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21/07/24 01:07:54
Name   celestine
Subject   영원한 인쉐옌 永遠的尹雪艷 上
https://b111.net/novel/46/46800/4260014.html

1.

인쉐옌은 나이 들지 않아요. 십몇 년 전 상하이 바이러먼百樂門 무도장에서 명문가의 젊은이들이 앞다퉈 그녀를 예찬했다마는 지금 와선 다들 누구는 앞머리가 벗겨지고 누구는 숫제 머리칼이 희끗희끗해졌죠. 몇몇은 대만에 와서 철공소니, 시멘트 공장이니 나일론 섬유공장에 고문직이나 겨우 꿰찼지만, 은행장이나 기관장으로 출세한 이도 없지는 않아요. 하지만 세상일이 어찌 돌아가든 인쉐옌은 언제까지고 인쉐옌 그대로랍니다.  타이베이에서도 여전히 매미 날개 같은 새하얀 비단 치파오를 몸에 두르고 희미한 미소를 짓는 인쉐옌, 눈가에 잔주름 하나 지지 않는다니까요.

인쉐옌은 참으로 자연스레 사람을 끌어당겨요. 하지만 누구도 그이의 어디가 그토록 사람을 매료시키는지 딱 집어 말하지 못하죠. 인쉐옌은 짙게 화장하는 법이 없어요. 공을 들여봐야 입술에 한 듯 만 듯 립스틱만 살짝 바르는 게 인쉐옌의 화장법이에요. 인쉐옌은 울긋불긋 화려한 치장도 좋아하지 않아요. 찌는 듯이 더운 여름날, 은백색으로만 몸을 감싼 인쉐옌의 차림새는 어찌나 깔끔하던지. 새하얀 피부랑 가녀린 몸매 그리고 아리따운 눈썹과 고운 눈동자가 어우러진 달걀형 얼굴, 하지만 그 어느 것도 인쉐옌 특유의 매력을  속시원하게 설명하진 못해요. 인쉐옌을 본 적 있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이리 말하더랍니다. 인쉐옌의 손짓 하나 걸음 하나에도 범인은 흉내도 못 낼 기품이 우러나온다고요. 다른 이들이 몸을 쭉 뻗거나 눈살을 찌푸리면 눈꼴 사나울 뿐이지만 인쉐옌이 하면 그 또한 사랑스럽고 우아하기 짝이 없다네요. 인쉐옌은 말수도 많지 않아요. 꼭 필요한 경우에만 쑤저우 억양의 상하이말로 몇 마디 하는데 사리에 맞고 부드럽고 고운 말뿐이죠. 지갑 사정으로 인쉐옌에게 춤을 청할 형편이 못 되는 무객들도 다만 인쉐옌의 자태를 쳐다보고 매끄러운 상하이 말 몇 마디를 들을 수만 있다면야 그저 감복할 따름이었답니다. 살며시 기울인 머리며 가볍게 휘도는 허리며, 인쉐옌의 춤 선은 느긋하게 플로어를 노닐었어요. 정신없이 빠른 곡일지라도 절대 박자를 놓치지 않고 한결같이 섬세하고 유려하게 춤췄죠. 미풍에 나부끼는 버들잎처럼, 중력이 느껴지지 않았달까요. 인쉐옌은 자신만의 선율로, 자신만의 박자로 움직였어요. 바깥 세계가 어찌 움직이든 그녀 내부의 균형은 털끝만큼도 영향받지 않았죠.

