정도로 숙박비와 식비를 포함한 여행비를 충당하던 빠듯한 여행이었다. 여행 중 오키나와에서 우민추(海人, 바닷사람이라는 뜻의 오키나와어)라고 적혀있는 티셔츠를 보았었는데 맘에 쏙 들었지만 한국 돈으로 약 2만원 정도 되던 금액이 당시에는 부담이 되어 몇 날 며칠을 고민하다 오키나와를 떠날 때까지 결국 사지 못했다. 웃기게도 그렇게 돈을 아껴서 그랬는지 여행 후반에는 돈이 남았었다. 그 티셔츠를 몇 장은 충분히 살 수 있을 정도로.

비록 티셔츠는 못 샀지만 그 경험 덕에 깨달은 것이 있다. 살까 말까 고민되면 일상에서는 사지 말아야 하지만 여행중에는 사야 하고, 할까 말까 고민되면 일상에서는 하지 말아야 하지만 여행중에는 해야 한다. 일상에서는 다음, 다다음 기회가 있지만 여행중에는 기회가 한 번씩 밖에 없기 때문이다. 설령 나중에 후회하더라도 여행 중에는 하고 나서 후회하는 것이 하지 않고 아쉬워하는 것 보다 낫다.

캘리포니아 1번 주도(州道)에서의 운전이 7시간을 넘어 8시간 째로 접어들던 때였다. 해는 뉘엿뉘엿 져 가고 도로에는 산그림자가 깔리기 시작했다. 이제는 밤이 되기 전에 빨리 산타 바바라에 도착해서 숙소에 짐을 풀어야 했다. 1번 주도를 달리며 태평양을 보겠다는 목표는 이미 충분히 달성한 후였다. 1번 주도가 아직 남아있기는 했지만 남은 부분은 바닷가가 아니라 내륙의 외진 마을들을 거쳐가는 길이었다. 내비게이션은 빙빙 돌아가는 1번 주도 대신 가까운 길을 알려주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1번 주도를 더 달려보고 싶었다. 특별히 그래야 할 이유는 없었다. 반대로 그러지 말아야 할 이유는 많았다. 11년만에 운전대를 잡은 것이어서 아직 밤 운전은 위험했고, 남아있는 1번 주도는 딱히 특별할 것이 없는 평범한 도로일 것 같아 보였으며, 내일의 일정을 생각하면 조금이라도 빨리 숙소에 도착해서 쉬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하지만 결국 고민 끝에 잠시 차를 멈추고 일부러 강제로 1번 주도를 달리도록 네비게이션을 재설정했다. 이유는 단 하나였다. 그러고 싶어서. 숙소에 좀 늦게 도착하면 어떻고 다음날 좀 피곤하면 어때. 여행중에 할까 말까 고민될 때에는 모름지기 해야 한다.

캘리포니아 1번 주도는 태평양 해안 도로 (Pacific Coast Highway, PCH), 카브릴로 도로 (Cabrillo Highway), 쇼어라인 도로 (Shoreline Highway), 해안 도로 (Coast Highway) 등의 구간으로 나뉘는데 보통 여행 책자에서 소개하는 캘리포니아 1번 주도는 태평양 해안 도로 구간이다. 강한 바람, 깎아지른 절벽, 태평양이 만들어내는 육중한 파도와 굉음이 계속해서 이어지는 길로, 내가 그 날 오전부터 줄기차게 달려왔던 바로 그 길이었다. 이제 태평양 해안 도로는 끝이 났고, 내가 네비게이션의 충고를 무시하고 더 가기로 한 캘리포니아 1번 주도는 카브릴로 도로 (Cabrillo Highway) 구간이었다.

별 기대 없이 들어선 카브릴로 도로는 조용한 시골길, 정지용 시인의 시 '향수'의 표현을 빌자면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그런 곳이었다. 하지만 그래서 좋았다. 특별히 멋지거나 화려한 경치는 없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마음이 편안해졌다. 사람도 차도 거의 없는 시골길을 운전하며 카브릴로 도로의 한적함을 충분히 누리고 또 누렸다. 낮 내내 태평양 해안 도로를 달리며 바람과 절벽과 파도와 바다 때문에 흥분되었던 마음이 시골길을 천천히 달리는 동안 기분 좋게 차분해졌다.

소설은 발단, 전개, 위기, 절정을 거쳐 결말이 나야 하고 한시(漢詩)는 기, 승, 전을 지나 결까지 가야 한다. 독자를 흥분시키고 긴장하게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마지막에 가서 독자의 긴장을 풀어주고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는 것 역시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카브릴로 도로는 캘리포니아 1번 주도를 달리는 사람이라면 꼭 가 보아야 하는 곳이다. 태평양 해안 도로가 1번 주도의 절정이라면 카브릴로 도로는 잔잔한 마무리다. '향수'의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다는 표현이 참 잘 어울리는 곳, 그래서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히겠냐는 그 다음 표현 역시 참 잘 어울리는 곳이 바로 카브릴로 도로다.

