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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2/07/09 20:29:28
Name   알료사
File #1   은총의일격.png (334.6 KB), Download : 16
Subject   은총의 일격






여자들은 어째서 자신의 짝이 아닌 남자에게 빠지는 걸까. 어째서 남자로 하여금 스스로를 부정하든지 아니면 여자를 혐오하도록 선택을 강요하는 걸까. 나는 소피에 대해 잘못 생각하도록 운명지어져 있었다. 부드러우면서도 거친 목소리와 짧게 깎은 머리, 늘 진흙이 묻어 있는 투박한 구두 같은 것들은 내가 그를 남자 형제들처럼 여기게 만들었다. 편안한 우애의 감정. 어느 순간부터 우리의 게임을 이끌어간 것은 그녀였다. 그녀는 자신의 인생을 걸었기 때문에 더욱 치열했다. 게다가 다른 일이 많아 신경이 분산되었던 나와는 달리 그녀는 오로지 나에게 집중했다. 그녀는 내가 배고플 일이 없게 하려고 하녀의 부엌일과 가축 돌보는 일을 거들었다. 이따금 애인을 만들기도 했지만 나를 자극하기 위해서였다. 어쨌든 나로서는 질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나의 패배가 그녀의 기쁨을 향해 가지는 않았지만. 나는 온몸을 던져 나를 향해 달려오는 무게 앞에 무기력했고 저항할 힘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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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정도 사색적인 남자들은 대부분 자기경멸과 자기애에 익숙하지만 나는 그렇지 못했다. 소피의 사랑을 알게 된 것만으로도 어찌나 놀랐는지 마치 부정한 사건에 휘말린듯한 느낌이었다. 나에게 예기치 못한 것은 곧 위험을 의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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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소피의 사랑이 보기만큼 어처구니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토록 많은 불행을 겪은 그녀가 어린 시절부터 알던 같은 계층의 남자를 드디어 만난 것이다. 게다가 열두 살에서 열여덟살 사이에 읽은 모든 소설이 그녀에게 오누이처럼 지내며 쌓은 우정은 여자에게 늘 사랑으로 귀결된다고 가르쳐 주었다. 그녀의 모호한 본능적 계산은 옳았다. 예측 불가능한 특수상황을 고려하지 않았다고 비난할수는 없다. 카드를 모두 손에 쥐고 있으면서 게임을 그만둘 수는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오직 내 차례를 그냥 지나 보내는 것이었지만 그 역시 게임의 방식이었다. 이내 소피와 나 사이에는 형을 집행하는 자와 당하는 자 사이 같은 친밀감이 형성되었다. 잔인함은 나에게서 비롯된게 아니라 당시의 상황이 담당했다. 그에 대해 내가 쾌감을 느끼지 않았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소피는 사랑에 빠진 여자가 그 마음을 이해받지 못해서 미친듯이 화가 날 때 겪는 온갖 끔찍한 고통을 치러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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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전부를 드러내어 고백했다고 믿었겠지만 나에게는 암시로 가득한 고상한 것이었다.

