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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2/05/01 00:32:04
Name   Jargon
Subject   22/04/30 성북구 기행





새벽에 타임라인에서 간송미술관 예약이 시작됐다는 소식을 보고 사이트에 들어가봤더니 아침 10시와 3시가 아직 1자리씩 남아있어서 아침 10시로 골랐다. 전날 잠을 너무 많이 잤던 터라 잠이 오지 않았고, 겨우 3시간 남짓 자서 지쳐있는 몸을 이끌고 미술관으로 향했다. 최근에 아비투스를 읽고 있었기에 그에 대한 생각들이 머릿속에 오갔다. 내가 지금 미술관 같은 고급 문화를 향유하고자 하는 것은 상류층의 아비투스를 획득하고 싶어하는 욕망의 발현일까, 하는, 시덥잖은 생각들.

가보니 막상 별거 없는 규모의 전시였다. 천천히 돌았는데도 1층은 15분만에 관람이 끝났고, 2층에는 아무것도 전시되어 있지 않고 다만 벽 한켠에 걸린 TV가 간송미술관의 역사 따위를 담은 다큐를 틀어주고 있었으므로 아예 보지도 않고 다시 내려왔다. 교과서에서 봤던 엄청난 역사적 가치를 지닌 무언가!도 못 봤기에 살짝 실망했다. 무엇을 하지, 고민을 하던 찰나 도로변 펜스에 걸린 현수막이 눈에 띄었다. 오른쪽으로 300m를 가면 성북구립미술관이 있고, 왼쪽으로 150m를 가면 선잠박물관이 있다고 했다.
 






먼저 간 성북구립미술관에는 안내 데스크에 예쁜 직원분이 응대 업무를 맡고 계셨다. 눈에 반짝이를 뿌려놓는 화장이 인상 깊었다. 들어가자마자 예약을 하셨냐고 묻기에 잠시 당황했으나 곧 별 상관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되었고, 심지어 관람료도 무료라는 사실에 놀랐다. 미술관에선 윤중식이라는 현대 미술 작가의 10주기 추모전을 열고 있었다. 예술 쪽에는 지식이 전혀 없기에 심상만으로 그림들을 가만가만 바라보고 다녔다. 뒤로 갈수록 딱히 화풍에 달라지는 부분도 없고 자기복제의 반복처럼 느껴져 대충 훑어보게 되었다.
 





밖에 나와선 미술관으로 오면서 벼르던 일들을 몇 가지 행했다. 외진 길편에 작은 식물 바자회가 열리고 있기에 정말 잠깐 구경(혹시라도 붙들려 강매를 당하지 않을까 걱정했다. 하지만 둘러보는데도 딱히 판매자로써의 적극적 홍보 의지가 보이지 않았고 단지 소소한 커뮤니티 멤버로써 낯선 이방인을 대하는 의심의 눈초리만을 보였기에 이는 기우였던 것으로 생각된다.)했고, 뭔가 딱 봐도 유명할 것 같은 돼지 불백집이 있길래 가서 점심을 해결했다. 이것이 사실상 하루의 첫끼였다. 살짝 늦잠을 자서 대충 머리만 감고 두유를 빨아먹은 뒤 급하게 기숙사를 나섰기 때문이다. 감상은, 인플레이션이 심하긴 하다. 이런 것도 만원을 받는 시대라니, 라는 느낌. 맛에 불만은 없었다. 고기에선 인위적인 불향과 단맛이 났고, 반찬들은 적절한 짠맛으로 조응했다. 평범한 기사식당의 맛과 퀄리티. 밥을 먹고 난 뒤엔 선잠박물관으로 향했다.

주제가 그다지 인기를 끌지 못하는 국소적 분야라 그런 것인지 박물관에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1층은 선잠제의 유래를, 2층은 선잠제의 진행 순서를, 3층은 비단의 제조 과정을 다루고 있었다. 1층에서 2층을 가려는데 직원분이 나가는 소리로 착각했는지 안녕히 가라는 인사를 하기에 여기선 사람이 1층만 보고 나가는 것이 당연한 일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모르게 측은한 마음이 들고 힙스터 기질도 발동하여 3층까지 다 본 뒤 전시 내용에 관한 질문과 피드백을 간단하게 드렸다. 박물관을 나오며 뭐라도 된 것 같아하는 내 자신이 오만해보여 살짝 불쾌감을 느꼈다. 이미 이때부터 몸이 굉장히 고단해져 있는 상태였으나, 스케줄도 없고 오랜만에 나들이를 나온 터라 이 외출의 뽕을 뽑아야겠다는 생각에 부지런히 다음 장소를 물색하곤 발걸음을 옮겼다.