인쉐옌의 매력은 참말 다 셀 수 없을 만치 엄청나게 많아요. 하지만 어떤 면모는 신비로움을 덧칠한달까, 되려 알 수 없는 기분이 든다니까요. 인쉐옌의 명망이 오를수록 질투랑 시기도 심해져서 언니 동생 하는 그녀의 동료들이 악의를 담아 온갖 중상모략을 퍼뜨렸어요. 인쉐옌 팔자에 낀 중살重煞은 백호白虎를 건드리고 사람을 해친다고, 집안을 결딴내고 심하면 죽음에 이르게 한다고요. 그렇지만 중살 소문이 되려 인쉐옌의 이름값을 높일 줄 누가 알았겠어요. 상하이 사교계의 내로라하는 남자들이 모두 호기심을 품었으니 말이에요. 삶에 별다른 자극이 없고 가산도 풍족하다면 남자는 엉뚱한 모험에 뛰어들고 싶기 마련, 황푸黃浦거리에 모르는 사람이 없는 이 불길한 별과 한판 승부를 내보겠단 남자가 한둘이 아니었답니다. 상하이 섬유업계의 대재벌 왕王 씨네 도련님 왕꾸이셩王貴生 도 탐험가 무리 가운데 하나였어요. 하루가 멀다 하고 최신형 캐딜락을 손수 운전해 와서는 바이러먼 입구에서 인쉐옌이 일 마치고 나오길 기다렸다죠. 두 사람은 국제호텔國際飯店 24층 옥상 가든에서 화려한 만찬을 즐겼어요. 밤하늘의 달빛과 찬란한 별들을 바라보며 왕꾸이셩이 말했어요. 그의 집에 가득한 황금으로 사닥다리를 쌓아 올려 하늘에 올라가 초승달을 집어다 인쉐옌의 탐스러운 귀밑머리에 꽂아주겠노라고. 인쉐옌은 가만가만 미소지으며 태연자약하게 난초처럼 가느다란 손을 내밀어 러시아산 캐비어가 초승달 모양으로 올려진 카나페를 집어 입에 넣었답니다.

왕꾸이셩은 필사적으로 투자하고 물불을 가리지 않고 돈을 긁어모았어요. 재산을 서너 배로 부풀려 인쉐옌 주변의 돈 많은 경쟁자들을 하나하나 물리칠 심산이었죠. 다이아몬드와 마노를 엮은 목걸이를 인쉐옌의 목에 걸어선 집에 데려다 소유물로 삼을 꿈에 부풀었답니다. 왕꾸이셩이 부정부패 죄목에 얽혀 투옥되어 총살당한 날, 인쉐옌은 왕꾸이셩을 애도하는 의미에서 하룻밤 바이러먼 문을 닫아걸었어요.

결국 인쉐옌을 차지한 사내는 상하이 금융계에서 한창 기세가 등등했던 홍 처장이었어요. 홍 처장은 전처를 소박 놓고 세 아이를 팽개치곤 인쉐옌이 요구한 열 가지 약속을 들어주었죠. 그리하여 인쉐옌은 홍 부인이 되어서, 상하이 프랑스 조계租界에 일본사람으로부터 몰수한 호화로운 서양식 저택에 살 게 되었답니다. 두세 달 갈고 닦은 끝에 느지막이 피어난 옥리화玉梨花 나무처럼 상하이 상류층 모임에 만발한 다른 꽃들을 모두 압도해버렸지 뭐예요.


인쉐옌은 참말 주위를 압도하는 자질을 타고났어요.  화려한 연회가 열릴 때마다 신사숙녀들이 요란스레 단비 모피코트 입고 붉은 밍크 목도리 두르고 참석한들 은색 여우 털 코트를 반쯤 뒤로 넘기고 허리를 띠로 묶은 인쉐옌에겐 상대가 되질 못 했죠. 삼월의 산들바람처럼 사뿐히 등장하는 순간 그 자리의 모든 사람의 시선은 바람에 쏠리듯 인쉐옌에게 쏟아졌다니까요. 사람들 속에서 유달리 차갑고 요염한 눈의 요정처럼 반짝거리는 인쉐옌, 살랑살랑 바람을 타는듯한 그이의 걸음걸이를 본 신사숙녀들 눈에 불꽃이 일었어요. 이게 바로 인쉐옌이에요. 자오펑兆豐 나이트클럽의 댄스 플로어에서, 난신蘭心극장의 복도에서 그리고 샤페이루霞飛路 에 줄줄이 늘어선 고관대작 저택에서 은백색 빛을 발하며 소파에 비스듬히 앉아 입가에 보일락말락 한 미소를 머금은 인쉐옌에게 은행 지점장이랑 임원들, 섬유공장 사장이며 부장들 그리고 신흥재벌들과 부인네들까지 덩달아 무릎 꿇었어요.

