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22/08/05 23:17:26수정됨
Name   당근매니아
Subject   이준석의 건투를 바라지 않는 이유
정치인은 도구입니다.

대의민주주의 체제 내에서 정치인은 스스로를 타인의 도구화하는 인간이며, 유권자의 총의를 대변하기에 다른 자연인들과 구분됩니다.  때문에 정치인에 대한 표현의 자유는 일반인에 비해 폭넓게 인정되며, 사생활 역시 언론과 대중에 의해 일정부분 감시됩니다.

전 스스로를 아이콘화하는 능력을 갖춘 정치인을 선호합니다.  국내에서든 해외에서든 스스로를 상징화하고, 자신의 트레이드마크를 형성하며, 특정한 이름을 특정한 정책과 연관지을 수 있도록 하는 정치인이야말로 의미있는 활동을 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정치적 방향성이야 다를 수 있겠지요.

김대중과 보편적 민주주의, 노무현과 지역주의 타파, 만델라와 반 아파르트헤이트, AOC와 MMT가 연결지어 떠오르는 것처럼, 마거릿 대처와 신자유주의, 아베 신조와 무제한적 양적완화, 박정희와 국가주도 경제정책 같은 사례들도 예가 될 수 있겠네요.  반대로 부정적인 단어들이 같이 연상되는 정치인들도 존재합니다.  예컨대 트럼프의 자국 우선주의나... 뭐 이런 논의의 치트키인 히틀러 씨가 있겠습니다.

어찌되었건 정치인이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아나가는 데에는 본인의 노력도 물론 중요한 요소겠으나, 그보다는 평생에 걸쳐 만들어온 자신의 세계관이 시대정신에 올라탈 수 있는지가 더욱 중요한 요소가 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예컨대 버니 샌더스는 일평생 정치인으로 살아오면서 사민주의를 외쳐왔지만, 2008년 대침체가 오지 않았다면 민주당 유력 대선후보까지 올라가기는 어려웠을 겁니다.

잡설이 길었지만 결국 특정한 정치인이 국가원수급까지 도약하고 성공적인 국가운영을 해내기 위해서는, 그간 충실히 쌓아온 자신의 정책적 견해가 알맞는 시대를 만나야 한다는 게 제 사견입니다.  그 전제조건은 '자신의 정책적 아이콘'을 만들어왔는가 하는 것이고, 그러한 정책을 펼치기 위한 충분한 내적 검토를 거쳤는가 하는 겁니다.

그러한 정책적 견해 없이 행정부 수반에 등극했다가 참극을 불러온 비근한 예로 박근혜와 윤석열을 들고 싶습니다.  박근혜의 정치적 행보 중 어디까지가 본인의 결정에 의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어찌되었건 박근혜는 '선거의 여왕'이라는 정체불명의 칭호 이외의 정치적 경향성이랄 것을 보여준 적이 없습니다.  그 결과 18대 대선의 박근혜 후보 공보물을 보면, 이게 새누리당 후보의 공보물이 맞나 싶을 정도로 복지정책을 강조하는 내용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물론 당선 이후에 실제로 추진된 내용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었죠.

윤석열은 비록 취임 3개월도 되지 않았으나, 대외/대내 정치에서 계속적으로 메시지를 번복하고 정책을 풀었다가 다시 거둬들이는 아마추어적인 실수를 연발하고 있습니다.  특히나 금번 펠로시 하원 의장 방한 건에서는 '친미 외교'라는 방향성마저 제대로 관철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공항 의전 같은건 하다못해 제3세계 독재정권에서도 할 줄 아는 수준의 대응인데도 말이죠.

이준석에 관한 이야기들을 볼 때, 전 이준석이 내세울 수 있는 정치적 아이콘이 무엇인지 문득 궁금해집니다.  정치입문 직후에는 자신의 학력과 자원봉사 경력을 내세웠었고, 이후 한참 동안은 각종 방송에서 그때그때 터져나오는 현안에 관한 검투사 역할을 자처했으며, 당대표로 취임한 이후에는 시스템 공천이나 후보자 자격심사 등 당내이슈에 주력했습니다.  이준석이라는 정치인이 전국 단위로 적용될 만한 정책안을 내민 것이 뭐가 있었는지 전 잘 모르겠습니다.

혹시나 하여 과거 국회의원 선거공보 3부를 받아 살펴봤습니다.  세 차례 선거의 공보물의 내용을 간략히 정리하자면 아래와 같습니다.


