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21/08/04 17:15:19수정됨
Name   Klopp
Subject   무제(無題)
이직을 결정한 후 다니던 회사를 퇴사하고 새로운 직장에 출근하기까지
1주일 정도의 시간이 갑자기 생겼다.
집에서 그냥 게임이나 실컷 하고 늘어지게 잠만 자볼까 하다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모르지만, 마음이 동하여
명절 외에는 잘 가지 않게 되는 고향 집에 가보기로 했다

사회생활을 시작한 뒤로는 비용보다도 빠르게 도착하는 게
여러모로 나은 선택지라고 생각해서 늘 KTX를 타고 다녔지만
이번에는 시간도 많고 굳이 빨리 도착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해서
학생 때까지 늘 타고 다녔던 우등 버스로 고향에 도착했다.

오랜만에 명절이 아닌 날 내가 오다 보니,
60이 넘은 나이에도 여전히 밤장사를 하시는 어머니가
단골 메뉴인 삼계탕, 소불고기에 디저트로 단지우유까지 준비해 놓고는
고작 하루만 자고 가는 아들에게 쓰-윽 밀어 넣은 뒤 가게로 나가신다.

신기하게도, 내 나이가 30대 중반이 넘고
이제는 다른 가정의 여성을 만나 결혼하여 새로운 가족을 꾸린 흔한 30대임에도
엄마가 차려주는 밥을 먹으면 어릴 때 먹던 맛과 늘 같아서
어릴 적 엄마가 차려주던 밥을 배불리 먹던 시절이 생각나 혼자서 기분 좋은 웃음이 났다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먹고 자고 다음날 저녁까지 먹고는
나는 서울로 가는 버스를 타러, 엄마는 가게를 나가기 위해 함께 버스에 올랐다.
가는 도중에 엄마가 먼저 내리고 나는 조금 더 가다가 내리는,
내가 대학생 뒤로는 1년에 몇 번이고 겪는 흔한 과정이다.

이윽고, 엄마가 내릴 버스 정류장이 되어 엄마가 아쉬워하며 먼저 내리고는
서 있는 버스를 향해 한번 뒤를 돌아보더니 다시금 가게를 향해 발걸음을 재촉해 걸어간다

그리고 학생 때도 늘 그랬던 것처럼 어김없이
매번 그 뒷모습을 보는 나의 눈에 눈물이 맺힌다.

결혼 후에도 학생 때처럼 평일 이틀에 한번은 전화를 하고,
생일이나 연말이 되면 올해 고생 많았다고, 사랑한다고 얘기하면서도
한번도 눈물이 나는 적이 없는데, 왜 이 순간 만큼은 수많은 세월을 지내오며
수없이 겪는일임에도 한결같이 눈물이 나는 걸까?

매번 그런 생각이 들어서 인 것 같다.

이제는 환갑을 넘은 그녀에게
그녀의 부모도 자식도 아닌 그녀 자신의 인생이 중요한 날이 과연 몇 일이나 있었을까?
정확하지 않지만 아마 채 몇 년도 되지 않았을 테다.

다행히도 낙관주의자인 나는
아주는 아니더라도 우리에게 함께 지낼 시간이 여전히 많다고 믿고 있다.
가급적 엄마의 남은 인생의 주인공이 엄마의 행복일 수 있도록,
그치만 꼭 다음 생에도 내 딸이 아닌 내 엄마로 태어나 달라며 속으로 소원을 빌고 나니
내가 탄 버스도 엄마를 지나 버스터미널을 향해 움직인다.

엄마는 치사하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어쩔 수 없다.
나에게 다음 생이 있다면 그녀의 아들로 또 행복하고 싶기에-



14
  • 따숩따... 따수워...
  • 담담한 가운데 사람의 심금을 울리네요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11318 음악산타가 되지 못한 남자 6 바나나코우 21/01/03 3767 3
10507 도서/문학무라카미 하루키라 쓰고 상실의 시대라 읽는다. 3 렐랴 20/04/17 3767 2
13099 생활체육5킬로 감량까지 걸린 시간 7주 7 당근매니아 22/08/20 3767 4
12457 정치폴란드 대통령은 베이징 올림픽을 찾는다. 9 코리몬테아스 22/01/20 3768 11
9637 음악롤러스케이트를 한 쪽만 신은 아이와 흥정에 넘어간 아이 4 바나나코우 19/09/08 3769 1
11417 도서/문학[서평] 인에비터블(The Inevitable, 2016) 4 bullfrog 21/02/14 3769 3
13455 방송/연예2022 걸그룹 6/6 10 헬리제의우울 23/01/03 3769 12
12405 경제2021년 5대백화점 매출 순위가 공개되었습니다 2 Leeka 22/01/05 3770 0
13071 기타자동차용 손뜨개 방석을 판매합니다. 10 메존일각 22/08/09 3770 2
9737 일상/생각방배동에서 7 멍청똑똑이 19/09/29 3771 11
4248 역사러일전쟁 - 뤼순 때문에 나라가 망할 판 12 눈시 16/11/28 3772 8
3973 창작[한단설] 아내와, 감기와, 아이와, 나. 13 SCV 16/10/21 3772 0
5389 스포츠이번 시즌 유수 클럽들 중간 단평 10 구밀복검 17/04/07 3772 4
6102 일상/생각중고등학생 시절 사교육 받은 이야기 12 공대왜간공대 17/08/13 3772 5
12619 육아/가정엄마에게 보내는 편지 13 하드코어 22/03/13 3772 42
6046 일상/생각여름철 극장가 하면 역시 애니메이션이죠..... 4월이야기 17/08/03 3773 3
6574 일상/생각미국 고등학생 축구 진로문제 21 Liebe 17/11/11 3773 5
7336 일상/생각다이렉트 자동차 보험 갱신한 이야기 3 Toby 18/04/05 3773 0
11961 일상/생각무제(無題) Klopp 21/08/04 3773 14
7588 스포츠180526 김치찌개의 오늘의 메이저리그(추신수 시즌 7호 솔로 홈런) 김치찌개 18/05/26 3774 0
8491 오프모임11월 8일 목요일 타로세션 오프모임 정리 7 T.Robin 18/11/09 3774 8
8419 음악홍차가 식어가는 밤 4 바나나코우 18/10/25 3774 1
13716 일상/생각이웃집 정신병자 12 당근매니아 23/04/05 3774 9
6100 일상/생각어머니가 후원 사기에 당하셨네요;;; 7 그리부예 17/08/12 3775 0
7021 게임하스스톤 밸런스 패치 예정 5 저퀴 18/01/30 3775 0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