"여기 참 편하고 좋네요" 우리가 영지 내의 오두막에 앉았을 때 그러니까 연인들이나 쓸 법한 술책을 총동원해서 얻어낸 짧은 순간 중 하나에 마침내 단둘이 있게 되었을 때 그녀가 말했다. 그리고 시골 여자들이 피우는 짧은 파이프를 툭툭 두드리며 재를 털었다. "그래요. 편하고 좋네요" 내 삶에 새로운 음악적 테마가 삽입되기라도 한 듯, 다정함에 취한 내가 똑같이 말했다. "당신은 날 믿나요? 당신을 사랑하게 됐다고 지금 당장 말하고 싶지만.. 당신이 원할 때.. 무슨 뜻인지 알겠죠? 혹시 진지한 게 아니라면.. " "당신과는 항상 진지해요" "아뇨, 당신은 날 믿지 않아요" 그녀가 뾰로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젖히는 모습이 달콤했다. "그렇다고 내가 아무에게나 다 잘해준다고 생각하진 마요" 그때 우리는 둘 다 너무 젊었기에 솔직하지 못했다. 소피는 당혹스러울 정도로 곧은 면이 있었고 그래서 실수의 확률이 컸다. 우회하지 않고 달려드는 저 존재와 나 사이에는 송진 냄새 나는 전나무 탁자가 놓여 있었다. 낡은 작전 지도에 잉크로 점선을 긋던 내 손에 점점 힘이 빠졌다. 내가 공모자가 되어 주길 바라고 있다는 일말의 의혹조차 피하려는 듯 그녀는 제일 낡은 원피스와 화장기 없는 얼굴을 택했고 나무의자 두 개가 있는 곳, 바로 옆 마당에서 장작을 패고 있는 장소를 택했다. 그녀는 자신이 정숙함을 던져버렸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세상 모든 어머니를 기쁘게 할 만한 순진함이었다. 게다가 능숙함이라는 면에서 볼 때 그런 천진함은 가장 교묘한 술수를 능가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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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내가 소피를 사랑했다면 그녀가 가한 그런 단순한 공격, 즉 '바로 찌르기'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핑계를 대며 뒤로 물러섰고 처음으로 진실에서 비열한 맛을 발견했다. 진실이 비열한 것은 내가 소피에게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바로 진실 탓이기 때문이다. 그 이후에 아마도 지혜롭게 소피를 피했어야 했겠지만 포위되다시피 갇힌 우리가 서로를 피한다는 일은 쉽지 않았다. 나는 그녀가 건네는 술에 취할 생각이 전혀 없으면서도 그것을 마시지 않고는 살 수가 없었다. 자기 자신에게 관대한 이런 만족감이 지탄받아 마땅한 것임을 나도 인정한다. 소피의 사랑은 내 인생관이 정말로 정당한지 처음으로 의혹을 품게 만들었고 그럼에도 그녀가 자신을 완전하게 내어줄수록 나의 남자로서의 체면, 허영심은 더욱 견고해졌다. 이 희극적인 면은 소피가 나를 사랑하게 된 것이 바로 나의 냉정함과 거절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녀는 단숨에 곡예사나 순교자 같은 아름다움의 경지에 이르렀다. 희망도 조심성도 질문도 없이 좁은 사랑의 공연대 꼭대기까지 올라가버렸고, 분명 오래 버티지 못할 터였다. 나는 무엇보다 그 용기에 쉽게 감동받았다. 그녀는 우리의 합의 조건을 어기는 것은 죄라고 자책했을 테지만 그녀의 내면에서 모든 것이 욕망을 외쳤고 그것은 아직은 육체보다 정신이 훨씬 더 많이 얽힌 욕망이었다. 시간이 늘어졌고 대화는 따분해지거나 아니면 말다툼으로 이어졌다. 소피는 온갖 핑계를 내세워 내 방에 머물렀다. 나와 단둘이 있으면서 우리의 펜싱 경기는 지치도록 이어졌다. 불기운이 시원찮은 냄새나는 난로 때문에 춥고 숨막히는 방은 젊은 남자와 젊은 여자가 새벽까지 계속 방어 자세로 버티면서 상대에게 빨리 공격해오라고 부추기는 경기장으로 변했다. 그녀는 너무 젊었기에 인생이 갑작스러운 충동과 버티기가 아니라 타협과 망각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소피는 이내 자신을 바치는 것이 의지에서 비롯된 열정적 행위인 시기를 벗어났고 살기 위해 숨쉬는 것만큼이나 자기 자신을 바치는 것이 자연스러운 상태에 이르렀다. 나는 무례하게 굴다가 다정하게 굴다가 했는데, 어느 쪽이든 목적은 똑같아서, 그녀가 날 더 많이 사랑하고 더 많이 고통받게 하려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욕망 때문에 타락한다면, 그녀 앞에서 나는 허영심 때문에 타락했다. 