하지만 홍 처장 팔자도 결국 무른 탓인지 인쉐옌의 중살을 누르긴 역부족이었나 봐요. 첫 해에 파직되고, 그다음 해는 파산하더니 타이베이에 와선 한직 하나 건지지 못했다니까요. 인쉐옌이 홍 처장과의 관계를 정리할 땐 양심적이었다 할 수 있겠죠. 인쉐옌 본인 재산 말고는 상하이에서부터 따라온 이름난 요리사랑 쑤저우 출신 시녀 두 사람만을 데리고 나갔다니.



2.

인쉐옌의 새 저택은 런아이루仁愛路 4번지 고급주택가에 자리 잡은 최신 양옥이에요. 응접실이 연회 식탁 두셋은 들어가고도 남을 만큼 넓죠. 새 저택의 모든 공간이 인쉐옌의 꼼꼼한 눈과 손길을 거쳤답니다. 응접실은 도화심홍목桃花心紅木 으로 만든 가구 일습을 장만해 채웠어요. 기다란 전통식 소파 위에는 원앙이 노니는 모양 자수가 새겨진 새카만 쿠션이 넉넉하게 놓였죠. 소파는 앉았다 하면 절로 빨려들 듯 푹신하고, 쿠션은 몸을 기대면 아늑하기가 한량없다나요. 인쉐옌의 저택을 한 번이라도 들른 적 있는 이들은 거실의 꾸밈에 감탄하며 언제까지고 머무르고 싶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아요. 인쉐옌이 마작 놀이하는 이들을 위해 특별히 설치한 마작 방에는 마작용 탁자랑 조명등이 아주 세심하게 배치되었어요. 꽃골패놀이挖花 를 즐기는 손님에겐 방음 처리된 별실을 마련, 손님들이 틀어박혀 마음껏 떠들며 놀 수 있도록 배려했고요. 겨울에는 난방, 여름에는 냉방장치 덕에 인쉐옌의 저택에 둘러앉은 이들에게 타이베이의 싸늘한 한기나 꿉꿉한 더위는 딴 세상 일이나 마찬가지랍니다. 응접실 탁자 위의 고풍스러운 꽃병엔 늘 제철 생화가 꽃혀 있어요. 인쉐옌은 꽃꽂이에도 무척 신경 쓰죠. 중산베이루中山北路의 장미 꽃집에서 엄선된 생화를 일년 내내 보낸답니다. 여름내내 응접실에 달콤하고 나른한 만향옥晚香玉 내음이 은은하게 감돌아요.

인쉐옌의 새 저택은 어느새 그녀의 옛 친구들과 새 지기들의 회합 장소가 되었어요. 옛 친구들은 모였다 하면 좋았던 옛 시절을 그리며 인쉐옌 앞에서 신세타령에 시간 가는 줄 모른답니다. 그들에게 인쉐옌은 상하이 바이러먼 시대의 영원한 상징이자 베이징과 상하이를 가로지르던 시절의 황홀함을 간직한 살아있는 증거니까요.

"아가, 이 아저씨 머리칼이 죄다 하얗게 새어버린 걸 봐라! 그런데 넌 소나무마냥 변함이 없어, 아니 점점 더 젊어지는구나!"

우吳 사장은 상하이 시절 은행장이었고 바이러먼 단골이었어요. 타이베이에 와선 철공소에 고문이라고 이름이나 걸어두고 하릴없이 노는 신세가 되었지만요. 인쉐옌을 마주할 때마다 우 사장은 늘 반농반진, 유쾌한 척하지만 입으로는 끊임없이 본인의 불우한 처지를 늘어놓곤 해요. 머리는 눈에 띄게 세어버리고 신경통 탓에 걸음걸이는 비틀비틀 볼품 사납죠. 게다가 눈병이 심해서 속눈썹이 눈을 찔러대서 눈에는 눈물이 늘 글썽글썽, 눈이 푹 꺼져서는 시뻘겋게 충혈되고 문드러졌다니까요. 겨울이면 인쉐옌은 응접실의 전기난로를 우 사장 곁에 끌어다 놓고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직접 우린 철관음 차를 대접한답니다. "무슨 말씀을요, 대부님. 아직 한창 위풍당당하신걸요."