다음 행선지는 최순우라는 전 국립박물관장의 옛 집. 생각보다 훨씬 더 볼 게 없었다. 평범한 한옥 한 채가 있었다. 나름대로의 상상력을 발휘하면 이 사람은 이런 아기자기한 한옥에서 충만감 넘치는 일상을 보냈겠구나, 하는 재현적 경험은 해볼 수 있었으나, 그것마저도 공간의 협소함으로 인해 충분히 즐기지는 못했다. 여기서 어떤 작가의 사진전도 열리고 있다기에 기대했었는데, 그냥 방 한켠에 사진 5점 정도가 걸려있는 규모였다. 굉장히 김이 샜다.





이후 10분 정도 걸어 근처에 있는 성당으로 향했다. 종교가 있다거나 기도가 갑자기 하고 싶었다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오랜만에 밖을 나돌아다녀 비명을 지르고 있는 발을 쉬게 해줄 겸, 앉아서 다음 행선지를 천천히 정해볼 겸 성당의 문을 두드렸다. 쉬고싶다는 말을 어버버대며 어찌어찌 전달하니 흔쾌히 들어오라고 허락해주셨다. 뒤에서 4시에 진행될 미사 진행에 관한 얘기가 들려오는 가운데 나는 성당 의자에 앉아 네이버 지도를 키곤 한참동안 들여다보고 있었다. 국립옛돌박물관까지만 가고 버스를 타고 돌아와 대학로에서 연극을 본 뒤 여정을 끝마칠까, 아니면 과감하게 북악산 산길을 따라서 성균관대학교를 탐방하거나 경복궁 근처 박물관들을 들러볼까, 여러 가지 계획들을 세워보았다. 일단 옛돌박물관까지 가 본 뒤에 어디로 갈 지 정해보자고 생각했으나, 앞에서 말했던 대로 몸이 피로로 비명을 지르고 있었기 때문에, 북악산을 따라 행정구역을 넘나들어 보자는 원대한 계획은 성당을 나선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물리적 현실을 뼈저리게 깨닫게 된 뒤 취소되었다.
 




박물관들로 향하는 길에 길상사라는 작은 절이 있었다. 그냥 지나치려고 했으나, 성당에 앉아 검색해보았던 바로는 길상사가 1997년 설립으로 역사는 굉장히 짧지만 본디 요정(유흥 주점)으로 쓰이다가 운영자가 갑자기 불교에 빠져 터와 건물을 통째로 시주하여 생긴 절이라는 흥미로운 역사를 갖고 있다고 하기에 흥미로움을 참을 수 없어 들러보았다.

작은 절이여서 볼 것들은 딱히 없었으나, 보통의 사찰답지 않은 건물 배치 구조의 다채로움이 인상깊었다. 산과 어우러져 중심에서 가지가 뻗어나오듯이 건물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 이외엔 평범한 사찰의 모습 그대로였다. 기복을 위한 이름표가 달린 연등들, 언제나처럼의 금색 불상. 슬슬 발에 한계가 오고 있었기에 10분 정도 앉아서 쉰 뒤 사찰에서 나왔다.
 




가구박물관으로 가는 길은 인도 없이 차도로만 되어 있었다. 소소한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박물관에 도착하고 나니 뭔가 이상했다. 딱 봐도 문을 열고 있지 않는 듯한 느낌이었다. 경비원은 안에서 자고 있고, 사람 그림자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핸드폰으로 검색을 해보니 아뿔싸, 코로나로 인한 장기 휴관 중이었다. 아니 코로나 다 끝나가는 이 시국에 아직도? 불평을 해봤자 문이 열리지는 않기에 다시 차도 한켠을 따라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그리고 새삼 성북동의 개방감과 탁 트인 뷰를 실감했다. 앞에서 돌아다닐 때도 여실히 느꼈던 부분인데, 이 동네는 집들이 전부 거인들을 위해 지어진 듯 했다. 집들이 정말 집채만했다. 길을 따라 걷는데도 벽과 벽이 끝없이 이어져 뚜껑 없는 거대한 터널을 걷는 것 같았다. (후에 나무위키에 검색하여 알게된 사실은, 성북동은 굉장한 전통적 부촌이며 2022년 기준으로 입지가 좋지 못한 주택이라도 100억이 넘는다고 한다. 드라마에서 나올법한 진짜 부잣집 집들을 언젠가는 가보고 싶었는데, 이번에 그 외견들을 죽 훑어본 셈이다.) 그리고 가구박물관은 언덕의 꽤 높은 곳에 위치해 있었기에 그 으리으리한 집들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 사진으로는 잘 보이지 않지만, 또 온갖 식물들이 시야를 가리고는 있었지만, 이때부터 성북동이라는 동네의 규모가 점점 느껴지기 시작했다.
 