2016. 4. 13. 20대 총선(새누리당)
-. 소외되고 낙후한 상계동을 발전시키겠다
-. 보수의 가치에 공감하여 새누리당 입당했다
-. 박근혜에게도 할말은 했다
-. 2015년도 다보스포럼에서 선정한 영 글로벌 리더 선정됐다
-. 교육정책 : 자원봉사자를 통한 기초학력 증진, 자유학기제 재검토, 학교 앞 신호/과속 설치의무화, 학생들과의 대화
-. 교통정책 : 상계동에 4/7호선 급행지하철 도입, 경전철 마들역 연장, 수락산 2호 터널 조기 검토
-. 기타 상계동 지역별 현안 및 창동차량기지 부지 활용방안 확정

2018. 6. 13. 20대 국회의원 재보궐(바른미래당)
-. 학교 운동장 지하주차장 건설
-. 4/7호선 급행지하철 도입
-. 창동차량기지 부지 활용방안 확정(서울시 산하 공기업, 명문대 제2캠퍼스, 버스터미널 중 유치)

2020. 4. 15. 21대 총선(미래통합당)
-. 4/7호선 급행지하철 도입, 경전철 마들역 연장
-. 학교/공원 지하주차장 건설
-. 창동차량기지 부지 활용방안 확정(북부권 터미널+사립대학교 제2캠퍼스+복합쇼핑몰+서울시 산하 공기업 통합사옥 유치)
-. 전국정책 : 부가세 간이과세 기준 1억원 상향, 기초학력 미달 학생 책임교육제 도입, 국공립대 수시입시 폐지, 공매도 제도 개선
-. 기타 상계동 지역별 현안(경전철 마들역 연장, 수락산 2호 터널 건설 등)


물론 지역구 국회의원 선거의 특성상 선거공보물에는 지역현안에 관한 내용이 주로 포함되기 마련이겠으나, 전국 단위 정책을 내세운 선거는 21대 총선 한 건뿐입니다.  21대 총선에서 전국 단위 정책으로 내세운 사안들 역시, 자신의 과거 경력과 연관된 책임교육제 이외에는 중앙 정치에서 현안으로 제시되었던 내용을 변주한 것에 불과합니다.  이외에는..... 철덕 성향이 지역 정책에 충실히 반영되고 있다는 걸 특이사항으로 들 수 있을까요.

나무위키의 '이준석/사상 및 견해' 문서를 참고해보면, 가장 기본적인 스탠스는 공정한 경쟁, 적극적 자유민주주의 옹호, 작은 정부론 정도로 보입니다.  해당 항목에서 가장 자세히 기재되어있는 '당 운영 관련' 항목은 당내 공천이나 인사에 있어서의 경쟁 추구 성향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여기에 더하여 극단주의나 음모론에 대한 적극적 배척과 안티 페미니즘 성향이 이야기될 수 있겠으나, 이는 특정한 이념이나 행위에 반대하는 수준에 머무르는바 가치를 가진 정책적 창조로 보긴 어렵다고 봅니다.

상기한 내용들을 살펴봤을 때, 이준석이라는 정치인에서 정치공학적 이슈들을 제외한다면 제가 봤을 때 남는 건 '공정한 경쟁 추구'라는 방향성 이외에 뭐가 남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러한 흐름은 대개 능력주의 내지 실적주의에 입각한 엘리티즘으로 발전되는데, 결과적으로 연대의식의 부재, 소수자 배척, 불평등의 정당화 등으로 귀결될 우려가 있다는 건 이미 논의가 끝난 사안들이죠.

그런 측면에서 N포 세대를 자처하면서도 이준석을 지지하는 인원들은 제게 상당한 흥미를 가지게 합니다.  그리고 대학교 시절의 한 가지 일화를 떠올리게 되더군요.  제가 나온 대학은 자유로운 복수전공 선택을 강점으로 내세우고 있었는데, 경영/경제학과에 대한 선호도가 지나치게 높아지자 학교에서 이를 일부 제한하기로 결정했습니다.  1학년 학점이 상위 50% 이상인 인원에 한하여 경영/경제학 복전을 허용한다는 내용이었죠.  학교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한창 활동하던 즈음이었고, 대학 이름이 인생 최대 업적인 훌리건들은 입결이 박살날 거라며 난리를 피웠습니다.  그때 현자 한분이 나타서 댓글로 가로되, '학교에 입학하면서 자신이 하위 50%에 들어갈 거라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고 하셨고, 평정되었죠.  뭐 비슷한 심리적 기작이 돌아가고 있는 것 아니겠나 하는 생각을 대충합니다.