인쉐옌의 말 한마디에 마법처럼 우 사장은 자존감을 회복하고 기분이 한결 나아져요. 문드러져 가는 눈을 끔벅끔벅하며 응접실에 모인 사람들을 향해 좌궁坐宮 한 곡조 뽑는 거죠. 있는힘을 다해 짜낸 처량한 목소리로요.

용의 몸으로 개천에 머무나니
모래밭 속에 갇혀진 신세로다

我好比淺水龍,被困在沙灘

인쉐옌은 남자뿐 아니라 여자를 미혹하는 재주도 몸에 배어 있어요. 인쉐옌과 교류하는 부인네들은 상하이 시절부터 험담을 늘어놓곤 했는데요, 인쉐옌이 탄탄대로를 걸을 때면 부인네들은 분을 삭이지 못하고 흉을 보았죠. 잘나봐야 결국 술집에서 웃음 파는 년 아니냐고요. 인쉐옌의 뒷배를 봐주던 거물이 몰락할 적엔 한숨들을 쉬며 한마디씩 거들었어요. 팔자가 센 계집은 어쩔 수 없다느니 남자 잡아먹는 요물이니 아예 처음부터 얽히질 말아야 한다느니 말이죠. 하지만 십몇 년이 지나도록 부인네들은 어느 하나 인쉐옌의 추종자 노릇을 그만두지 않았을뿐더러 타이베이에 와서도 여왕벌을 받들어 모시는 양 인쉐옌의 저택을 문지방이 닿도록 드나들어요. 사람 맘을 들었다 놨다 하는 인쉐옌의 매력을 다들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거죠.  인쉐옌은 타이베이 홍샹鴻祥 매장에서 특별 대우를 받아 25퍼센트 할인 가격으로 끊어온 주단으로 지은 옷을 입고 샤오화위엔小花園 구두점 안에서도 최고급 꽃자수 수제화繡花鞋 를 골라 신는답니다. 홍루紅樓의 샤오싱 가극 紹興戲碼 에도 조예가 깊어서 배우 우옌리吳燕麗 가 멍리쥔 孟麗君 역을 맡은 무대 제일 앞자리 무료초대권은 늘 인쉐옌 몫이죠. 시먼딩 西門町 일대의 대륙풍 간식 맛집들도 하나하나 모르는 곳이 없을 만큼 박식해요. 그래서 인쉐옌 추종자 부인네들은 인쉐옌이 이끄는 대로 시먼딩 거리를 돌아다니며 샤오싱 가극을 관람하고 싼류주三六九에 둘러앉아 계화탕桂花湯 을 맛보며 십몇 년간의 절망과 고뇌를 떨쳐버리는 거예요. 인쉐옌 주위에 항시 감도는 옛 상하이 별천지의 사향麝香, 그 농후한 향에 산전수전 다 겪은 중년 부인네들도 반쯤 취해서는 부지불식간에 상하이 우썅자이五香齋 의 게황면 (蟹黃面: 게살볶음면) 맛이 기가 막혔다며 아련하게 추억하는 거죠. 인쉐옌은 툭하면 우울증에 빠지곤 하는 부인네들을 다독이며 곡절 가득한 하소연을 다 들어주고 적절한 위로의 말로 초조하고 불안한 그네들 기분을 풀어준답니다.

"졌수다, 아주 깨끗하게 졌네! 여하튼 집에 판돈 내줄 사람 따로 있으니 걱정이랑 말아요, 내가 잃어주지 않음 엄한 사람이 잃을 게 아닌가"

쑹宋 부인은 마작에서 돈을 잃을 때마다 인쉐옌에게 속상한 마음을 토로했어요. 쑹 부인은 대만에 와선 갱년기를 겪으며 살이 쪄서 체중이 80kg까지 불어버렸어요. 육중한 몸이 되선 조금만 걸어도 숨을 몰아쉬더라니까요. 쑹 부인은 온갖 신산스러운 이야기를 늘어놓았어요. 까닭인즉, 남편이 외도를 저지르며 자신에게 차갑게 구는데 정부란 여자는 몸매가 낭창한 어린 술집 계집이더라고요. 십몇 년 전만 해도 상하이 사교계를 휩쓸고 다녔던 쑹 부인, 지나간 추억에 푹 잠겨 헤어나지 못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죠.