늘 경계 태세로 부대꼈던 우리는 지속적인 찰과상 탓에 살갗이 벗겨지고 단단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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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저녁에 소피가 우리를 위해 비쩍 마른 닭 몇 마리를 잡아들고는 목을 따고 털을 벗기던 모습이 기억난다. 나는 잔혹함이 조금도 섞이지 않은 그런 단호한 얼굴을 그때 처음 보았다. 나는 그녀의 머리카락에 붙은 닭털을 입으로 불어 날려주었다. 그녀의 손에서 흐릿한 피냄새가 났다. 일을 마친 그녀는 무거운 겨울 장화를 끌며 기진맥진해서 들어왔고 젖은 외투를 아무데나 벗어던졌다. 그리고 정작 자기는 하나도 먹지 않고 상한 밀가루로 만든 끔찍하리만치 맛없던 크레이프만 꾸역꾸역 삼켰다. 이런 식단이 이어지면서 그녀는 점점 여위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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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미소만으로도 나는 그 모든 것이 나를 위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나를 고통스럽게 만들 수 있는 기회를 번번이 놓치는 것을 보면 그녀는 분명 착한 여자였다. 여자들이 결코 용서하지 못하는 실패와 싸우면서도 그녀는 강직한 사람이 절망에 빠졌을 때와 똑같이 행동했다. 즉, 자기 자신에 대해 최악의 설명을 찾아내어 자책하기만을 반복했던 것이다. 나는 그녀가 한 번쯤 화를 내기를, 내가 들어 마땅한 힐책을 내뱉기를, 신성모독에 해당할 그 어떤 행동이라도 하기를 애타게 바라며 살폈다. 하지만 그녀는 내가 그녀의 어처구니없는 사랑에 요구한 수위를 단 한 번도 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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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내가 영지의 정원을 순찰하는 동안 따라다녔다. 그녀로서는 지옥 영벌에 처해진 이들이 함께하는 산책과 다름없었을 것이다. 우리의 목덜미를 따라 흘러내리는 차가운 비, 내 머리카락과 똑같이 젖어 달라붙은 그녀의 머리카락, 손바닥으로 입을 가리고 하던 기침, 황량한 호수가에서 괜스레 갈대를 휘감아 비틀던 그녀의 손가락, 도중에 그녀는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나무에 기대어 섰고 나는 그녀가 한 십오 분 정도 사랑 얘기를 하는 것을 듣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는 끊임없이 경이로운 희망이 어른거렸고 그것을 보며 나는 짜증이 났다. 그녀의 내면에는 여자들이 마지막 순교의 순간까지 지켜내는 믿음, 받아내야 할 것이 있다는 확신이 버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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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내가 되려다 만 여자 같은 소피는 비극의 여주인공들이 걸었던 먼지 풀풀한 대로를 그대로 따라갔다. 잊기 위해 마음을 다른 곳으로 돌린 것이다. 그녀는 다른 남자들과 수다를 떨었고 웃어젖혔고 미친듯이 춤을 추었다. 그리고 언제 총알이 날아들지 모르는 위험한 지역을 거침없이 오갔는데 함께 나간 남자들은 그 기회를 이전의 나보다 훨씬 잘 이용할 줄 알았다. 첫 수혜자는 프란츠였다. 그는 소피가 나에게 바치는 사랑과 거의 비슷하게 맹목적인 사랑을 소피에게 바쳤다. 그는 차선으로 주어진 대역의 자리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로서는 감히 넘보기도 황송했을 높은 자리였던 것이다. 소피는 분명 그에게 우리의 사랑에 대해 계속 얘기함으로써 복수했을 거고 또 나에게도 자기 자신에게도 복수하려 했을 것이다. 소피가 거만하고 짜증스럽게 아주 사소한 친절만 베풀어도 프란츠가 마치 설탕을 받아먹는 강아지처럼 달려들던 모습을 떠올리면 아직도 연민이 느껴진다. 그 착한 청년은 몇 주 후 볼셰비키의 포로가 되었다. 처형된 채 발견된 그의 시체는 양초 심지를 천천히 태우는 고문 흔적으로 목둘레가 검게 그을려 있었다. 나는 최대한 완곡한 표현을 사용해 소피에게 그 소식을 전했다. 그 참혹한 광경이 그녀에게 별다른 고통을 주지 않고 그저 이제까지 겪어온 수많은 다른 광경에 더해지는 것을 지켜보면서 나는 불쾌하지 않았다..