어쨌든, 발걸음은 쉬지 않았고 국립옛돌박물관에 도착했다. 이제까지의 영세하고 소박한 규모의 박물관들과 달리 이곳은 굉장히 현대적이고 정돈된, 본격적인 박물관의 모습을 띠고 있었다. 컨텐츠도 분명 많았다. 1층도 돌덩이들, 2층도 돌덩이들, 야외 공원도 돌덩이들. 돌덩이’만’ 무척이나 많았다. 돌덩이들이 너무 많아 처분하기 어려워 되는 대로 놓아둔 느낌마저 들 정도로 정말 보이는 모든 곳에 돌덩이들이 있었다.
 







그리고 3층에는 뜻밖의 현대미술 작품들이 있었다. 이곳에는 인터넷에서 현대미술의 무가치성으로 한창 논란이 됐던 작품도 있었는데, 뜬금없이 익숙한 작품을 만나니 인터넷 망령으로써 일전에 자주 이 그림을 봤던 나로선 무척 반가웠다. 직접 보니 생각보단 괜찮은 작품처럼 느껴졌다. 이외에도 미술에 문외한인 나라도 뭔가 있어 보이고 비싸 보일 것 같은 작품들이 10몇점 넘게 걸려 있었다. 잠시 바라보다, 박물관을 나와 마을버스를 타고 대학로로 향했다.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연극 예매를 한 뒤 다시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주로 사람 구경을 했다. 나같은 히키코모리에게 대학로처럼 생기있는 사람들이 범람하는 풍경을 보는 것은 쉽게 오지 않는 기회이기에 이미 탈진한 발이지만 열심히 골목을 돌아다니며 사람들과 건물들을 눈에 주워담고 다녔다. 연극 시간이 되었고, 줄을 섰다. 

커플들이 아닌 사람들을 찾기가 힘들었고, 그들이 꽁냥대는 모습도 잘 관찰할 수 있었는데, 나는 그 모습들을 보곤 부럽다는 감정도 물론 지배적이었으나 그보다는 난 평생 연인을 만들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못난 외모, 게으름과 인생의 권태로 말미암은 자기 관리의 부재, 보편적 인간들의 생리와는 전혀 동떨어진 사회부적응자적 멘탈리티 등등등 하지 못하는 이유도 수 없이 많을 뿐더러, 할 수 있다손 치더라도 사랑을 주고 받는 것은 그 자체로 너무나도 피곤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서로의 사랑의 존재를 끊임없이 확인하고 확인받아야 한다니 그것만큼 번거로운 일이 또 있을까? 연애를 해보지 못한 자의 신포도질에 불과할 수도 있겠으나, 안부를 주고 받는 것조차 정신적 피로감을 준다는 이유로 멀쩡한 친구 관계도 형성치 못한 나로선 정말 그것이 신포도일 것이라 생각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이 모든 발언들을 무색하게 만드는 것이, 내가 고른 연극은 공교롭게도 로맨스물 연극이었다. 결국 외로운 것이 아니냐? 그래서 연애를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하고자 이런 로맨스물을 고른 것 아니냐? 묻는다면, 할 말이 없다. 연극은 재미있었다. 창작물의 재미 공식들을 충실히 따르고 있었다. 난 이렇게 흔해빠져도 국밥같이 든든한 컨텐츠들을 좋아라 하는 편이기에 매우 만족스럽게 관람했다. 연극이 마치고 건물을 나오니 찬 바람이 얇게 입은 옷 사이로 조용하게 파고들었다. 기숙사로 돌아가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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