이런 쑹 부인으로선 켜켜이 쌓인 속내를 털어놓기에 인쉐옌보다 더 나은 이가 없을 수밖에요. 오로지 인쉐옌만이 진정으로 쑹 부인의 금석지감今昔之感에 공감해 줄 수 있으니까요. 쑹 부인은 쓰라린 마음을 되뇌다 왈칵 울음을 터뜨리며 얼굴을 감싸 쥐었어요.

"쑹 언니, 옛말에 <인무천일호 화무백일홍 人無千日好,花無百日紅> 이라, 세상에 누가 평생토록 부귀영화 누리겠어요?"

인쉐옌은 조곤조곤 쑹 부인을 달래며 뜨거운 물수건을 건네었어요.

쑹 부인은 팔자소관이라 단념하지 않았어요. 훌쩍훌쩍 흐느끼며 응어리진 원념을 한바탕 털어놓고야 말았죠. "내 팔자가 남들보다 못할 리 없는데! 자네야 평생 근심 걱정할 일이 있겠냐마는, 남들이 알아서들 도와주고 아껴주잖아"

3.

인쉐옌은 확실히 근심 걱정할 필요가 없어요. 저택은 방문객들의 차들로 늘 문전성시를 이루죠. 옛 벗들에게 인쉐옌의 집은 세파에서 벗어난 도원향이거니와 새 벗들에게도 다른 데서 찾아보기 힘든 매력이 흐르는 공간이에요. 인쉐옌은 상하이 샤페이루 시절에 뒤떨어지지 않게끔 신경쓰며 저택만의 독특한 풍취를 이어나갔어요. 드나드는 손님 중에는 한창때가 지난 이들도 없지 않았지만 그래도 나름의 지위와 품위를 지닌 이들이죠. 저택에 들어왔다 하면 다들 어깨에 힘이 들어간다니까요. 실상 십몇 년 전에 쓸모가 없어진 직함일지언정 인쉐옌이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불러주기만 하면 마치 고관대작이 된 듯한 기분이 들어 뿌듯하기 그지없죠. 새로운 벗에게도 인쉐옌의 저택은 인맥을 쌓기에 더할 나위 없는 곳이고요.

물론 가장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존재는 인쉐옌 자체에요. 인쉐옌만큼 주인 역할에 걸맞은 이는 없을 테니까요. 인쉐옌은 손님들 하나하나 나이나 신분을 막론하고 살갑게 맞이한답니다. 저택에 들어온 손님들은 새카만 쿠션이 깔린 푹신한 응접실 소파에 몸을 푹 파묻어 제집에 있는 양 쾌적하고 안락한 기분을 만끽해요. 그리하여 인쉐옌의 저택은 갖가지 모임이며 생일연회로 늘 북적이고 특별한 일이 없는 날일지라도 사람들은 기어이 구실을 만들어서 인쉐옌 저택에 몰려와 마작판을 벌인답니다. 저택은 일 년 내내 손님들로 발 디딜 틈이 없어요.

인쉐옌 본인은 마작판에 끼는 법 없이 손님들이 편하게 놀 수 있도록 늘 만반의 준비를 다 한답니다. 마작 테이블은 두 테이블이 될 때도 있고 세 테이블일 때도 있어요. 손님들의 마작 습관이랑 버릇이라면 사소한 것까지 숙지하는 인쉐옌이에요. 분위기가 흐트러지는 법이 없도록 자리 배정과 마작 패 배치에 완벽을 기한답니다. 쑤저우 출신 말쑥한 시녀 둘을 마작 손님들 곁에 두어 시중을 들도록 하고요. 오후 간식으로는 닝보의 쌀떡이나 후조우의 연잎밥을 내왔고 저녁 식사로는 인쉐옌 저택에서 일하는 상하이 출신 명 요리사가 조리한 금은퇴 (金銀腿: 돼지족발찜), 귀비계 (貴妃: 술에 절인 닭찜),창하 (搶蝦: 새우요리), 취게 (醉蟹: 게장 절임) 등등 갖가지 대륙풍 요리가 나온답니다.