마르크리트 유르스나르 / 은총의 일격


내맘대로 축약 발췌입니다.

사랑은 운명이고 운명은 잔인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선택의 아닌 일들을 우리가 선택한듯 말하고 행동하며 그 말과 행동들은 어떤 순간에는 희생적이고 숭고하지만 어떤 순간에는 사악 그 자체입니다. 얼핏 보기에 한쪽이 가해자이고 한쪽이 피해자인듯 보이지만 실상은 함께 같은 파도에 휩쓸려버린 동행인이었을 뿐입니다..  부디 상대를 용서하고 스스로를 용서할 수 있었기를..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한 호흡의 챕터를 읽으면서 <나>의 가학적 쾌락과 기만적인 죄책감에 빙의했다가 <소피>의 눈먼 열정에 빙의했다가 종국에는 <프란츠>를 애도하며 대충 페페표정으로 일렁이는 감정을 다스리고 있는 나새기를 발견하고 깜짝 놀라 아아 얼마만인가 소설에서 이정도의 심적지진을 맛본거시..  심심한듯 잔잔한듯 이렇게 조용히 거센 소용돌이를 일으키는 작가의 스타일에 감탄하며 탐라에 찍싸기로 소개하려다 너무 길어서 그냥 또 뻔뻔하게 티타임 자리를 차지합니다. 그립읍니다 탐라 글자수 1천자 시절..



소설은 이걸로 끝이 아니고 시작도 훨씬 전부터입니다. 화자에게는 말못할 사정이 있읍니다. 궁금하신 분들은 일독을 영업해 봅니읍..








혼자 웃기도 했소. 물론 웃을 수 있을 때에만. 혼란이 겨우 생리적 이유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하면 굴욕스럽소. 처음엔 그 때문에 수치스러웠는데 나중에는 마음이 편해졌소. 삶 역시 생리적인 비밀일 뿐이니까. 어째서 쾌락이 감각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난받아야 한단 말이오. 통증 또한 감각이지만 아무도 비난하지 않는데. 우리가 통증을 존중하는 것은 우리 의지대로 할 수 있는게 아니기 때문이오. 쾌락 또한 그렇소. 설사 그게 우리가 자유롭게 선택하는 것이라 해도 난 쾌락이 죄가 되지 않으리라 생각하오. 난 시인들이 자기 꿈만 알고 정확한 말을 피하는 것을 지지하지 않소. 시인의 꿈은 진실된 것이지만 그것이 삶 전체는 아니라오. 삶은 시 이상의 무엇이고 생리학 이상의, 심지어 도덕 이상의 무엇이오. 그것은 우리가 아무것도 손댈 수 없었던 과거 전체에 의해 결정되었고 현재의 아주 작은 것만으로도 미래 전체가 결정지어질 수 있소.
그것이 삶이오. 삶을 이루는 요소들은 분리될 수 없소. 우리가 자랑스러워하는 본능들과 우리가 드러내지 못하는 본능들은 결국 같은 곳에서 나왔소. 그중 하나를 바꾸면 다른 것도 함께 바뀔 수밖에 없지. 이 편지가 변명이 되기를 원하지 않소. 사람들이 날 지지해 주리라 바라지도 않소. 그저 이해받길 바랄 뿐이오. 결국은 같은 얘기고 지나친 기대임을 알고 있소. 하지만 당신은 작은 일들에서 나에게 많은 것을 베풀어 주었으니 이제 큰 일에서도 당신의 이해를 기다려 본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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