카브릴로 도로는 롬폭(Lompoc)이라는 마을을 지나면서 끝이 났고 그 즈음부터 산타 바바라까지는 미국 101번 국도가 캘리포니아 1번 주도를 대체하면서 1번 주도가 잠시 끊어져 있었다. 해는 진작에 다 져서 깜깜한 밤이었고 아침에 운전을 시작한 지 10시간이 지나서야 산타 바바라의 숙소에 들어설 수 있었다. 체크인을 하면서 직원과 이야기를 하다가 오늘 아침에 몬터레이에서 출발해서 온 거라고 했더니 직원이 말했다. "와우, 롱 트립."

101번 국도 때문에 끊어진 캘리포니아 1번 주도는 산타 바바라 이후에 다시 나타나서 LA로 향하게 된다. 원하면 다음 날 1번 주도를 더 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카브릴로 도로가 내 캘리포니아 1번 주도 여행을 잘 마무리해 주었기에 더 이상 미련은 없었다. 내일 LA로 갈 때에는 고속도로를 타야지. 노곤한 몸으로 기분좋게 잠에 들었다.

---

캘리포니아 2022 여행기 이전 글 목록

1. 과거라는 외국 ( https://kongcha.net/recommended/1202 )
2. 나는 태평양을 볼 거야 ( https://kongcha.net/free/12827 )
3. 오늘 본 제일 멋진 풍경이 너였어 ( https://kongcha.net/free/12843 )
4. 나는 태평양 해안 도로에서 살아남았다 ( https://kongcha.net/free/12854 )
5. 뮤어 우즈, 직접 가 보아야 하는 곳 ( https://kongcha.net/free/12893 )
6. 맥주 마시던 어린이 ( https://kongcha.net/free/12907 )
7. 내 소리는 다음 사람에게 닿을 것 ( https://kongcha.net/free/12915 )
8. 인생은 운전 ( https://kongcha.net/free/12968 )



6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공지 티타임 게시판 이용 규정 2 Toby 15/06/19 31949 7
    15155 일상/생각청춘을 주제로 한 중고생들의 창작 안무 뮤비를 촬영했습니다. 2 메존일각 24/12/24 335 5
    15154 문화/예술한국-민족-문화의 정체성에 대한 소고 meson 24/12/24 278 2
    15152 정치이재명이 할 수 있을까요? 72 제그리드 24/12/23 1560 0
    15151 도서/문학24년도 새로 본 만화책 모음 6 kaestro 24/12/23 350 5
    15150 게임최근 해본 스팀 게임들 플레이 후기 1 손금불산입 24/12/23 279 5
    15149 사회그래서 통상임금 판결이 대체 뭔데? 7 당근매니아 24/12/23 599 11
    15148 정치윤석열이 극우 유튜버에 빠졌다? 8 토비 24/12/23 824 9
    15147 정치전농에 트랙터 빌려줘본 썰푼다.txt 11 매뉴물있뉴 24/12/22 1068 3
    15146 의료/건강일종의? 의료사기당해서 올려요 22 + 블리츠 24/12/21 971 0
    15145 정치떡상중인 이재명 56 매뉴물있뉴 24/12/21 1846 15
    15144 일상/생각떠나기전에 생각했던 것들-2 셀레네 24/12/19 575 9
    15142 일상/생각플라이트 시뮬레이터로 열심히 걸어다니고 있습니다~~ 7 큐리스 24/12/19 507 2
    15140 정치이재명은 최선도, 차선도 아니고 차악인듯한데 43 매뉴물있뉴 24/12/19 1849 7
    15139 정치야생의 코모도 랩틸리언이 나타났다! 호미밭의파스꾼 24/12/19 383 4
    15138 스포츠[MLB] 코디 벨린저 양키스행 김치찌개 24/12/19 135 0
    15137 정치천공선생님 꿀팁 강좌 - AI로 자막 따옴 28 매뉴물있뉴 24/12/18 747 1
    15135 일상/생각생존신고입니다. 9 The xian 24/12/18 613 31
    15134 일상/생각산타 할아버지는 알고 계신데.. 5 Picard 24/12/18 440 7
    15133 도서/문학소설 읽기의 체험 - 오르한 파묵의 <소설과 소설가>를 중심으로 1 yanaros 24/12/18 300 4
    15132 정치역사는 반복되나 봅니다. 22 제그리드 24/12/18 759 2
    15131 여행[2024 나의 이탈리아 여행기] 0. 준비 7 Omnic 24/12/17 368 7
    15130 정치비논리적 일침 문화 7 명동의밤 24/12/16 878 7
    15129 일상/생각마사지의 힘은 대단하네요 8 큐리스 24/12/16 791 7
    15128 오프모임내란 수괴가 만든 오프모임(2) 50 삼유인생 24/12/14 1884 5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