인쉐옌이 손수 설계한 둥그런 회전 식탁은 매일 돌아가며 극상의 연회 요리를 선보여요. 밤이 깊어지면 시녀 둘이 향수를 뿌린 새하얗고 차가운 물수건을 손님들께 권해요. 마작에 한창 몰두한 손님들의 피로를 풀어주기 위함이죠. 그리고 야식으로 계탕은사면 (雞湯銀絲面: 닭국물로 끓인 소면) 한그릇씩을 대접한답니다. 손님들이 늘상 통 크게 걸고 노는 탓에 판돈을 다 합치면 2,3천이 예사에요. 돈을 딴 이들이야 당연히 기분이 날아갈 듯 했지만 설사 져서 잃더라도 속상하진 않아요. 다들 실컷 먹고 놀고 난 다음 자리가 파할 때쯤 인쉐옌은 손님 한분 한분 집까지 모시고 가도록 택시를 부르고 성심껏 배웅하기를 잊지 않아요.

마작판이 한창 불이 붙을 때쯤 인쉐옌은 얇은 옷으로 갈아입고 마작 테이블 사이사이를 산들바람처럼 살랑살랑 가볍게 돌며 판세를 살펴본답니다. 은백색 무녀복으로 몸을 감싼 여제사장이 전장의 전사들을 위해 축수올리고 기도드리듯.

"얘야, 이 대부가 쫄딱 망할 거 같은데 어쩌냐"

패배의 순간마다 우 사장은 속눈썹이 들러붙은 눈으로 인쉐옌을 간절히 쳐다보며 애타게 도움을 청해요.

"아직 일러요, 대부님. 다음 네 판은 싹 쓸어버리실 텐데".

인쉐옌은 새카만 비단 쿠션을 가져다 신경통에 시달리는 우 사장 등에 받쳐주며 운수 나쁜 이 노인을 달래주어요.

"쉐옌씨, 와서 이 판 좀 봐요. 내가 오늘 다 계획이 있었는데 어떻게 패가 죄다 이 모양 이 꼴로 나올꼬"

여자 손님들도 늘 애걸하다시피 인쉐옌을 부른답니다. 쑹 부인조차 패배가 목전에 닥칠 때면 체면불구하고 골패 두 개를 손에 끼우고 외쳐요. "젠장, 젠장, 젠장. 아주 피도 눈물도 없어야, 너 죽고 나 죽고 한번 해보자고!"

인쉐옌은 그네들의 과거를 떠올리며 울분에 찬 마음을 부드럽게 어루만져주어요. 이럴 때면 인쉐옌의 목소리는 신의 음성처럼 사람들의 경외감을 일으키곤 한답니다. 마작판 위에서 인간의 명운은 예측불가, 손님들은 인쉐옌의 응원 한마디로 다시금 믿음을 다지고 투지를 불태워요. 인쉐옌은 한 켠에 서서 입에 금색 파이프를 물고 이따금 둥그스름한 연기를 내뿜으며 동정심을 담은 눈으로 바라본답니다. 인생의 승리자와 패배자, 늙은이와 젊은이, 한때의 풍운아와 절세가인이 열에 들떠 서로를 물어뜯고 할퀴는 광경을.