결과적으로 전 이준석이 지금 윤석열과 치고받고 있다고 하여 노무현 운운하는 글들을 혐오합니다.  노무현이 삼당합당에 반대하며 뛰쳐나간 건, 독재세력과의 협력을 거부하고 고착적인 지역주의를 타파하기 위함이라는 대전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준석은 윤석열, 윤핵관들과 겨루면서 어떤 대의를 내세울 수 있습니까.  현재 국힘의 주류 의원들과 어떤 정책적 차별점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게 없다면 작금의 다툼은 그냥 권력을 두고 다투는 정치공학적 분쟁에 지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 맥락에서 전 지난 민주당 경선 후보였던 이재명과 이낙연 역시 그다지 지지하지 않습니다.  이재명은 당선을 위해 자신이 가진 정책적 선명성을 거침없이 집어던졌고, 그 결과 최종적인 부동산 정책안 등을 보면 기실 윤석열의 것과 다를바가 그다지 없는 수준에 다다랐습니다.  이낙연은 애초에 선명한 정견을 보여준 이력 자체가 별로 없었고 말이죠.

길었습니다만, 이것이 이준석의 건투를 별로 바라지 않는 이유입니다.



17
  • 개안하는 기분이 드는 글입니다.
  • 잘 읽었습니다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13082 영화헤어질 결심 - 기술적으로 훌륭하나, 감정적으로 설득되지 않는다. 4 당근매니아 22/08/14 3631 4
13081 일상/생각왼쪽 ,,, 어깨가 너무 아픈데 ,,, 14 네임드 22/08/13 2496 0
13080 일상/생각서부간선 지하도로는 왜 뚫었을까요 13 copin 22/08/13 3303 0
13079 일상/생각물 속에서 음악듣기 16 *alchemist* 22/08/12 2683 8
13077 스포츠오타니, 104년만에 베이브루스에 이어서 두번째로 10 승 + 10 홈런을 달성 14 Leeka 22/08/10 3688 2
13075 도서/문학현대물리학이 발견한 창조주 ㅎㅎㅎ 2 큐리스 22/08/10 3309 1
13074 정치회사 이야기 쓰다가 윤통을 거쳐 이준석으로 끝난 글 7 Picard 22/08/10 3342 4
13073 일상/생각(치과) 신경치료는 이름부터 바꿔야 하지 않을까요? 17 OneV 22/08/10 4038 3
13072 게임롤 이스포츠매니저 SSR 선수 총 정리 Leeka 22/08/09 2941 1
13071 기타자동차용 손뜨개 방석을 판매합니다. 10 메존일각 22/08/09 3586 2
13070 기타위즈덤 칼리지 3강 Review 모임 안내 1 Mariage Frères 22/08/09 2635 4
13069 IT/컴퓨터가끔 홍차넷을 버벅이게 하는 DoS(서비스 거부 공격) 이야기 36 T.Robin 22/08/08 4110 24
13068 IT/컴퓨터AI님 감사합니다~~ 3 큐리스 22/08/08 2919 0
13067 일상/생각한자의 필요성을 이제서야 느끼고 있습니다. 23 큐리스 22/08/08 3587 2
13066 육아/가정식단 편성과 재고 관리 7 arch 22/08/08 2827 1
13065 사회장애학 시리즈 (2) - 시각장애인 여성은 타인의 시선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돌려주는가? 5 소요 22/08/07 3056 15
13064 여행캘리포니아 2022 - 9.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2 아침커피 22/08/07 3182 6
13063 일상/생각우영우 12화 이모저모 (당연히 스포) 34 알료사 22/08/06 5215 18
13062 경제멀리 가버리는 유럽의 전력가격 5 Folcwine 22/08/06 3034 0
13061 음악[팝송] 라우브 새 앨범 "All 4 Nothing" 김치찌개 22/08/06 2686 1
13060 정치이준석의 건투를 바라지 않는 이유 55 당근매니아 22/08/05 5341 17
13058 일상/생각출근하기 전 가족들이 자는 모습을 보면 행복감이 느껴집니다. 13 큐리스 22/08/05 3147 20
13057 일상/생각에바종 먹튀로 피해본 썰.. 11 비형 22/08/05 3590 29
13056 게임[LOL] 이스포츠 매니저 SSR 선수 총 정리 - #1 TOP 2 Leeka 22/08/05 2515 1
13054 오프모임8/5 금요일 망리단길(망원역) 모임 12 인생은자전거 22/08/05 3112 2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