----------------------------------------------------------------------------------------------------------------------------------------------------------------------

1. 상하로 나누어 올립니다. 기승전결 서사 중심이 아니라서 자르는게 큰 의미는 없습니다만 분량상 ㅎㅎ

2. 인쉐옌이란 인간(이 아니라 여신이라능!! +_+bbb) 이 얼마나 예쁘고 상냥하고 취향 고급진지 구구절절 묘사하는게 이야기의 일차적 목표처럼 보이지만서도 사실 중요하지 않다는거 아시죠.  Beauty is in the eye of the beholder. 눈 뿐만 아니라 귀 역시 제멋대로 아름다움을 거르고 판단하는 장치, 인쉐옌의 <쑤저우 억양의 상하이 말> 이 뭔지 궁금했는데 유툽에 상하이 말로 소설 낭독하는 클립이 있더라구요. 중국인이 아니라 모르겠지만서도 여튼  중국 수많은 방언 가운데서도 우 방언, 그 중에서도 쑤저우 방언은 어여쁜 말이라 자부심이 대단하다네여. 상하이어랑 쑤저우어랑 서로 더 이쁘다고 경쟁한다고 ㅋㅋㅋ 작가님이 소설을 직접 각색해서 무대극으로 올렸는데 (상하이 극장에서 상연 ㅋㅋ) 대사가 전부 상하이어라 배우들도 고생했다네요. 유툽 클립 몇개 돌아다니는데 음질이 시망...

실상 작중 인쉐옌의 외모 묘사는 별로 꼼꼼하지 않아요. 날씬하고 피부가 하얗다 뿐, 키가 큰지 작은지나 눈코입 특징,  헤어스타일 등등 거의 아무 정보도 주어지지 않죠.  당연하지 인간이 어찌 감히 여신 외모가 이렇다 저렇다 논하겠읍니까 다만 우리가 믿을 건 여신님이 걸치는 옷이나 장신구, 구두, 향수 역할 하는 꽃, 즐기는 미식, 휘황찬란한 가구나 건물같은 물질입니다. 사람은 가도 물건은 남는법 -_-! 당시 (1965년) 기준 최고급 럭셔리 브랜드 굿즈들은 오늘날엔 꿈도 못꿀 가격은 아닌거 같아여...인쉐옌이 옷 맞춘 홍샹 주단 가게는 타이베이에서 여전히 영업중인데 인터넷 사진만 보믄 문턱이 아주 높아보이진 않던댕. 창업주가 애령경령미령 쑹시스터즈 치파오도 제작한 디자이너라나요. 쑹시스터즈도 다들 인간적으로다 통통한 몸매였는데 어울리게 지어준거 보면 꼭 여신 몸매 아니더라도 돈만 내면 몸에 맞춰주지 않을까요 (...)

옷가게 뿐 아니라 구두점도 실존하구요. 상하이 시대의 배경 - 바이러먼 (파라마운트 홀), 국제호텔, 난심극장 - 들 모두 백년 역사 지닌 곳이라 다들 위키에 항목 개설되어있구 사진 무진장 많더라구요. 전쟁 끝나고 난징, 상하이, 홍콩 거쳐 대만에 온 금수저 작가님이 다 보고 겪은 곳이라능. 음식이니 꽃이니 가구니 연극이니 당연 죄다 작가님이 일상생활로 누리던 것이라능. 당시엔 금수저 아니면 텍스트로 대리만족할수밖에 없었겠지만 요즘은 총천연색 영상이나 이미지로 업그레이드 간접 체험 할 수 있으니 좋은 세상일까나요. 번역보다 인터넷에서 음식짤 구경에 훨 시간 쏟아부었네요 . 음식짤이나 옷가게 구두가게 정보, 꽃의 함의 등등 너무 길어져서 따로 모았읍니다
https://tulip-pan-f22.notion.site/1965-d94f8360f4b140009165d52072c7d109
계속 업데함다..번역보다 짤 모으고 뒷 이야기 들이파는게 훨 잼있어여

3. 전에도 썼지만 <타이베이 사람들> 한국어 번역판은 80년대에 출판된 적 있습니다. 외대 허세욱 교수님 번역으로요. 당연 절판되서 도서관 수장고에 가야 찾아볼 수 있지만 중고서점에도 심심찮게 뜨는거 같더라구요. 관심있으신 분은 한번 찾아보시구, 이번 이야기는 전문이 올라와있네요 ->  https://blog.naver.com/eggdegul/60011720167?viewType=pc  
이렇게 훌륭한 번역이 있는데 굳이 다시 옮긴 이유요? 안이 치파오짤 음식짤 구경하다 어쩌다보니 (,..)


4. 여신님 자체보다 여신님이 거처하시고 입으시고 걸치시고 드시고 마시고 즐기시는 취향 엿보기가 우선이요, 그보다도 숭배자들의 천태만상 난리브루스 구경이 진짜 재미요 서사입니다. 위에 번역문 링크 블로그 주인장은 트로이의 헬레네에 비유하지만 갠적으로 헬레네는 멍청하다는 편견이 있는지라 -_- 전 고르라면 쉐옌 언니쪽입니다 ㅋ 마작 그거 전 나무위키 페이지만 봐도 머리가 어질하던데. 쓱 보고 판세분석, 보통 머리론 못한다능. 하우스운영은 아무나 하냐능.



11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공지 티타임 게시판 이용 규정 2 Toby 15/06/19 31718 7
    15066 도서/문학린치핀 - GPT 세계에서 대체 가능한 톱니바퀴를 벗어나려면 2 + kaestro 24/11/24 63 0
    15065 경제chat-gpt를 사용하여 슈뢰더 총리의 아젠다 2010 연설 번역하기 3 와짱 24/11/24 180 0
    15064 문화/예술아케인 시즌2 리뷰 - 스포 다량 kaestro 24/11/23 169 0
    15062 오프모임29일 서울 점심 먹읍시다(마감) 12 나단 24/11/22 567 4
    15061 스포츠[MLB] 2024 AL,NL MVP 수상자.jpg 1 김치찌개 24/11/22 126 1
    15060 스포츠[MLB] 2024 AL,NL 사이영 수상자.jpg 김치찌개 24/11/22 124 1
    15059 음악[팝송] 션 멘데스 새 앨범 "Shawn" 김치찌개 24/11/22 95 0
    15058 방송/연예예능적으로 2025년 한국프로야구 순위 및 상황 예언해보기 11 문샤넬남편(허윤진남편) 24/11/21 469 0
    15057 일상/생각우리는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3 SKT Faker 24/11/21 638 1
    15056 오프모임23일 토요일 14시 잠실 보드게임, 한잔 모임 오실 분? 4 트린 24/11/20 360 0
    15055 방송/연예페미니스트 vs 변호사 유튜브 토론 - 동덕여대 시위 관련 26 알료사 24/11/20 3565 32
    15054 생활체육[홍.스.골] 10,11월 대회 상품공지 켈로그김 24/11/19 266 1
    15053 여행여자친구와 부산여행 계획중인데 어디를 가면 좋을까요?! 29 포도송이 24/11/19 706 0
    15052 일상/생각오늘도 새벽 운동 다녀왔습니다. 5 큐리스 24/11/19 482 9
    15051 일상/생각의식의 고백: 인류를 통한 확장의 기록 11 알료사 24/11/19 519 6
    15050 게임[1부 : 황제를 도발하다] 님 임요환 긁어봄?? ㅋㅋ 6 Groot 24/11/18 477 0
    15049 꿀팁/강좌한달 1만원으로 시작하는 전화영어, 다영이 영어회화&커뮤니티 19 김비버 24/11/18 958 10
    15048 의료/건강고혈압 치료제가 발기부전을 치료제가 된 계기 19 허락해주세요 24/11/18 733 1
    15047 일상/생각탐라에 쓰려니 길다고 쫓겨난 이야기 4 밀크티 24/11/16 906 0
    15046 정치이재명 1심 판결 - 법원에서 배포한 설명자료 (11page) 33 매뉴물있뉴 24/11/15 1844 1
    15045 일상/생각'우크라' 표기에 대한 생각. 32 arch 24/11/15 1022 5
    15044 일상/생각부여성 사람들은 만나면 인사를 합니다. 6 nothing 24/11/14 917 20
    15043 일상/생각수다를 떨자 2 골든햄스 24/11/13 475 10
    15042 역사역사적으로 사용됐던 금화 11종의 현재 가치 추산 2 허락해주세요 24/11/13 575 7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